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티베트 네팔 기행문 - 太古의 自然 속에 들리는 神들의 숨결

* <월간서예(月刊書藝)>지에 지난 2006년 10월호부터 2007년 7월호까지 10차에 걸쳐 연재 되었던 기행문입니다. 그 동안 보내 주신 성원에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내용이 많아서 1차분과 마지막 10차분만 여기에 올리고, 전체 내용은 첨부화일로 정리해 놓습니다. 

(<월간서예> 귀중)

<1/10차>

太古의 自然 속에 들리는 神들의 숨결

  - 보름간의 티베트․네팔 여행 -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겸임교수 권상호


  쓰촨(四川)성의 청두(成都)를 거쳐 라싸(拉萨)까지


  여행 제1일은 2006년 7월 15일(토)이다.

  금년 여름은 축축 7월에 펄펄 8월이었다. 그러나 음력으로 병술년에 입춘이 두 번 들어 있어서 쌍춘년(雙春年)이라 한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 두 차례나 되니 사방만리 무소불통(四方萬里 無所不通)의 대운의 해이다.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 구경 가세.

  여행사진작가 이성만 선생님과 둘이서 문명의 저편에 서 있는 티베트(Tibet, 西藏)와 네팔(Nepal)을 목적지로 삼았다. 기타리스트 송형익 교수의 배웅으로 인천공항에 너덧 시간 빨리 도착했다. 때마침 기타와 바이올린 Duo concert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독일의 미하엘 트뢰스터 교수와 훌로리안 마이어롯씨를 공항에서 극적으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신일동문 유환 기자의 인터뷰가 있었다.


 “한 여름에 떠나는 지구의 다락 여행입니다. 붓으로는 혼(魂)을 그리고, 사진기로는 형(形)을 찍고자 떠나는 겁니다.”


  저녁 7시 4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3시간 40분 만에 청두(成都)공항에 도착했다. 후끈한 여름 날씨에 독특한 중국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든시티호텔(花園城大酒店)에서 여장을 풀었다.

  사진작가와의 동행이라 짬이 날 때마다 사진 공부를 했다. 다큐사진과 보도사진에 대하여 많은 상식을 쌓았다. 다큐는 내용을 중시하고 보도는 고발성을 중시한단다. 남들도 다 보지만 작가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재해석하여 참신한 이미지를 창출할 때 다큐사진의 가치가 있고, 마약이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등 새로운 사실을 찾아 제때에 알리는 것이 보도사진의 생명이란다.

  청두는 연전에 한중교류전을 위하여 방문했던 곳이다. 허잉후이(何應輝), 장징위에(張京岳), 천지차오(陳志超) 선생 등 쟁쟁한 서예가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저녁 늦게나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혼자 온 처지가 아니라서, 천지차오 선생께만 안부 전화를 나누고 아쉬움을 달랬다.


  제2일, 7월 16일(일)이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간단히 조식을 하고, 커피 한잔에 자두 몇 개로 후식을 한 뒤, 라싸(Lhasa, 拉萨)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나갔다. 온갖 과일들이 형형색색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잘 생긴 복숭아 몇 개로 시각과 후각을 달랬다. 기다리는 동안 한국을 다녀오는 길의 붉은 가사를 두른 티베트 승려를 만났다.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Shigatse, 르카치, 日喀則)에 계시는 아난(Anan, 阿南)이라는 분으로 조계사 초청으로 한국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다며 자랑 겸 감사의 뜻을 표했다.

  중국 시난항공(西南航空) 비행기가 라싸를 향하여 힘차게 이륙하자 험준한 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나마 산자락에 초록빛 치맛자락이 펄럭이더니, 금세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민둥산 산봉우리로 바뀌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만년설로 뒤덮인 장엄한 산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는 탄성을 지르기 않을 수 없다. 계곡마다 빙하가 물고기 비늘처럼 기다랗게 흐느적거리듯 늘어져 있다. 아, 태초의 설국(雪國)이로구나! 스튜어디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거무스름한 산을 넘어 가던 비행기가 강변을 따라 하강하자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긴다. 약 두 시간 만에 라싸비행장에 도착했다. 수화물을 찾아 공항 대합실을 나서는 순간, 사방은 온통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잿빛 산골이었다. 짙은 갈색의 피부를 가진, 꽝 마른 픽업 가이드와 제법 뚱뚱한 운전기사가 봉고차를 끌고 라싸공항에 나와 있었다. 마중 나온 가이드는 환영과 무병장수의 뜻을 지닌 하얀 비단 천, 까닥(哈達)을 목에 걸고 주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분주히 라싸(拉萨)로 향한다. 원초적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하늘의 푸름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리다가도 너무나 화사하고 깨끗한 햇살에 찔려 실눈을 뜨고 간다.

