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부터의 자유
도정 권상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 겨울이 가고 화사한 봄 햇살이 살갑다. 찬바람과 모진 추위를 딛고 의연하게 피어난 꽃들의 노래가 적이 들려오는 듯하다. 상계역 1번 출구에서 옥수수 네 개를 사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불암산을 오른다. 3월의 눈사태로 뜻밖에 많은 소나무가 부상을 입고 있었다. 팔이 부러진 것은 물론 더러는 허리가 댕강 부러져나가기도 하고, 아예 나부라져 누운 놈도 있었다. 가지를 너무 많이 뻗었다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소나무를 보니 욕심이 지나치면 다칠 수도 있음을 알겠다. 이리저리 뒤틀린 소나무를 볼 때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네 모습이 떠오른다. 고생 끝이 아름답다. 살아남은 한두 가지라도 다시 뻗어 멋들어진 해찬솔로 우쩍우쩍 자라나거라. 시련은 단련의 기회요 고난은 너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니……. 고난을 피하지 마라. 고난은 인생의 아포리아를 풀어갈 수 있는 약이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공자님의 말씀이라면, 오늘 내가 본 자연은 忍苦然後 知松柏之後貴也(인고연후 지송백지후귀야)이다. 고초를 겪은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귀해짐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자연은 언제나 진실한 친구요 무언의 스승으로 다가온다.
어느덧 정상에 올랐다. 불암산 정상은 삿갓봉이란 고유 이름을 갖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붓끝처럼 생겨서 文筆峰(문필봉)이라 이름 붙인다. 대단히 위험한 바위 봉우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조 헬기가 오늘도 떴다. 정상의 갈라진 바위는 지상의 이야기를 하늘에 아뢰고 있고, 문필봉은 대형 붓으로 하늘에 글씨를 쓰고 있다. 구만리 넓고 긴 하늘을 화선지로 삼으니 이따금 열구름 떨기는 은은한 먹 자국으로 다가온다. 오늘 하루 무심히 봄 하늘을 마음껏 우러르고 싶다.
推句(추구)라는 한시 교본과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도 나오는 시 한 편이 떠오른다.
五老峯爲筆(오로봉위필)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삼상의 물을 벼룻물 삼아
靑天一丈紙(청천일장지) 푸른 하늘 한 장의 종이에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내 마음속의 시를 쓰노라.
스케일이 대인의 풍모답다. 이쯤이면 저기 보이는 삼각산을 베고 누워 해와 달을 손에 넣어 호두처럼 굴리고, 히말라야 고원에 걸터앉아 대서양과 인도양에 발 담그고 태평양을 술독 삼아 시원하게 한잔 들이킬 만도 하다. 대인에게 무슨 경계가 필요하랴. 문밖이 따로 없다. 선 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이다.
산에서 내려와 서재에 앉아 화선지를 펼친다. 이윽고 먹을 갈아 묵향이 온방을 진동할 즈음이면 리코더로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음악 소리길을 불며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근래 나는 소리길에 조금은 미쳐 있다. 소리길 음률을 통하여 잔잔히 흔들리는 붓길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오늘 불암산 정상에서 본 하늘 이미지를 써 보리라 하고 드디어 붓을 잡는다. 정보와 기술을 기반으로 한
권오훈
권상호
시에 나오는 오로봉은 다섯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있는 듯한 중국 여산 근처의 산이며, 삼상은 중국 남부의 양자강·상강·원강의 세 강을 가리킨다. '오로봉·청천·삼상과 같은 광대한 자연을 필기도구로 삼아 마음속의 시를 쓰겠다'는 포부이다. 당나라 이백의 망여산오로봉이란 시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를 꺾지 않았던 안 의사의 활달한 기개와 원대한 흉금을 느끼게 한다.
말미에는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掌印이 찍혀있다.
권상호
---여산 오로봉을 바라보며 李 白(이 백)---
廬山東南五老峰 (여산동남오로봉) 여산(廬山) 동남쪽 오로봉(五老峰)은
靑天削出金芙蓉 (청천삭출금부용) 푸른 하늘위로 뾰죽 솟은 연꽃일레라
九江秀色可攬結 (구강수색가람결) 구강(九江)의 빼어남을 모두 모은 곳
吾將此地巢雲松 (오장차지소운송) 내 장차 여기 운송 속에 은거 하리라.
[출처] 望廬山五老峰 (망여산오로봉)|작성자 풍운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