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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24- 한강 살가지

한강 살가지

 

도정 권상호

  늙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하려면 아무래도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 만추(晩秋) 경치를 읊은 산행(山行) 시를 음미해 봐야 한다.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아득한 한산 비탈진 돌길 오르니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구나.

수레를 멈추고 저녁 단풍 숲을 보니

서리에 물든 잎이 봄꽃보다 더 붉어라.

 

  이 시는 가을 시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청춘 시절에는 무심히 읽고 지나갔던 시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주옥같은 명편으로 가슴에 저며 온다. ‘서리에 물든 잎이 봄꽃보다 더 붉어라.’라고 한 것은 ‘노년이 청춘보다 더 아름답다.’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어가는 은밀한 즐거움을 얘기한다면 거드름으로 들릴지 모르나, 적어도 발효된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 늦가을의 단풍처럼 장엄하게 늙어가는 노인의 모습은, 분명히 꽃다운 청춘보다 아름답다. 창공의 학처럼 고고하게 늙어가는 노인의 정은 농밀하고 생각은 깊어만 간다.

  이 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우리 인생의 사계(四季)와 딱 들어맞다.

  기구(起句)에서 시적 화자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꾸준히 오르는 모습은 인생의 봄인 학창시절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이다. 그 길은 수레를 타고 갈 만큼 다소 넓기는 하지만, 평탄한 길이 아니라 돌이 널려 있는 오르막길이다. 그 길의 끝은 가깝지 않고 먼 길이다.

  어느 정도 청운의 꿈을 이룬 다음에는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그 모습은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구나.’ 하는 승구(承句)에 보인다.

  인생의 전환점은 퇴직할 때쯤이랄까? 거침없이 몰아오던 삶의 수레를 잠시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모습은 천사와 같다. 퇴직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을 천사 나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편안히 쉬면서도 건강과 금전이 함께 보장되는 시기로 사회 희사금도 가장 많이 내는 때라고 한다. 시인은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회한(悔恨)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온갖 영욕의 세월을 관조하며 또 사랑하고 있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시의 진정한 맛은 역시 결구(結句)에 있다. 늙음의 미학을 노래하고 있는 결구가 뇌리를 때린다. 이쯤 되면 인생 4/4 분기를 맞이하는 시인의 마음 바탕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나뭇잎에만 서리가 내리는 게 아니라 인간의 머리 위에도 서리가 내린다. 나뭇잎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의 머리카락도 듬성듬성 자리를 비운다. 늦가을이면 산의 속살이 드러나듯이 늙은이의 정수리도 훤히 드러난다. 저 큰 바위 얼굴과 같이 근엄하고 고고한 노인의 모습은 완숙미의 절정이다.

 

  한강을 살리고, 가꾸고, 지키자는 `한강살가지문화제'. 이 행사의 하나로 ‘한강발원제(漢江發源祭)’가 있다. 여기에서 이무기 라이브 서예를 마치고, 산행(山行) 시를 읊조리며 한강 발원지인 태백산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 오르는 길은 작은 산행(山行)이지만 행복의 길이다. 검룡소에서 내려와 산소 도시 태백에 머물고 싶지만, 내일의 행사 ‘한강생명시원제(漢江生命始原祭)’에서의 라이브 서예를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야 한다. 또 하나의 한강 시원지인 오대산 우통수는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줄기와 정선 아우라지에서 만난다.

  또 일주일 후인 23일에는 남·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兩水里)에서 합수문화제(合水文化祭)를 끝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한강아, 한강아! 낮은 곳으로 흐르는 너의 겸손을 배워 볼까나.

  우리의 자동수레는 오대산 숙소에 가는 방법으로 장엄한 태백산맥 준령 길을 택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을 달릴 때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이 거대한 등마루가 백두대간이로구나. 백두대간의 중심에 태백산과 소백산이 있지. 이름으로 보아서 태백(太白)은 형이요 소백(小白)은 아우로구나. 백두에서 시작하여 태백과 소백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백() 자를 무척 사랑했나 보이. 그래서 백의(白衣)를 입고, 백자(白磁)를 즐겨 사용했나 보이. 태백과 소백에 북녘의 백두까지 합치면 삼백(三白)이로구나. 얼쑤!

  백두대간 등줄기를 더듬어 내려가니 그곳은 바다. 바다에 인접한 옥계휴게소에서 동해 바람을 맞으며 태껸 춤으로 심신을 풀고 영동고속도로를 올랐다. 터널이 많아 빠른 길일 수는 있지만, 산이 주는 각별한 재미는 없다. 좁은 길로 빠져나오니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 숲이 길을 안내한다. 웰컴 투 켄싱턴플로라호텔.

