논문

이색의 생애

이색(李穡)의 생애

정의

牧隱 李穡(1328∼1396)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5월에 寧海(지금의 慶尙北道 寧德郡 ) 槐市村에 있는 外家 출생하여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별세한 고려 후기의 文人이자 政治人, 儒學者이다.

주자학자.

개설

목은 이색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이다. 이색의 시조는 韓山에서 임시직인 權知戶長을 지낸 允卿이다. 曾祖父는 奉翊大夫 版圖判書로 追奉된 昌世이고, 祖父는 지방관의 末職인 井邑監務를 지낸 自成이다. 韓山 李氏는 利穀과 李穡이 등과한 후에야 천하가 모두 본관인 韓山이 있음을 알 정도로 미미했으나, 양인의 등과로서 지방의 鄕吏에서 문장으로 發身한 新興士大夫 집안의 전형으로 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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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원(元)에 유학하여 고려에 성리학을 소개, 보급 확산시킨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는 불교와 대립된 주자학에 심취하여 원(元) 허노제(許魯齊)의 성리학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했으나, 중소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이성계, 조준 일파의 토지개혁안에 반대함으로써 고려 귀족계급에 속한 그의 입장을 뚜렷이 했다. 그의 정치적인 개량주의 입장은 불교에 대해서도 가혹한 비판을 가히지 못하고 절충적인 입장을 표명하여 기존 불교세력과 타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매우 깊어 조선 초기의 뛰어난 주자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제자였다.

학문 연구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인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程朱學)을 배웠다. 이제현의 문하생 중에 수제자로 이름났던 그는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하였다.

牧隱 李穡(1328∼1396)의 생애

관계 진출과 개혁 활동

1328년(忠肅王 15년) 5월에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寧德郡)에 있는 영해(寧海) 괴시촌(槐市村)에 있는 외가(外家)에서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과 모친 함창김씨(含昌金氏) 사이의 독자(獨子)로 아들로 출생하였다.

1341년(14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1344년(忠惠王 복위2년, 17세)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다. 이후에는 부친 이곡이 동지공거를 맡았던 충목왕(忠穆王) 3년의 과거뿐이었으므로 응시할 기회가 없었던 탓에 급제가 늦어졌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문에 대한 능력을 주로 평가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급제를 서두르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348년(忠穆王 4년, 21세)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3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이는 부친이 원 조정의 관료였던 까닭에 가능했다고 본다. 당시 원의 교육과 과거가 성리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점을 고려하면, 거기서 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351년(忠定王 3년, 24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恭愍王 1년, 25세)에 정경계(正境界)를 통한 전제(田制) 개혁, 어왜구(御倭寇)를 통한 국방 계획, 흥교육(興敎育)을 통한 교육의 진흥, 억이단(抑異端)을 통한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時政) 개혁에 관한 건의문으로 3,000자에 이르는 장문의 <진시무서(陳時務書)>를 올렸다. 이로써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353년(恭愍王 2년, 26세)에는 이제현·홍언박(洪彦博)이 주시(主試)했던 예부시(禮部試) 제술과(製述科)에서 을과(乙科)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1354년(恭愍王 3년, 27세)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제이갑(第二甲)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하였다. 이는 원나라 판도(版圖) 전역에서 향시를 거친 300인을 대상으로 한 회시(會試)에서 몽고인(蒙古人)·색목인(色目人)보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여 100인에 선발된 다음에 전시(殿試)에서 대책(對策)을 지어 평가받은 결과이다. 게다가 제1명은 반드시 몽고인으로 하도록 규정되었으므로 그의 성적은 사실상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종7품인 응봉한림문자승사랑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3월에 귀국하였던 그는 고려에서는 전리정랑(典理正郞) 겸 사관편수관지제교(史館編修官知製敎) 겸 예문응교(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355년(恭愍王 4년, 28세)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翰林院) 권경력(權經歷)에 등용되었다. 이와 같은 원나라의 우대에도 불구하고 신흥하는 명(明)의 힘에 밀린 원나라의 앞날이 어두움을 깨달은 그는

1356년(恭愍王 5년, 29세)에 연로한 모친을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에서 아주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에 그는 문무관 전선제도(銓選制度)의 개선을 포함한 시정팔사(時政八事)를 건의하였고, 이는 공민왕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7월에는 이부시랑(吏部侍郞) 겸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겸 사관편수관지제교(史館編修官知製敎) 겸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으로 주관하고, 문무관의 전선을 주도하였으며,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계속하여

1357년(恭愍王 6년, 30세)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좌승선(左承宣)·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恭愍王 10년, 34세)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문관(禮文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3년(恭愍王 12년, 36세)에 홍건적에게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안동(安東)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호종(扈從)한 공로로 벽상삼한단성보리공신(壁上三韓端誠保理功臣)에 오르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됨으로써,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이어서 그는

