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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풍덩
도정 권상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속은 예술에 풍덩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목구비(耳目口鼻)에다 촉각(觸覺)을 더하여 오감(五感)으로 마시는 황홀한 술이다. 이를테면 미술(美術)이란 눈으로 마시는 아름다운 술이요, 음악(音樂)은 귀로 마시는 즐거운 술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서예(書藝)는 무엇인가. 운필의 과정을 일러 ‘필가묵무(筆歌墨舞)’라 했다. 곧, ‘붓은 노래하고, 먹은 춤춘다.’라고 하니 서예에는 음악과 무용이 있고, 運筆(운필)의 결과로 조형이 나타나니 폭탄주 아니면 환상적인 칵테일인가 보다. 순간순간 마음의 붓 길을 따라 붓을 운전해 가다가 보면 잦은 사고로 지루할레야 지루할 수가 없다. 서예란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붓털이 부드러운 화선지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서 손끝에 와 닿는 그 은밀한 전율은 어떤 문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예술이란 종교와 함께 시간상으로 영원하고 공간상으로 무한한 세계이다. 제한된 인생을 연장하여 영원하게 해 주고, 한정된 삶의 공간을 무한히 확대해 준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갈파했다.
과학과 예술을 건방지게나마 비교해 볼까나.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설명하지만,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웅변이 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예술의 문법에서 설명이라는 말은 없다. 느낌이 있을 뿐.
우주의 씨앗은 빛과 소리이다. 빛이 발아하여 눈을 즐겁게 해 주면 조형예술이요, 소리가 발아하여 귀를 행복하게 해 주면 시간예술이다. 너무 고상하게 얘기했나.
이왕 내친김에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시대로 돌아가 예술(藝術)이라는 말의 뿌리를 건드려 볼까나. 예(藝) 자 머리의 초(艹)는 불쏘시개, 중간에 있는 예(埶)의 오른쪽 환(丸)은 구부리고 앉아 있는 사람, 그 왼쪽은 쐐기에 나무막대기를 꽂아서 비비며 불을 일으키는 모양, 그리고 아래의 운(云)은 연기가 피어나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최고 예술은 불을 만드는 일이었네. 술(術) 자의 가운데 출(朮)은 나무껍질을 벗기는 모양, 바깥의 행(行) 자는 사방으로 퍼진다는 의미이다. 옳아, 예술은 비결을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네.
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기예(技藝)와 학술(學術)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예술 활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솜씨만으로는 안 되고 배움도 필요하다는 뜻이렷다. 휴~
그런데, 예술이란 예술 생산자나 예술 향유자 모두 특정 계층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다 예술을 만들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노래방에서는 누구든 노래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는 누구든 공을 찰 수 있듯이, 예술도 일상에서 모두가 느끼고 즐기며 삶의 질을 고양할 수 있어야 한다.
‘붓꼴림’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생경한 말에다 어쩌면 속어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는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싶은 충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일에서 뭔가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동기유발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아날로그 마니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컴퓨터 안에 온갖 폰트들이 난무하지만 5천 년 동안 맥맥히 이어져 내려온 서예란 예술도 그 속에 뭔가 분명히 있음은 틀림없다.
쉿, 주의해야 할 한 가지. 감동하면 예술이지만 흥분하면 외설이다. 행복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은 감동이다. 감동이 없는 생활은 따분하다. 붓꼴림의 변용, 그것이 글씨이고 그림이다.
흔히 서예라 하면 표구를 통한 완성된 작품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쓰는 과정의 쏠쏠한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라이브 서예란 몰래 써서 표구로 박제한 서예가 아닌 현장성 있는 살아 있는 서예를 말한다. 왕희지의 난정서와 같이 현장에서 오는 생동감이 묻어날 때 비로소 명필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쓰는 내용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고, 쓰는 과정도 관중과 함께할 때, 붓을 잡은 사람은 더 큰 집중과 신명을 얻고, 관중은 붓놀림에 자신의 마음을 얹고 뱃놀이하듯 유유자적(悠悠自適)할 수 있다. 붓 가락에서 오는 찡한 감동. 붓으로 노를 저어라, 에헤라 디야~.
가끔 들르는 노원의 모 일식식당에서 당호(堂號)를 부탁해 왔다. ‘지호락당(知好樂堂)’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서로 잘 알게 되고, 나아가 서로 좋아하게 되며, 끝내는 서로 즐기는 아름다운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본래 이 말은 <논어(論語)>에 뿌리를 두고 있다. ‘知之者不如好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호지자 불여낙지자)’로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의미이다.
무람없지만 여기에서 공자와 같은 성현의 말씀에 한 수 더 떠서 말한다면 ‘樂之者不如沒之者(낙지자 불여몰지자)’이다. ‘즐기는 것은 빠지는 것만 못하다.’라는 의미가 되겠다. 복잡다단한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풍덩 빠져보는 것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어떤 교수가 자기가 저술한 책 제목으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을 사용하여 히트한 일이 있는데, 사실 ‘미칠 광(狂)’ 자에는 진실성과 방향성이 없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미쳐야 미친다.’라는 발음의 유사성에서 오는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서 만든 말일 뿐이다.
열정도 재능이다. 열정을 영어로 ‘passion’이라고 하는데, ‘passion’ 없이 ‘pass’ 할 수 없다. 알아서, 좋아서, 즐겨서, 빠져서 하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 결과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그 대상이 예술이라면 더한 열정으로 몰입해야 한다. 적어도 예술은 ‘지(知)’보다는 ‘정(情)’과 잘 어울린다. 그런 뜻에서 예술은 좋아함, 즐거움, 풍덩 빠짐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광주 아시안게임에서 금물살을 가르며 3관왕에 오른 박태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 있게 경기를 즐긴다고 고백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생각하는 바를 즐긴다면 누구나 멋진 삶이랴.
금년 초에 미아삼거리에 풍덩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척박한 땅에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열악한 곳 중의 하나인 미아리, 그중에서도 숭인시장 안에 세운 학교이다. ‘풍덩’이라는 교명은 ‘몰입(沒入)’의 의미가 있다. 한 마디로 재래시장에 예술의 옷을 입혀 상가 발전을 꾀하는 취지였다. 樂之者不如沒之者(낙지자 불여몰지자)로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미아리 텍사스 등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에서, 늦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에 미아리상가협의회와 풍덩예술학교가 손을 잡고 ‘美아리 축제’라는 이름으로 잔치를 벌였다. 모두 분위기에 풍덩 빠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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