  이튿날 오전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오대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월정사(月精寺)의 정취에 흠뻑 빠져본다. 종이로 만든 부처, , 사슴과 학 등이 월정사 입구 금강연(金剛淵) 주변을 꾸미고 있다.

  수변무대에서 리허설을 마치고 ‘한강생명시원제’가 개막된다.

  참가자 전원이 조약돌 두 개씩 들고 짝짝 치면서 동요를 부른다.

 

  “열목어야 열목어야 팔짝 뛰어라. 안 그러면 잡아먹는다. ~

 

  열목어(熱目魚)는 이름대로 눈이 붉은색이고, 열이 많아 찬물을 좋아하는 북방계 어종이다. 근년에 중생의 마구잡이로 멸종 위기에 몰린 열목어. 열 받은 열목어다. 죽어간 열목어의 넋을 달래고, 사방의 악령을 물리치는 액()막이 검술이 이어지고, 나는 커다란 붓으로 넓은 돛에다 뛰어오르는 열목어를 미친 듯이 그린다. 많은 사람의 기가 모이면 힘이 솟고, 붓대는 이내 신장대로 변한다.

  제주(祭主)는 열목어를 부르는 제문을 읽은 뒤 향불을 꽂는다. 기타 치는 이야기꾼의 한 맺힌 열목어 얘기 중에 모두 나와서 열목어의 넋을 위로하는 글을 쓴다. 열목어의 정령(精靈)이 되살아나 금강연 물속으로 들어간다. 열목어 방생이 이어진다. 열목어가 잘 살기를 기원하며 참가자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조약돌을 금강연 속에 던진다. 퐁당퐁당 풍덩풍덩. 이리하여 한강생명시원제는 시원하게 끝난다. 열목어야 열목어야 팔짝 뛰어라!

 

  그리고 또 이레가 흐른다. 양수리 실학박물관 강가에서는 단풍보다 더 붉은 물의 잔치, ‘합수문화제(合水文化祭)’가 열린다. 양수리의 본명은 두물머리로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이다.

  한국화가 김영한 씨와 박경호 씨, 구비문학 신동운 교수, 한계령 작사가 시인 정덕수 씨, 패션디자이너 서세영 씨,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진미 씨 등 많은 예인(藝人)들도 합석했다.

  이레 전에 검룡소와 금강연에서 그린 이무기와 열목어가 여기까지 내려와 돛으로 올라 한강을 지키고 있었다. 시 낭송을 배경으로 먼 곳으로부터 흰 돛단배가 '강의 마음'을 싣고 들어온다. 김백기 씨의 한국실험예술정신 코파스와 명상춤꾼 박일화 씨의 몫이다. 흰 돛은 내려져 끌림배 위의 수변 무대에 펼쳐지고, ‘강은 다양한 하나’임을 보여 주는 퍼포먼스가 그 위에서 이어진다. 유진규 감독의 치밀하면서도 따뜻한 시선 아래, 보디페인팅은 배달래 씨, 라이브 서예는 소생의 몫이다.

  큰 붓을 잡고 노를 젓듯이 무대에 나아가 '여산여수(與山與水) - 한강, 살리고 가꾸고 지키자.'라는 내용을 써 내려간다. 참가자들도 덕담으로 가세한다. 그림으로 변한 돛이 다시 오르고 바람을 탈 때에, ‘강의 힘’을 테마로 하는 극단 몸꼴의 퍼포먼스가 불 속과 물 위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참가자 모두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하늘을 향하여 ‘한강의 외침’을 춤으로 보여 주고 노래로 들려준다. 이어지는 ‘2010 한강문화제 선언문’ 낭독. 피날레는 고구려 밴드에 흥겨운 대동 놀이 강강술래로다. 노소동락(老少同樂) 주객일체(主客一體), 천제님과 용왕님도 다 함께 차차차. 얼쑤~. 순간 행자 진행을 맡았던 이성용 씨의 고함, 저길 보시오! 서쪽 하늘에 용이 승천하고 있소! 오호, 절묘한 조화로다. 열 입이면 쇠도 녹인다더니…….

  이 날 자연과 더불어 소통하고 공존하고자 뜻을 모은 전국의 여러 소하천(小河川) 살가지운동 단체는 물론 장애인들도 동참하였다. 다양한 사람과 뭇 생명이 하나의 강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이 경향 각지에서 모여 뜻 깊은 행사를 일궈냈다. 이렇듯 세상은 다양하기에 하나 되어 살아가는가 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란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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