1365년(恭愍王 14년, 38세)부터 보문각(寶門閣)·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 됨으로써 이인복(李仁福)에 이어 문병(文柄)을 잡았고,

1367년(恭愍王 16년, 40세)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서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소장학자를 학관(學官)으로 발탁하여 명륜당(明倫堂)에서 신유학을 강론하니 성리학 교육에 일대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공민왕 14·18·20년에는 고거의 시험관을 맡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크게 활약하였던 뛰어난 문신들을 많이 선발하였다. 이 밖에도

1368년(恭愍王 17년, 41세)에 친시독권관(親試讀卷官),

1370년(恭愍王 19년, 43세)에 명(明)의 과거조령(科擧詔令)에 따른 향시(鄕試) 고시관(考試官)을 지내는 등 이 시기의 공거(貢擧)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윤소종(尹紹宗)·하륜(河崙)·이첨(李詹)·유백유(柳伯濡)·권근(權近)·서견(徐甄)·이행(李行)·남재(南在)·유관(柳觀)·김진양(金振陽)·염정수(廉廷秀)·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김도(金燾) 등을 뽑았으며, 맹사성(孟思誠)·길재(吉再) 등은 우왕 12년의 마지막 지공거로서 선발하였다. 이를 통해 형성된 목은당여(牧隱黨與)는 이성계(李成桂) 세력과 균형을 이룰 만큼 강성하였다.

주자학·정주학 등으로 이칭(異稱)되는 성리학(性理學)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1371년(공민왕 20년, 44세)에는 마침내 진재(眞宰)인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신돈(辛旽)을 발탁하여 서정(庶政)을 쇄신하려던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는데, 이는 그가 집권초기의 신돈과 상통하는 정치관을 지닌 데 말미암았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이런 협조관계는 교육(敎育)·과거(科擧) 등의 개혁을 집권자를 이용하여 달성하려는 동기와 전민변정(田民辨正)·산관통제(散官統制) 등의 개혁을 유력문신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내려는 요구가 서로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9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하였다.

1373년(恭愍王 22년, 46세) 11월에 상복을 벗은 뒤에 대광한산군(大匡韓山君)에 봉해지고,

1374년(恭愍王 23년, 47세)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자신을 총애하던 공민왕이 비명(非命)에 작고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1375년(禑王 1년, 48세) 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다.

연보에는 위와 같이 계속해서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 등의 책임자로 있었다고 하였지만, 모친상 이후로 불편하던 몸이 공민왕의 서거를 계기로 더욱 나빠졌던 탓에 7,8년 동안 칩거하였다는 본인의 진술로 보아, 이 시기에 그는 형식상의 직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랜 동안 관직을 떠나 있었던 것은 이인임(李仁任) 정권과의 갈등이 신병에 못지 않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의 통치이념이 부정되는 정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질병을 이유로 사직했거나, 친명책을 포기하고 친원책을 택하는 등 수구적(守舊的)이었던 집권세력이 그를 기피하였던 탓이었을 것이다.

1377년(禑王 3년, 50세)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79년(禑王 5년, 52세)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복귀하였고,

1382년(禑王 8년, 55세)에는 병을 이유로 판삼사사를 사양하였으나

1383년(禑王 9년, 56세)에는 판삼사사에 취임하였다. 이어

1384년(禑王 10년, 57세)에는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피봉되고,

1385년(禑王 11년, 58세)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 되었으며,

1386년(禑王 12년, 59세)에는 다시 과거를 관장하는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표면적으로는 재상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전히 실권에서 소외된 채 시문창작으로 소일하던 그가 다시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제거된 이후였다. 그는

그 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고, 그 후 오사충(吳思忠)의 참소로 장단(長湍)을 거쳐 함안(咸安)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되어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使)로 임명되었다. 귀양지 장단에서 선왕(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 중 애제자(愛第子)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시고 권지35에 전한다.

그는 역성혁명파의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정도전은 그와 우현보, 정몽주에게 격렬한 논조로 비판을 가한다. ?

1388년(禑王 14년, 61세) 정월에 판삼사사(判三司使)가 되었고, 이해에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최영(崔瑩)이 실각하자 수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맡았다.

1389년(昌王 1년, 62세)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한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10월에 노구를 이끌고 명(明)나라에 가서 관계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 지역인 철령을 두고 명나라가 자신들의 땅으로 하려고 하여 일어난 영토 귀속 분쟁)가 일어나자 명나라에 가서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며 화평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390년(恭讓王 2년, 63세)에 명으로부터 귀국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창왕(昌王) 즉위시에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當立前王之子]’고 했던 그의 발언에 대한 탄핵(彈劾)이었다. 게다가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제기한 사전개혁안(私田改革案)에 대해서도 그는 그들과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왕권의 정통성과 개혁을 빌미로 하여 혁명을 도모하는 움직임에 맞서서 창왕(昌王)의 왕위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창왕 원년(1389년) 7월 이임(李琳)을 천거하면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유배중인 우왕(禑王)을 알현하였으며, 이임·이성계와 함께 검리상전(劍履上殿)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명나라에 갈 때 수행했던 이숭인(李崇仁)이 탄핵받아 유배되자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버렸으며,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1389년 11월 이후의 그의 삶은 고려왕조의 운명처럼 파란만장하였다. 그가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것은 문신의 영수로서 고려왕조를 유지시키려는 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을 터이거니와, 제반 여건의 불리함으로 인하여 그는 정면에서 싸울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고려의 폐망을 맞는 불운을 맛보게 되었다.

