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리운 송대 그리운 그 시절(개교 80주년 기념 <송대>지 기고)

그리운 송대 그리운 그 시절

 

권상호(경북 예천 대창중고등학교 중 20회, 고 19회)

 

산에 믿음이 가는 까닭은 산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기 때문이다. 모교에 대한 은근한 믿음과 애정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80년 주년 산수(傘壽)를 내다보고 있는 모교는 지금도 그 때 그 자리 송대(松臺)에서 어머니처럼 앉아 있겠지. 많은 아우들을 품에 안고 그들의 영혼과 육신에 다양한 자양분을 내리고 있으리라. 교훈인 정심·자립·협동을 기초로 하여 책임과 규칙, 삶의 지혜 등을 일깨우며 인생의 최후 선택은 너희들의 자유라고…….

뿌리 없는 나무 없고, 근원 없는 강물 없다. 삶에 지쳐 육신의 피곤을 느낄 때, 무료한 일상 생활로 마음이 울적할 때, 내 영혼은 어김없이 추억의 조각배를 타고 가다가 송대 언덕에 닻을 내린다. 나는 60년 후반을 대창중학교에서, 70년대 초반을 대창고등학교에서 보냈으니 분명 대창인이자 송대인이다. 송대는 내 의식의 고향이자 꿈이 싹튼 곳이다. 물론 한때는 고민하다가 좌절하여, 급기야 고1 어느 봄날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1년간 타향을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중 1-1 때 담임은 정재각 영어 선생님, 그 깔끔함과 안경 속에 빛나는 두 눈빛, 따님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 2-2 때 담임은 조용부 상업 선생님, 분위기가 예천과는 사뭇 다른 한양 멋쟁이. 중 3-3 때 담임은 홍오선 국어 선생님, 판서가 아름답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신 미남이셨다.

1-1 때 담임은 이성현 지리 선생님, 아베베란 별명에 요놈 아들아하고 시작하던 훈계 말씀. 고 2-2 때 담임은 정양수 국어 선생님, 언제나 넉넉한 웃음에 구수한 목소리의 주인공. 고 3-1 때 담임은 이욱 영어 선생님, 너무나 근엄하여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던 분이셨다.

합리적인 엄격함에다 부지런함은 물론 잔잔한 미소를 간직한 채 훈화 말씀이 남달랐던 김교용 교장 선생님, 점심 시간에 모르는 한자어에 밑줄을 그어 찾아뵈면 진지를 드시다말고 자상히 깨우쳐 주시던 이재녕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무당이 신장대 잡은 듯 세계사 수업 시간에 분필을 부러뜨려가며 열강을 하시던 김성환 중학교 교감 선생님, 말씀이 매보다 더 무섭고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으셨던 수학의 아버지 정홍 선생님, 떡 벌어진 어깨에 언제나 형님처럼 자상하게 다가오시던 김길영 체육 선생님, 요게 뭐죠하며 중요 단어에는 테두리를 몇 번이고 그으시며 영문법 핵심을 피력하시던 박신서 영어 선생님, 국어 선생님이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볼을 잘 다루시며 달리기도 잘 하시던 안준 선생님, 컬컬한 막걸리 타입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강의하다가 가끔은 분필로 칠판에다 화조를 멋지게 그리시던 터프가이 주수일 미술 선생님, 깡마른 외모에 밴드부를 지도하며 애국가나 교가 제창 때 은빛 지휘봉으로 허공을 가르시던 이중기 음악 선생님, 다소 깐깐한 모습과는 달리 잔정이 무척 많으시던 배순택 수학 선생님, 낭랑한 목소리로 힘찬 강의를 하시다가 제자들의 장난엔 따끔한 매를 아끼지 않으시던 김종우 물상 선생님, 기출 예비고사 문제를 연도까지 체크하며 당년의 예상 문제를 꼼꼼이 챙겨 주시던 장병창 국사 선생님, 10월 유신으로 교련 교과가 생기고 검열 준비를 위하여 늦은 시간까지 전교생의 제식훈련과 총검술 연습을 위하여 분주하게 운동장을 뛰어 다니시던 이동태 교련 선생님, 오래 계시지는 않았지만 늘씬하게 생긴 데다 눈매가 유난히 반짝였던 김수남 체육 선생님…….

