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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창조의 공간이다
도정 권상호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일이나, 신이 우주 만물을 지음을 ‘창조(創造)’라 한다. 창조(創造)라 할 때의 ‘創(비롯할 창)’의 초기의 금문 형태는 ‘刅(비롯할 창)’이었다. 무엇을 칼로 가르면 둘로 나뉘는 모습이다. 나중에 이리저리 칼질하는 모습의 ‘井’ 자를 더하여 ‘刱(비롯할 창)’으로 쓰다가 발음을 중시하여 서서히 지금의 ‘創(비롯할 창)’ 자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創(비롯할 창)’을 ‘倉(곳집 창)+刂(칼 도)’로 분석해 보아도 재미있게 해석이 된다. ‘倉(곳집 창)’은 창조를 위한 공간이요, ‘刂(칼 도)’는 창조를 위한 도구라 할 수 있다. ‘倉(곳집 창)’은 ‘食(밥 식)+口(입 구)’로 구조이니 입에 들어갈 것을 넣어두는 곳집을 가리킨다. 그런 뜻에서 창조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倉(곳집 창)’ 자 위에는 ‘亼(모일 집)’이 있다. 그리고 ‘門(문 문)’의 한쪽도 가운데에 있다. 거기에 ‘口(입 구)’를 갖다 대고 있으니 ‘問(물을 문)’과도 관계있는 있다. ‘刂(칼 도)’는 분석을 위한 도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의 속성을 ‘創(창)’ 자에서 찾아보면 첫째는 모여서 의논해야 하고, 둘째는 질문이 절대적이며, 셋째는 분석을 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곳집’을 가리키는 글자로는 먹을 것을 넣어두는 곳은 창(倉) 이외에, 거마(車馬)나 무기를 넣어두는 곳은 ‘庫(곳집 고)’, 나누어 줄 것을 넣어두는 곳은 ‘府(곳집 부, 관청 부)’, 벼를 가득 넣어두는 곳은 ‘廩(곳집 름)’, 노적가리처럼 잠깐 쌓아두는 곳은 ‘庾(곳집 유)’ 등이 있다.
그러면 ‘造(지을 조)’는 어떤 의미인가. 창조한 것을 神(신)에게 告(고)하기 위하여 나아가는[辶(쉬엄쉬엄 갈 착] 모습이다.
‘집’이란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삶의 터전인가. 휴식의 공간인가. 아니면 창조의 공간인가. ‘옷’, ‘밥’, ‘물’, ‘불’, ‘나’, ‘너’처럼 ‘집’도 1음절의 단어인 걸 보면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열흘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이고, 여섯 달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집이며, 한 해를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집이다.(十日而棄者 蠶之繭也. 六月而棄者 鷰之窠也. 一年而棄者 鵲之巢也.)
그 집을 지을 때에 더러는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더러는 침을 뱉어 진흙을 반죽하며,
더러는 열심히 풀이나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느라 입이 헐고 고리가 빠져도 지칠 줄을 모른다.(然方其經營而結構也, 或抽腸爲絲, 或吐涎爲泥, 或拮据荼租, 口瘏尾譙而莫之知疲.)
사람들은 이 같은 그들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붉은 정자와 푸른 누각도 잠깐 사이에 먼지가 끼어 버리는 것이니, 우리 인간들의 집 짓는 일도 이런 하찮은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다.(人之見之者無不淺其知而哀其生, 雖然紅亭翠閣 彈指灰塵, 吾人室屋之計 無以異是也.)
해남현에 있는 두륜산(頭輪山)에 만일암(挽日菴)이란 암자가 있다. 이는 백제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암자인데, 두운(斗雲) 스님이 다시 짓고 나서 다산(茶山)에게 중수기(重修記)를 부탁한바 다산이 이에 응하여 쓴 글의 앞부분이다.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집은 없다. 집은 최대한 활용하고 난 뒤에 거침없이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버리기 위하여 집을 짓는다고 하기엔 너무 서글프다. 예전에는 살기 위해 집을 지었지만, 요즈음에 팔기 위해 집을 짓는다고 한다. 삶의 보금자리로서의 집이라기보다 투자 가치로서의 집을 생각하는 세태를 반영한 말이겠다.
