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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건너온 차[茶]
도정 권상호
연일 전국에 불볕더위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는 열탕 가마솥 날씨이다. 후줄근한 심사를 암팡지게 때려주듯 장맛비를 동반했던 초복이 지나고, 의례적인 복더위라는 말로 그냥 넘기기엔 무색할 만큼 햇볕 따가운 중복도 지나갔다. 겨울에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있듯이 여름에는 삼열일우(三熱一雨)가 있어야 한다. 내일 오후엔 시원한 소낙비야 한줄기만 지나가 다오.
더위가 지나치면 달콤한 낮잠은커녕 밤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이럴 때면 으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표방하며 차라리 따스한 찻잔과 벗하며 독서라도 하는 게 낫다. 그런데 오늘의 이 차는 어디에서 왔는고.
공자는 가까운 것부터 잘 생각하면 인(仁)이 그 속에 있다고 했다. 생활 주변에서 늘 접하는 다양한 풀들도, 이들을 가려서 차로 만들면 자신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그 속에 묻어난다. 발에 마구 밟히는 그 흔해 빠진 수수한 풀떼기들이 구안자(具眼者)의 눈에 뜨이고, 채취되고, 정성스럽게 덖이고 비벼진 후에, 마침내 그윽한 맛과 오묘한 향기를 지닌 차(茶)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다는 사실! 이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 일인가. 평소에도 다양한 차를 즐겨 마셔온 터이긴 하나, 자생 차에 대하여 관심했던 내게, 올여름에 마시는 차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민들레는 약명으로 ‘포공영(蒲公英)’이라 하는데, 간(肝)과 담(膽)과 위(胃)에 좋은 작용을 하며 습열(濕熱)을 다스려 준답니다. 즉 열에 의한 종기 치료는 물론, 인후(咽喉)가 붓거나 열이 날 때는 그 열을 내려주고 해독 작용을 해 준다는 말이지요. 또 말린 쑥이 몸에 얼마나 좋은지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 테고요. 놀랍게도 먼먼 미국 땅에 쑥뿐만 아니라 질경이, 뽕나무가 그리 흔할 줄 몰랐어요.”
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이번에 고국에 다니러 온 미국 제자 시인 박지현이 민들레차, 쑥차, 질경이차, 뽕잎차 등의 미국 자생 차를 정성껏 만들어 내게 선물로 건네주며 한 말이다. 박 시인이 차에 관한 한 가히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차 마니아인 줄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에 이민 가서도 그곳의 자생 차를 손수 덖고 마시며 차인 생활을 즐기는 줄은 미처 몰랐다. 빈티지 병에 소담스레 담긴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찻잎들……. 블로그를 통해 살펴본 시인의 다도일상(茶道日常)은 실로 벅찬 감동이었다.
어제는 경기도 양주의 차 박물관 ‘차우림[茶友臨]’에 가서 차인들과 함께 노래하며 다담(茶談)을 나누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일탈을 꿈꾸며 머리를 식히고, 잠시나마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기 위해 찾아 나섰던 신명 나는 생활의 여백(餘白)이었다.
보이차(普洱茶)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고풍스러운 중국차를 원 없이 음미하며 일상의 근심을 삭히고 생각의 싹을 틔우던 그 시간, 그야말로 몰아지경(沒我之境)의 차 바다에 풍덩 빠졌다. 돌아오는 길에 이원종 관장님께서 수령 400년이 넘은 중국의 고수차(古樹茶) 소쿠리를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감동과 감사의 연속이다. 다담망우(茶談忘憂)하며 이 차를 음미하는 순간마다 ‘차우림’을 잊지 못하리라.
돌아오자마자 고수차례(古樹茶禮)를 갖고 생각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살며시 피어오르는 차의 아지랑이는 하늘을 향한 분향(焚香)이요, 차의 오묘하고 고운 빛깔은 삼라만상이 혼효된 색(色)이며, 그윽한 향기는 내 순연(純然)해지고자 하는 영혼의 발심(發心)이다.
한 방울의 신비로운 맛이 혀끝에 감지되는 순간, 우리는 또 하나의 각(覺)을 체험하게 된다. 자연에서 온 것이 이제 우리 몸을 거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차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차를 덖는 과정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빚어내는 절묘한 시공인 삼중주(時空人三重奏)이다. 차를 마시는 과정은 어떤가. 꽃잎은 다시 한 번 찻물 속에서 개화하며 하늘을 받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찻잎은 봄을 맞이하는 부활의 몸짓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충일감을 안겨 준다.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다담(茶談)이라 하는데, 속인(俗人)은 차의 맛과 향기에 관한 이야기에 그치지만 다인(茶人)은 차의 역사와 철학까지 더듬는다. 속인이 차를 마시는 일은 해갈을 위한 수분 공급이지만, 다인이 차를 마시는 일은 창공의 햇살과 대지의 바람까지 받아들이는 우주적 사고의 장이다. 그리고 음다인(飮茶人)을 생각하지 않는 제다인(製茶人)은 차를 재배할 자격이 없고, 제다인의 손길과 자연의 고마움을 모르는 음다인은 차를 마실 자격이 없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살청(殺靑) 기관이다. 녹색식물을 섭취했음에도 황색 변이 나오는 것은 몸속에서 살청이란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차를 덖는 일은 체외 살청이고 쌈밥을 먹는 일은 체내 살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이 차를 마심으로써 소화의 도움을 얻고, 수명 연장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내가 아는 한, 진실로 차를 즐기는 차인들은 지나치게 예(禮)와 도(道)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세 끼의 밥을 먹듯, 물을 마시듯 차를 늘 옆에 두고 마신다. 차를 마심으로써 삿된 마음과 욕심을 하나씩 덜어내는 듯하다. 수선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음다문화(吟茶文化)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행여 본인도 모르게 지치고 탁해진 심신을 위해, 차를 마심으로써 새 영혼으로 피갈음할 수 있고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차에 대한 지나친 아첨일까.
<동다송(東茶頌)>을 쓴 초의선사(草衣禪師)는 불가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과 다도정신(茶道精神)을 유독 강조했는데, 이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평심(平心)이 곧 도(道)요, 다(茶)요, 선(禪)이요, 일상의 화두(話頭)라는 것이다. 도(道)를 취함에 있어서나 선(禪)을 행함에 굳이 판에 박힌 형식이나 잡다한 격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기도하듯 찻물을 달인다. 차를 덖고 비빈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며 우려낸다. 그리고 차를 마실 때,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차를 마심으로써 마음을 옥죄는 그 어떤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훌훌 벗어나는 자유로움과 일체 편견에서의 이탈은 물론, 삼매(三昧)와 해탈(解脫)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차를 마심에 굳이 엄숙한 불교적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차분히 자기의 마음 밭을 고요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바로 음다명상(飮茶冥想)이고 낙다삼매(樂茶三昧)가 아니겠는가.
우리말로 왜 /차/라고 발음할까. 일상의 번잡한 일로 말미암아 생긴, 뒤틀린 감정(感情)은 ‘차분하게’, 들뜬 이성은 ‘차갑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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