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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운 사람 물 같은 사람
도정 권상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물은 미나리와 무생채이다. 둘 다 물이 흥건히 잡히는데다 은근한 향기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갈증이 심한 증세에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이 있으며, 부기를 빼주고 강장 및 해독 효과까지 있단다. 강장(强壯) 효과가 있다는 말은 장을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아니라, 온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영양을 도와 체력을 증진하고 몸을 튼튼하게 한다는 뜻이다. 술은 불이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은 불을 끄기 위해 머리맡에 물그릇을 두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건당연한 이치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시원한 북엇국이 여의치 않으면 미나릿국이나 뭇국을 끓여 먹는다. 그러면 이뇨(利尿) 효과가 즉시 나타나 솰솰 내리꽂히는 오줌 소리에 배설의 즐거움 또한 놓칠 수 없는 행복이다. 그런데, 미나리의 ‘미’와 무생채의 ‘무’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몸속의 술불을 시원하게 꺼 주는 걸 보아하니 물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을까 한다. 미나리는 습지나 논에서 잘 자라고 무도 비교적 습기가 많은 밭에서 쑥쑥 크는 것을 보면, 미와 무가 물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우선 ‘미’에 대한 탐색만을 해 보기로 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가 물의 조어라는 사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산에는 산나리 물에는 ‘미나리’, 산에는 산더덕 물에는 ‘미더덕’, 벌써 그럴듯하지 않은가. 누구나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해물잡탕 속의 미더덕을 건져 먹다가 뜨거운 물이 찍하고 터져 나와 입천장을 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긴 모양 역시 산더덕과 함께 고추처럼 귀엽게 생겼다. 미에 관련한 글자들을 또 찾아보자. 하늘에서 영원히 흐르고 있는 전설상의 물의 흐름이 있으니, 이는 ‘미리내’다.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토박이말이다. 물론 그것은 수많은 행성의 무리라고 과학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터이지만 하늘에도 강이 흐르고 있다고 믿는 자체가 신비롭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3360자의 한자를 사물에 따라 나누어 한글로 음과 뜻을 달아 놓았는데, 이 책에서는 용(龍)자를 ‘미르 룡’이라 적고 있다. 용이 물을 다스림을 감안할 때, ‘미’라고 하는 말이 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일본어에서 물을 ‘미즈(水, mizu)’라 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왕 내친 김에 넋두리를 더 펼쳐 보자. 물에서 이러 저리 상하종횡으로 휘젓고 다니는 말썽꾸러기는 ‘미꾸라지’, 물에 타먹는 가루는 ‘미숫가루’, 물이 없는 곳에서 물처럼 끌어내려지면 ‘미끄러지다’라고 하고, 그렇게 만든 기계를 ‘미끄럼틀’이라 한다. 그런 상태를 ‘미끄럽다’, ‘미끌미끌하다’고 하며, 나아가 ‘미끈하다’, ‘미끈대다’, ‘미끈거리다’, ‘미끈둥하다’ 등의 낱말도 모두 물과 관계가 있는 말들임을 유추할 수 있다. 아무리 미끈하게 생긴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있다손 치더라도 미만큼 ‘미끈한 미’가 있으랴. 물에 미끄러졌는지 해야 할일을 자꾸 미루어 ‘미적거리거나 미루적거리는(미루적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 원고를 쓰기 싫어 미적거리다 보니 마감 날이 코앞에 닥치고 말았다. 여기에서 ‘미적미적’과 같은 부사가 나타나고, 그처럼 미적거리는 사람을 ‘미련쟁이’라 부르며, 그런 미련쟁이라면 일을 온통 ‘미루다’가 말 것이다!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날이면 마을 앞 갯가에 뛰어 들어 ‘미역’을 감던 추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옆에는 여지없이 ‘미루나무’가 장승처럼 서서 간간이 불어오는 잔바람에도 머리를 끄덕이곤 한다. 이쯤하면 동물적 감각으로 ‘미’가 물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믿어 줄 것이리라. 먹는 ‘미역’도 있다. 미역은 미끌미끌한 바닷말의 일종으로서 물속이 아니고선 살 수가 없다. 따온 미역은 말렸다가도 다시 미에 불려서 먹는 게 보통이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직장에서 팽 당한 사람을 가리켜 ‘미역국 먹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미역국 먹었다고 할까? 미역은 미끄러운 식물이고, 미역국은 미역에서 우러나온 국물이다. 따라서 미역국 먹었다는 말은 물보다 더 미끈미끈한 미역의 속성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짐작된다. 각설하고, <노자(老子)> 8장은 그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상선(上善) 즉 높은 선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이다.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에는 수하류부쟁선(水下流不爭先)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을 약간 바꾸어 흔히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 하는데,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멋진 뜻이다. 한자 성어에 수수기지방원(水隨器之方圓)이란 끝내주는 말도 있다. 물은 그릇의 모남과 둥긂'을 따른다는 뜻이다. 모두 물의 덕성을 칭송하는 글귀이다. 이런 물과 같은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하거나 더불어 유한다면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믿음성이 있다는 뜻으로 ‘미덥다’는 형용사가 있다. 여기에도 미자가 들어 있다. 믿음성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 ‘미더운 사람’이라 한다. 가장 미더운 사람은 물 같은 인간이다. 물 같은 사람을 ‘믿고’ 따르고 싶다. ‘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모든 종교 의례에는 공통적으로 세례(洗禮) 의식이 있는 걸 보면 ‘미’는 최고의 아름다움, ‘지미(至美)’의 물질이다.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미이기에 우리 선조들은 이른 새벽에 정화수(井華水)를 소반 위에 떠 놓고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미를 다스리는 용왕님께도 그때그때 알맞게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시우(時雨)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명의 기원으로 보고 신으로까지 받들었던 미. 그런데 그 미가 죽어가고 있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미를 기원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이용 대상, 돈벌이의 소재로 생각하고 있다. 미를 공경하기는커녕 미로써 욕하고, 미로써 많은 죄를 짓고 있다. 하는 짓이 싱겁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맹물아!’ 하고 욕하는데, 따지고 보면 맹물은 바로 ‘생수’인 것이다.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맹물이 없어서 걱정이고, 또 맹물을 돈 주고 사먹는 일이 당연사가 된지 오래다. 물을 물 쓰듯 해서야 어디 쓰겠는가? 이러다가는 인류의 멸망도 밤에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미에 대한 인간의 불경죄로 어쩌면 열 받은 남북극의 빙하가 흘러내려 미의 대재앙이 불현듯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살이가 답답할수록 미더운 사람, 맹물 같은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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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미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겸손을 배울 수 있다.)
미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큰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환경적응력이 뛰어나다.)
미는 물로, 얼음으로, 눈으로, 수증기로 형체를 바꾼다.(끊임없이 자기 변화를 이룬다.)
미는 보이지 않게 수증기가 되어 하늘을 날고 산을 넘기도 한다.(자기 승화)
미는 얼음이나 빙하가 되어 영원을 추구하기도 한다.(영원성)
온갖 생명을 살려낸다.(인체, 지구의 3분의 2. 사과의 85%, 배추의 95%... 그럼에도 스스로는 물이라 하지 않는다.)
막히면 돌아간다.
차면 넘친다.
적응을 잘한다.
그러나 화내면 무섭다. - 홍수, 쓰나미...
권상호
군자(君子)는 일정(一定)한 용도(用途)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君子)는 한 가지 재능(才能)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圓滿)하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