집을 짓고 사는 동물은 새와 곤충과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집을 짓는 이유가 새와 곤충과 마찬가지일까.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새와 곤충의 집은 똑같지만, 인간의 집은 다양하다는 데에 있다. 흙집, 돌집, 나무집, 벽돌집, 철근 콘크리트 집 등 인간의 집은 소재와 모양 및 그 용도에서 매우 다양하다. 새와 곤충의 집은 그들의 본능에 의한 결과이지만 인간의 집은 인간의 창조적 본능에 기인한다고 본다. 인간의 창조적 본능이 용도, 크기, 모양, 재질에 따라 매우 다양한 집을 짓게 했다.
개나 닭, 소나 말은 집을 짓지 않는다. 인간이 그들을 길들이기 위해 집을 지어줄 따름이다.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착한 일을 한 것처럼 인간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종신형의 죄수처럼 평생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끔찍한 일이다.
새는 하늘을 주 무대로 살아가고, 인간은 땅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곤충은 하늘과 땅을 두루 체험하며 살아간다. 애벌레 시절에는 땅에서 나방 시절에는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니, 그런 점에서는 곤충이 새와 인간을 앞선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왜 집을 짓는가. 그 이유를 건축 연구자 서윤영 씨는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에서 ‘출산(出産)과 양육(養育)’ 때문으로 보고 있다. 맞는 말이다. 집은 투자의 대상,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위나 위엄의 상징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 역시 출산과 양육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집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임신기간이 유달리 길고 신생아가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나며 성인이 되기까지 키워내기 위한 양육기간이 매우 길어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소나 말은 태어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걸을 수 있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1년은 지나야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이다.
새와 곤충이 집을 짓는 이유도 출산과 양육 때문으로 보고 있다. 둘 다 하늘을 난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몸을 가볍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체외수정이 불가피하다. 수정란을 알의 형태로 배출하여 외부에서 부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은 몸 밖의 子宮(자궁)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역시 미숙아 상태로 아이를 낳아 장기간 집중관리를 해야 하므로 새와 곤충처럼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구석기 시대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고 지금도 형태는 다양해졌지만, 집의 근본적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다.
집의 동사형은 아무래도 ‘짓다’가 아닌가 한다. ‘옷을 짓다. 밥을 짓다. 집을 짓다. 글을 짓다. 한숨을 짓다. 약을 짓다. 미소를 짓다. 무리를 짓다. 농사를 짓다. 죄를 짓다. 매듭을 짓다. 이름을 짓다. 짝을 짓다. 결말을 짓다.’ 등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말의 ‘짓다’는 정말 다양하게 사용된다. 영어의 ‘build’나 한자의 ‘建(건)’에 비하여 ‘짓다’는 우리말은 삶의 전반과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의 의미상 네트워크를 가진 동사이다. 무한 창조의 동사이다. ‘짓다’의 반대는 ‘허물다’, ‘헐다’이다. ‘虛(빌 허)’와 관련이 있다. 허물어야 새로 지을 수 있는 법. 얼쑤.
지난 주말에는 예년에도 그랬듯이 ‘제11회 소천 사랑방음악회’에서 라이브 서예를 펼쳤다. 집주인 소천 이장학씨는 노래하고 나는 붓을 잡았다. 남양주시 진건면 와촌리에서 7대째 살고 있다. 지금도 3대가 함께 사는 옛집은 이제 문인 묵객 소리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소천과 그의 지우들은 이 집 안팎에서 우리의 전통인 사랑방 문화를 살리기 위해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음악회를 펼쳐 왔다. 이 자리는 풍류객과 소천의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시서화(詩書畵)를 함께 즐기는 어울림의 자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소천과 함께 다 함께 부르는 민요 ‘한오백년’에 맞추어 ‘소천 소리길, 천 년 꽃향기’라고 휘호했다.
오래 묵은 집에서 발효된 예술을 자아내는 특별한 음악회였다. 아무래도 인간의 집은 ‘창조의 공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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