  가끔 길가에는 순수한 대자연에 잘 길들여진 인간이 보인다. 길들여진 인간의 순수함은 가끔 강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주 먼 옛날의 신화를 안고 우두커니 서 있는 황량한 산과, 그 산자락 바로 옆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라싸 강을 바라보노라면 ‘정중동(靜中動)’의 묘리가 느껴진다. 산허리 능선에 새겨진 마애불상의 황금빛은 따가운 햇살을 받아 우주 밖으로까지 비칠 듯하다.

  모든 것이 새로운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쪽빛 하늘과 하얀 구름의 조화, 칼날 진 능선을 자랑하는 젊은 산들, 7월의 평균 강수량이 130밀리밖에 되지 않음에도 웬 강물은 저리도 흥건히 흐른단 말인가. 먼 산도 공기 중에 물방울과 먼지가 없기 때문인지 손에 잡힐 듯하다.

  우리를 태운 봉고 차는 어느덧 새로 생긴 티베트 제1호의 갈라산터널[嘎拉山隧道(알랍산수도)]을 통과한다. 이 터널의 준공으로 공항에서 사라 시내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단다. 주로 물길 따라 길이 나 있고, 길가에 자라는 나무라곤 미루나무와 버드나무 두 종류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하천 부지에 미루나무로 인공 조림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흥에 겨운 나머지 나는 맨 앞의 기사 옆자리에 앉아 준비해 간 리코더로 우리 민요를 연신 불어댔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머리가 무겁고 띵하며, 목이 뻣뻣해 왔다. 이게 바로 염려하던 고산증이로구나! 낮은 기압과 부족한 산소 탓이다. 좋은 점도 있다. 왠지 배낭이 올 때보다 가벼워졌다 했더니만 기압이 낮은 탓이었다. 고산증은 여자보다 남자, 마른 사람보다 뚱뚱한 사람, 천천히 오르는 사람보다 비행기로 갑자기 오르는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했다. 나는 세 가지 악조건을 모두 구비했으니, 걱정이 앞선다.

  마차와 자동차가 다소 빈번하게 지나간다 했더니 라싸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라싸는 해발 3650m의 고원에 위치한다. 라싸는 티베트어로 ‘신의 땅’이란 의미이다. 티베트가 현재도 중국 전체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이지만, 원래는 중국의 4분의 1이나 차지하는 대단히 드넓은 고원 나라였다. 칭하이성, 쓰촨성, 윈난성에 듬뿍 떼이고 나니 현재의 행정구역이 남아 있을 뿐이다. 티베트족 곧 장족(藏族)은 인구 5백만 정도를 헤아린다. 티베트의 옛 이름은 세계사에서 배웠던 토번(吐蕃)이다. 티베트 글자를 유두체(有頭體)라 하는데, 8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목판인쇄의 방법과 함께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반가운 것은 우리말과 같이 목적어 뒤에 동사가 온다는 사실이다. 조사도 있단다. 굽타문자를 모체로 하여 만들었고, 가장 오래된 문헌은 8세기의 것이다. 산스크리트 문자의 원형을 딴 티베트 문자는 자음자(子音字) 30자, 모음기호(母音記號) 4자로 된 표음문자이다. 서체에는 유두체(有頭體)인 인쇄용 서체와 무두체(無頭體)인 필기용 서체가 있다. 라싸 시내의 모든 간판은 규정상 위에는 티베트어로 작게, 아래에는 한어(漢語)로 크게 표기하고 있다. 한족(漢族)이 최근 들어 정치적, 상업적 목적으로 부쩍 많이 이주해 오고 있고, 한어를 정책적으로 철저히 지도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티베트어의 앞날이 밝을 것만 같지는 않다.


  라싸 동부 중심에 있는 스노우랜드 호텔(Snow Land Hotel, 쉐청삔관, 雪城賓館)에 짐을 풀고, 걸어서 10분 정도의 가까운 절 조캉사원(Jokhang Temple, 따자오스, 大昭寺)에 들렀다. 사원 앞의 비석에는 ‘포탈라궁(The Potala Palace, 부다라궁, 布达拉宫)’과 ‘조캉사원’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는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티베트어로 '부처의 집'이란 뜻을 지닌 조캉사원은 티베트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참배객 또한 가장 많다. 이른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경전을 넣은 통인 마니차(prayer wheel, 法輪)를 돌리는 인파들이 빼곡했다. 마니차는 문맹자(文盲者)들을 위하여 만들었단다. 통 안에다가 경전을 넣고, 겉에는 불경을 새겨서 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기구이다. 마니차를 시계 방향으로 한번 돌리면 통 안의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단다.