이 밖에도 중·고 6년 동안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지금은 모두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신 분도 계시겠고, 정년 퇴직 후 채마밭에 물을 주면서 만년을 낭만으로 보내는 분도 계시겠지. 교직 첫 단추를 대창에서 꿰고 젊은 열정으로 우리에게 친형처럼 다가왔던 분들 중에는, 아직도 교단에 서서 빛깔 있는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첫 느낌 그대로 무명 교사의 덕을 쌓고 계신 분도 있겠지.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그늘 속에서 팔다리의 힘이 부족해져 매맛이 싱거우면 어떡하나. 부디 정정한 모습으로 만년을 즐겁게 누리소서.

 

학창 시절에 겪은 일 중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추억이 있다. 그 중에서 정보와 문화의 21세기 벽두와 사뭇 달랐던 기억들을 반추해 본다.

요즈음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운동장 조회가 생략되기 일쑤인데, 그 당시는 월요일과 토요일 아침은 물론, 더러는 수요일에도 거행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모교는 지형상 운동장이 교실과 제법 떨어져 산밑에 따로 자리잡고 있었다. 운동장 조회 때나 체육·교련 시간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운동이 되어, 운동 부족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는 없었다. 이러한 기초 체력을 바탕으로 하여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배구부 활동이 두드러졌고, 특히 육상부는 도민체전은 물론 전국체전에서도 늘 메달 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에는 1일 1선이니, 1인 1운동 등의 숫자 구호가 많았고, 연중 교복의 왼쪽 가슴 위에는 새마을 운동이니, 반공 방첩이니, 승공 통일이니, 불조심 강조기간이니 하는 등의 패찰이 명찰 밑에 붙어 있었다. 3·1절이나 8·15 광복절 등의 공휴일에도 반드시 학교에 나가 기념식을 거행하고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에는 시가 행진도 이어졌다. 반공궐기대회가 간간이 행해지고, 그 때마나 김일성 화형식이 뒤풀이로 펼쳐졌다. 시가 행진을 할 때 읍내를 진동하며 연주되던 브라스밴드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는 밴드부에 가입하여 트럼펫을 불며 시가 행진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통기타 연주는 모든 학생들의 꿈이었다. 태권도를 배우러 무덕관과 한무관에 다니던 친구가 많았고, 합기도도 호신술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복도 1자바지, 쫄바지, 나팔바지가 유행한 적이 있으며, 모자도 왁스를 발라 광을 내는 등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다녔다. 참고서는 지금처럼 다양하지 못하여 국어 정해, 수학의 완성, 수학 정석, 핵심 영어, 정통종합영어 등과 같이 필독 참고서가 있어서 전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공히 인기가 대단하였다. 물론 학원 열풍도 엄청나서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면 앞다투어 다니곤 하였다. 손에 드는 학생 가방도 꽤나 편리하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비닐조차 귀하여 알루미늄 도시락의 반찬이 새어나와 교과서나 공책의 모서리를 발갛게 물들여 놓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2 때에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공설운동장에서는 대운동회를, 극장에서는 기념축제가 성대하게 베풀어졌었다. 예천 군민체육대회에서 예천농고와의 선전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연고전을 방불케 했다. 응원석 중앙에 자리잡은 밴드부의 반주에 맞추어 교가와 응원가를 목이 터지도록 불러댔고, 스탠드의 학생들은 카드섹션과 교복섹션으로 한껏 선수들의 기를 돋우었다. 대창 대창 사자왕 대창∼, 직트 직트 운저 직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뜨겁게 응원전을 펼쳤다. 간간이 풍악놀이로 흥을 더하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내가 한복 치마저고리에 예쁘게 단장한 처녀로 가장하여 장구를 친 적이 있다. 천생 여자처럼 생겨서 인기가 있었으나 소피 마려울 때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남녀 화장실 선택에서 어느 쪽을 택하였을까 짐작해 보라. 한복과 화장은 박신서 선생님의 사모님께서 도와 주셨다.