함창(咸昌)으로 옮겨졌으나, 다시 이초(彛初)의 옥(獄, 무신 이초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하며 이를 반대한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이 화를 입었다고 무고했던 사건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수재(水災)가 발생해 다시 함창으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64세)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태조 1년, 65세)에 鄭夢周(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와 관련하여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으나, 정도전은 그를 구하지 않았다. 이후 금천·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3년(太祖 2년, 66세) 1월에 사면과 함께 경외종편(京外從便)의 은전을 입고 이태조에게 사은하였으며,

1394년(太祖 3년, 67세) 8월에는 한산에서 부인 권씨(權氏)의 상을 당하였다. 그리고

1395년(太祖 4년, 68세) 가을에는 부친 이곡(李穀)의 전철(前轍)을 따라 오대산을 유람하였고, 11월에는 이태조를 고구(故舊)의 예로 만났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의하면 그는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한산백(韓山伯)에 봉하고, 오고도제조(五庫都提調)를 맡는 등 태조의 융숭한 은전을 받기도 하였으나,

예를 다하여 출사 종용을 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1396년(태조 5년, 69세) 5월에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고 하나,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이색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종덕(宗德)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1388년에 부친에 앞서 병사하였다. 차남 종학(種學)은 예부시에 급제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동지공거(同知貢擧)를 지내고 조선 개국 직후 장사(長沙)로 유배되던 도중에 체복사(體覆使) 손흥종(孫興宗)에게 교살당했으며, 문집 [인재유고(麟齋遺稿)]를 남겼다. 삼남 종선(種善)은 예부시에 급제하여 언관으로 있다가 정몽주의 당여(黨與)로 몰려 장류(杖流)되었다가 개국 후에 풀려나서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계전(季甸)·맹균(孟畇) 등 15명의 손자를 두었으며, 후대에 크게 활약했던 이개(李塏)·이지함(李之函)·이산해(李山海)·이덕형(李德泂)·이상정(李象靖)·이상재(李商在) 등은 그의 후손들이다.

평가

후에 서애(西厓) 유성룡은 삼국의 위(魏)의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後漢) 조의 양표(楊彪)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고 있다. 문하에 유창(劉敞), 권근,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으며, 고려 말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

제자 정도전

(후일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 귀국 직후 원나라에서 입수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鄭道傳, 남은, 조준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동문선(東文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이조건국(李朝建國)의 연구(硏究)』(이상백, 을유문화사, 1949)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그의 정치사상(政治思想)에 관한 연구(硏究)」(박주, 『효성여자대학논문집』25, 1982)

「목은연구(牧隱硏究)」(손낙범, 『국제대학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3, 1975)

「이색(李穡)」(이상은, 『고려·조선초기의 학자 9인』, 1974)

「이색(李穡)의 불교관(佛敎觀)」(안계현, 『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 1965)

「이색연구(李穡硏究)」(이은순, 『이대사원(梨大史苑)』 4, 1962)

영정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처음에는 강원도 용화산 고자암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1906년(고종 43)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에 있는 경모당으로 이전하였으며, 하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현재의 금남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금남사에서는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을 정위로 봉안하고 있으며, 權近, 金冲漢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영정 형태 및 구성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연분홍색 관복을 입고, 검은색 紗帽를 쓰고 있다. 사모는 앞이마를 덮고 튀어나온 부분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윤곽 면에 회색줄을 넣어 그렸다. 얼굼면은 연주황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이마와 코, 뺨에 옅은 붉은색으로 채색을 하였다. 초상화에서 중요시되는 수염은 흰색과 검은색을 교차하여 표현했다. 명주 바탕에 채색했으며, 가로 60cm, 세로 120cm 크기이다.

특징

고려 말 조선 초의 공신을 표현한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또한 영정의 윗부분 왼쪽에 ‘목은 선생 畵像讚’이라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화폭 왼쪽 윗부분에 조선 1404년(태종 4)에 처음 제작되고, 이후 1766년(영조 42)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오른쪽 위쪽으로는 이색 선생을 찬양한 글을 기록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 양식을 이해하는 데에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경남문화재대관> - 도지정편(경상남도, 1995)

<하동군지>(하동군지편찬위원회, 1996)

<하동의 문화유적>(하동문화원, 1997)

문화재청(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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