  한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두 다리를 끈으로 묶고, 앞에는 낡은 매트를 깔고, 손바닥에는 나무판이나 가죽을 끼고, 적이 진지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을 한참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노라니, 삶이 신앙인지, 신앙이 삶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신앙의 힘이 아니었던들 이토록 척박한 땅에서 인간이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으랴. 오체투지를 하는 이들의 외모와 옷은 마치 순례의 깊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루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깊고 선한 마음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그 어떤 패션쇼장의 포즈나 의상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노동자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의 아름다움과도 또 다른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성지 순례의 마지막 여정이 조캉사원을 맴도는 일이란다. 사원 담벼락 밖을 걸어서 도는 불교 의식을 ‘코라’라고 하는데, 저녁 6시가 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골목길 빼곡히 들어서는 저 순례자들의 코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원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이생의 업(業)을 정화(淨化)하여 소멸시킬 수 있고, 세 번을 돌면 해탈(解脫)을 할 수 있단다.

  조캉사원 옥상에 올라가 사방의 풍광을 디카로 찍고 내려오는데, 1층은 여전히 마니차 불자들로 빼곡했다.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반메홈'을 외는 이들의 소리가 낯선 여행자에게는 깊은 미로 속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가장 높은 땅에서 가장 낮게 절하며 살아가는 티베트인. 점차 문명에 노출되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될까. 시내 중심가를 거쳐 돌아오는 길의 라싸는 이미 신비의 땅은 아닌 듯싶다. 라싸가 점차 관광지로 바뀌고, 금년 7월부터는 칭짱열차(靑藏列車)가 들어오면서 시내의 대부분은 벌써 한족화한 느낌이 든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한족화해 버린 티베트의 앞날이 애처롭게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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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차>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일 뿐


제14일 - 7월 28일(금)

  네팔과의 이별(離別)의 날이다. 아직도 한국에서 가지고 온 라면 4개가 배낭의 한 구석을 무던히도 자리 잡고 있다. 호텔 요리사에게 두 개를 선물로 줄 테니 두 개는 끓여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쾌히 승낙(承諾)했다. 아쉬움을 달랠 겸 왕궁(王宮) 주변을 한 시간 가량 돌았다. 잎이 유난히도 긴 커다란 소나무의 우듬지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가 하면 굵은 가지 끝에는 어미닭만한 박쥐가 박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 인적 없는 오전의 왕궁 뒤뜰에는 적막(寂寞)만이 흐르고 있어 불안한 정국을 반영하는 듯 했다. 네팔 교육체육부 입구도 교도소 입구마냥 스산한 분위기였다.

  그나마 잘 정리된 힌두사원이 눈에 들어와 그곳에 들렀다. 코끼리 형상의 신상 얼굴에는 얼굴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붉은 칠이었다. 작은 개선문처럼 생긴 종루 주변에는 비둘기들이 아침 식사에 혼이 빠져 길손이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탑(塔) 정면에는 말 모양의 몸에 해태상과 같은 얼굴을 한 석상이 양쪽에서 버티고 서 있다. 탑은 아랫부분은 하얗고 상륜부 쪽은 금빛을 칠하여 유난히 반짝인다.

  숙소인 빌라에베레스트에 돌아와 이성만 작가와 함께 마당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무리 유명한 사진작가라도 작가 자신은 남의 손에 의하여 찍힐 수밖에 없다. 제법 멋있게 포즈를 취해 본다. 세상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많은 기념사진의 모델이 되어오다가, 어느 순간 찍히는 사람에서 찍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그 심도(深度)가 깊어지자 마침내 사진작가로 거듭난 것이다. 처음부터 훌륭한 사진작가란 없다. 순간(瞬間)을 영원(永遠)으로 이어가고자 무수한 찰나(刹那)를 포착(捕捉)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 동안에도 이성만 작가님은 그 무거운 사진기를 앞뒤로 울러 메고 뻔뻔스럽다 싶을 정도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무수히 셔터를 눌러 댔다. 정말 낯은 두꺼워야 하고 눈은 얇아야 하며, 순간 포착은 무용수처럼 민첩해야만 했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결코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는 때때로 돈키호테(Don Quixote)처럼 자신에게 기사(騎士) 신분증을 주기도 하고, 기자(記者) 신분증을 주기도 하며, 어떠한 장소라도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 맨 처음의 운전면허증 소지자는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최초의 박사학위 소유자도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받았으리라. 어쩌면 스스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먼저 만들어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은 비행기 시간을 이용하여 공항 가는 길에 파슈파티(Pashupati) 사원에 들렀다. 네팔의 전형적인 장례(葬禮)문화를 둘러볼 수 있는 카트만두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나의 여정(旅程)을 일생에 비기자면 나 역시 이젠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 묘한 일치를 되새기며 입구에 들어서자 벌써 시신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각에 따라서는 태릉 갈비 촌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건만 사전에 머릿속에 각인된 화장터라는 선입관(先入觀) 때문에 역겨움이 차오름을 어떡하랴.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폭이 30여 미터 정도 됨직한 강 건너 편에 열 곳의 화장대(火葬臺)가 나란히 있고, 대기 중인 시신(屍身)들이 있는 걸 보니 풀가동 중인 장례식장(葬禮式場)이었다. 한두 시간이면 육신의 형체는 사라지고 찌꺼기는 그대로 남은 나무 등걸과 함께 바로 옆에 있는 흐르는 강물 속으로 거침없이 쓸어내려 진다. 아이들은 생(生)과 사(死)의 경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화장대 바로 밑에서 물장난하며 놀고 있고, 떠내려가는 나무 등걸은 누군가에 의하여 건져져 다시 땔감으로 사용된단다. 그래, 원래 없던 자리에서 왔으니, 한 세상 살다가 떠나간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은 자연의 이치리다.