거슬러 올라가 중2 때인 68년에는 김신조 일당을 비롯한 무장 간첩이 넘어와 국민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강원도 평창을 비롯한 울진 삼척 지구에서는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대대적으로 펼쳐져 우리측 예비군과 현역의 전사자도 꽤 많았다. 신문을 보면 고정 간첩과 남파 간첩은 왜 또 그리 많았던지, 항상 적당한 긴장 상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것 같다. 파월 장병과 전방에서 수고하시는 군인 아저씨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여름과 겨울에 위문편지 쓰는 일에 모두가 동참했고,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국방을 위한 헬리콥터 구입비까지 내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킨 적도 있었다. 그해 12월 5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고, 전국의 모든 학생은 반드시 이를 암기해야만 했었다. 관공서는 물론 각 교실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는 이 헌장이 붙어 있었고, 모든 교과서의 표지 다음 장에도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저녁 12시와 새벽 4시에는 어김없이 싸이렌 소리가 울리어 야간 통행 금지 시각을 알렸고, 학생들은 저녁 10시면 외출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매일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이 거행될 때에는 어디서나 일체의 행동을 엄추고 태극기를 주목한 체로 바른 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공경의 예를 표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학교 행사 중 반공을 주제로 한 웅변대회, 백일장, 사생 대회 등이 특히 많았다. 6·25가 끝난 지 십 수년이 지났지만 지시 사항 중에 폭발물 유의 사항이 자주 등장하였고, 확인 학습을 위하여 동부국민학교에 단체로 가 폭발물 전시를 관람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긴장된 생활 속에서도 한 달에 한 차례 정도는 예천극장 또는 명천극장에 단체 영화 관람을 갔는데, 이 일이야말로 가장 신명나는 즐거움이었다. 그 때 본 영화 중에 생각나는 것으로는 007 시리즈, 제3지대, 팔도강산 등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싱겁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감정이 순수해선지 더러는 감동하여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물을 글썽이며 극장의 큰문을 쑥스럽게 빠져 나오기도 하였다.