  티베트에도 나무가 흔했더라면 이런 화장 풍습이 그대로 전해졌을 텐데, 땔감조차 절대 부족한 터이고 보면, 본래 무(無)의 자리로 돌려주는 최고의 방법으로 조장(鳥葬)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인간의 넋은 수십 년 동안 육신(肉身)에 세(貰)들어 살다가 이제 거침없이 돌려주고 혼(魂)은 연기(煙氣)를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고 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하늘빛이 맑다. 사라지는 시신을 보며 오늘은 참으로 죽는 연습을 많이 했다. 생각해 보면 매일 자는 잠이란 것도 매일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지……. 깨어나지 않으면 길이 잠잔다는 영면(永眠)이 아닌가.

  생사로(生死路)의 정류장(停留場)이라서 그런지 전신(全身)에 희귀한 색칠로 분장(扮裝)하고 기이(奇異)한 요가(yoga) 자세를 하고 있는 수도승(修道僧)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처음에는 그 수도승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원색적이고 원시적이어서 시신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저승사자(使者)의 모습을 그리라면 이분들과 닮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러한 수도승의 근엄함도 사진을 찍으면 돈을 달라고 손 내미는 대목에서는 역시 ‘돈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가르침은 성현의 말씀이 적힌 경전(經典)이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 삶의 확실한 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종교(宗敎)와 예술(藝術)은 그 끝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깨우쳐 주며 우리에게 영원(永遠)과 무한(無限), 두 가지를 약속해 준다. 부족한 우리 인간은 시간적으로 짧은 인생이지만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좁은 육신을 가졌지만 무한한 우주를 그리며 살고 있다. 그렇다,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일 뿐 끝은 아니다. 그리고 죽을 때 특별한 유언(遺言)을 한다는 것도 격에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하게 떠들어 온 말이 모두 유언인 샘이다. 죽을 때 야단스럽게 떠든다고 지나온 삶과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화장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국제공항(國際空港)이 있다. 티켓 확인 과정에서 공항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내 조국에 제때 돌아가지 못하나 하고 후진국형 긴장(緊張)에 빠지기도 했지만,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 희망찬 네팔의 두 젊은이와의 대화로 여백(餘白)을 처리했다.


제15일 - 7월 29일(토): 짧은 추억 긴 여운

  타이항공(Thai 航空)으로 방콕(Bangkok)을 거쳐 인천공항(仁川空港)에 도착하니 이튿날 아침이었다. 중간 기착지 방콕에서 기다리는 5시간은 지루함이 아니라 여행과정과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는 귀한 묵상(黙想)의 시간이었다.

  문명 저편의 티베트, 파란 하늘빛과 행운을 부르는 깃발 타르초, 옥빛으로 반짝이는 호수와 멀리 잿빛 산 위의 구름은 지금도 신기루(蜃氣樓)처럼 피어오른다. 녹색 보리와 노랑 유채꽃의 조화, 비 없이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생명의 시작과 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회(輪廻)의 굴레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붓으로 티베트와 네팔의 영(靈)을 그리고, 한 사람은 사진기로 혼(魂)을 찍었다.

  가슴으로 배우고 몸으로 느끼며 두려움 없이 즐긴 보름간의 자유여행(自由旅行), 짧은 추억(追憶)을 긴 여운(餘韻)으로 남기기 위해 글을 남긴다.

  부족(不足)하여 즐거운 티베트와 네팔이여, 안녕…….


  (추신) 지금까지 10회에 걸친 티베트 네팔 기행문을 읽어 주신 <월간서예(月刊書藝)> 애독자님들과 편집에 고심을 함께해 주신 최광열 사장님 이하 관계자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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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난파
선생님 티베트 여행기 이제야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곡 한번 가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