모내기와 보리 배기가 맞물린 6월중에는 가정실습 기간이 3일 정도 있거나, 아니면 단체로 원농 활동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쥐가 국민 숫자보다 몇 배나 많다면서 매달 15일을 쥐잡는 날로 정해놓고 쥐약을 놓던 일. 그 와중에 많은 개와 고양이들이 쥐약을 먹고 숱하게 죽어갔던 일. 집게와 깡통을 준비하여 송충이 잡던 일. 겨울에 토끼 사냥하러 생천까지 갔던 일. 연중 반복되던 퇴비와 폐품 수집, 그리고 의무적인 저축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끈끈하게 진행된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교 교사 신축 공사를 위하여 철근이나 벽돌을 각자 할당된 책임량만큼 들고 그 높은 언덕을 오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내에서 학교에 오르는 두 길이 모두 비좁아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이라 생각되지만, 지금과 같은 사회 풍토 속에서는 학부모 원성 때문에도 어림없었을 것이다.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끊이지 않는 등록금 및 각종 납부금 독촉도 잊을 수 없는 솔직한 고백이다. 등록금의 경우 농촌 학교에서는 대개 봄가을에는 누에고치를 공판하여, 여름에는 고추 팔아서, 겨울에는 나락 매상으로 납부하곤 했다. 가정 형편이 곤란한 급우를 돕기 위하여 성미를 거두는 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포기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모교 대창은 사립이라서 공립인 예천중이나 예천농고에 비하여 등록금이 더 비쌌다. 공부 열심히 하여 평균 95점 이상이면 특대생, 90점 이상이면 우대생이 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등록금도 전액 또는 반액을 감면 받을 수 있었으나, 내신 성적이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지금보다 시험 문제가 어려워 여간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경제사정상 때로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하기도 했는데, 내 경우는 학원 기도, 학생 과외, 잡지 판매, 1일 학습지 배달 등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 중에 정양수 선생님의 격려로 쉬는 시간을 이용한 수험 잡지 진학 및 학격생 판매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청소 검사 맡으러 어쩌다가 들리는 교무실이나, 특별한 기회에 둘러 본 교장실, 그때는 왜 그리 엄숙하고 무서웠던지.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몇 개의 현판 글씨가 있었다. 나중에 서예에 눈을 뜨고 보니 弘益人間이란 현판 글씨는 지금은 작고하였으나 당대 최고 명필이었던 원곡 김기승 선생님의 글씨였고, 또 得天下英才敎育之爲一樂이라는 내용의 예서체 글씨는 현 국내 정상의 작가로 추앙받는 초정 권창륜 선배님(5회)의 글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일생 취미인 서예에 대한 꿈은 바로 이곳 송대에서 비롯되었다. 경북대에 진학하여 외로움을 달래고자 대학 내에 서예 서클을 창립하였다. 79년도 예천군청 앞 서본동에 유어예 서화연구실 오픈을 기점으로, 지금은 서울 삼각산 자락에서 15년째 신일서예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초대작가로서 해외 전시회에 초대받기도 했지만, 네티즌들에게 서예 문화를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절실한 문제라 생각되어, 홈페이지 서예닷컴(seoyea.com)을 개설 운영하고 있다. 고향 예천의 서예 문화 수준은 양궁과 더불어 전국 최고의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통이 불편한 때라 학교 다니는 일도 용이하지 않았다. 읍내라도 시내에 거주하는 학생이라면 걸어다녔지만 조금 먼 곳의 학생들은 자전거로 통학하였다. 그러나 면부에 사는 학생들은 교통이 불편하여 대부분 자취생활을 하였다. 나도 중학교 시절엔 학교 정문 쪽의 노상동과 서본동 굴레방 다리 옆에서 자취를 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예천영수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보냈다. 고향집에서 버스를 타려고 해도 20분 정도는 걸어야 수동에서 고실 고개까지 갈 수 있었다. 버스가 있어도 결행이 잦고, 승객이 너무 많아 다 타고 문을 닫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읍내 가는 버스를 놓치거나, 아니면 차비를 아끼려고 지보 수월리에서 읍내까지 걸어서 갈 양이면 약 2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고추장이나 된장 단지라도 들면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다. 먼길이지만 지루한 경진 방죽과 상동 철둑길을 지나 예천 굴머리를 돌아들면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송대 옛터 높은 언덕의 유서 깊은 크나큰 집이었다. 읍내 어느 곳에서든 고개만 들면 바라볼 수 있는 모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등·하교 길의 학생들을 묵묵히 지켜주던 듬직한 모교이다. 강당 옆과 운동장 언저리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서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서서 손짓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시멘트로 만든 어설픈 조형물이지만 당시로는 갖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칠해놓은 최고의 지형파노라마도 있었지. 고색 창연한 기와집 교무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까. 아직도 송대에서 바라 볼 때 학가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해는 아름다운가. 해 저물녘 성당의 종소리는 솔바람과 어울려 퍼지는가. 안개 속에 용트림하는 남산의 정경. 드넓은 왕신들의 논메기 노래…….

 

바쁜 세상일로 눈에 잊혀지고 가슴에 묻혀 있던 모교. 슬라이드처럼 은사님들과 동창생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내 인생에서 송대와의 만남은 6년이지만, 그 여운은 60년 이상일 게다. 오늘도 송대는 내 추억의 그림자를 안고 말없이 내일을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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