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39- 해미읍성축제에서 환생한 안견과 안평대군

해미읍성축제에서 환생한 안견과 안평대군

 

도정 권상호

  축제(祝祭)의 시작은 풍년 기원과 추수 감사에서 비롯되었다. 한자 ‘祝(빌 축)’과 ‘祭(제사 제)’ 자에는 공통적으로 ‘示(보일 시)’ 자가 들어 있다. 示 자를 보면 ‘하늘[]에서 세 줄기의 빛[]이 내림’을 알 수 있다. 햇빛, 달빛, 별빛이 삼광(三光)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모양이다. 고스톱에서도 삼광이면 간단히 3점으로 날 수 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다. 빛에 의해 상대적으로 지어질 뿐이다. 따라서 나의 경우, 이기 이원적 일원론(理氣二元的一元論)에 손을 든다. 여기서 일()은 빛이다.

  축제(祝祭)는 축하(祝賀)의 유희적 기능과 제사(祭祀)의 제의적 기능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은 제의적 기능은 사라지고 유희적 기능만이 남아있는 형편이다.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열리는 대중적 축제로 카니발[사육제(謝肉祭)]이 있다. 사순절(四旬節)의 금욕 생활에 앞서 가면을 쓰고 신분을 넘나들며 즐기는 카니발도 유희적 기능만이 강조되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문방사우를 챙기고 충남 예산을 찾았다. 실은 언제나 내 차의 트렁크에는 지필묵연(紙筆墨硯)과 하모니카, 리코더 등이 실려 있다. 지난 6 10일 밤, 국내 제일의 알카리성 온천으로 유명한 덕산온천관광호텔에서, 77회 ‘서울시단시낭송회’가 열렸다. 사방이 휑하니 뚫려 신선한 대자연과 조화를 이룬 쾌적한 호텔이다. 성기조 박사의 초대로 김병권 전문협부이사장, 안재진 서울시단 대표 등 70여 명이 참석한 3시간 동안의 시낭송 잔치였다. 나는 성기조 선생의 시, ‘인연’을 낭송하며 동시에 백족자(白簇子)에 모필로 써 내려갔다. 동행했던 임수홍 한국문학신문 발행인, 김용복 국보문학작가회장 등과 함께 시계를 풀어놓은 시와 노래의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토목건축가 박태영씨와 함께 해미읍성(海美邑城) 축제장을 향했다.

  해미읍성은 어떤 곳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전에 훈련원교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했던 곳, 고종(高宗) 3(1866)에 천주교도 천여 명이 처형당했던 곳, 조선시대에 축성된 읍성 중 6백년 가까이 풍파를 딛고 이겨온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충청남도 서산시에서는 해마다 6월이면 해미면 해미읍성 안에서 해미읍성축제를 펼친다. 금년에도 6 10()부터 3일간, 신명나는 전통난장 ‘2011 해미읍성축제’가 펼쳐졌다. 조선 후기 중소도시의 전통장터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활기찬 시민들의 생활상이 담긴 다양한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줄타기, 버나놀이, 풍물놀이, 땅재주, 전통무예, 마상무예, 난장공연, 전통 연희, 민속공연, 마당극 등 풍성한 볼거리를 갖춘 문화 향연의 장이었다. 전통 주막, 전통 공예 등의 전통문화 체험과 어릴 적 추억을 되살려 줄 연날리기, 민속씨름 등도 행사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금년에는 특별히 ‘서화 난장판’ 행사를 곁들여 관람객도 직접 쓰고 그릴 수 있는 붓자리도 마련되었다.

  서화 난장판을 위하여 여러 날에 걸쳐 콘티를 짜고 배역을 정했다. 이 고장 출신으로 추정되는 조선 전기 최고의 화가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을 중심인물로 잡고 다음과 같이 스토리를 추리해 나갔다.

  그래, 이 땅에 안견의 화혼(畵魂)을 되살리자.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의 본능을 일깨워 주고, 화가 지망생들에게는 대가의 꿈을 안겨 줄 안견동자(安堅童子)를 환생(還生)시키는 거야.

  2011 6 11() 11, 안견동자 환생의식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안견동자의 환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온몸이 하얀 선녀(신미경.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가 나타나 환생기원무를 춘다. 잠시 후에 안견 동자(조민성군, 안견의 뒤를 이어나갈 꿈나무, 운신초등학교 2학년)가 탄생하여 유상곤 서산시장과 이 지방 출신의 화가 김문식 선생의 손을 잡고 해미읍성 중앙무대에 나타난다.

  놀라운 일은 안견에게 꿈에 본 이상향 도원 이야기를 들려주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쉬지 않고 그려, 3일만에 완성하게 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 본인)도 함께 환생하여 나오고, 그 뒤를 시녀 두 사람(노한나, 한지윤. 예무단 ‘결’ 맴버)이 따른다.

  안견은 화원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벼슬인 종6품에서, 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한 유일한 인물이다.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시서화(詩書畵)에 가야금까지 능했던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화(古書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히고, 마침내 1447(세종 29) 4 23일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완성한다. 이 그림에는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김종서 등의 집현전 학자 들이 주축이 되어 축시를 붙여 놓았는데, 이들의 명단은 나중에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의 살생부로 전락하고 급기야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런데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武溪精舍)에 드나들었던 많은 선비들은 죽었지만 안견만이 살아남은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안평대군이 안견의 재주를 귀하게 여겨 꾀를 냈던 것이다.

  안견이 무계정사에 기거할 때의 일화이다. 대군이 중국에서 선물 받은 귀한 벼루를 밤에 몰래 안견의 소매춤에 감춘다. 이튿날 아침 대군은 벼루가 사라졌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만일 훔쳐간 놈이 나오면 낙향시키기로 했다. 벼루는 어김없이 안견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소매춤에서 나오고, 안견은 충청도 서산 지(池谷)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 안평대군과 그 주변 사람들의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서곡이 이어지자 안견은 뒤늦게 안평대군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눈물을 쏟는다.

  무대 중앙에 등장한 안견동자는 향을 피우고, 안평대군은 쓴 시를 촛불에 소지한다. 뜻을 펴지 못하고 죽어 간 영혼들과 먼저 간 화가들을 위하며 묵념 후 절을 두 번 한다.

  이어 안견과 안평대군의 환생을 축하하는 ‘흥춤’이 시작된다. 안견동자는 시장님을 모시고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안평대군은 대붓으로 몸을 던지며 휘호한다.

 

내 고향 서산은 그대로인데,

몽유도원도는 어디로 갔나?

 

  몽유도원도는 안타깝게도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 있다. 지키지 못한 후손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현실에서 이상세계까지의 과정을 그린 세계적인 명화를 찾아와 안견과 안평대군의 원혼을 달래야 한다.

  마지막은 신나는 음악과 함께 ‘서화 난장판’이 벌어진다. 붓쟁이 20여 분이 우르르 나와 미친 듯이 쓰고 그린다. 뒤이어 관중 4백여 명이 쏟아져 나와 ‘서화 난장판’을 이룬다. 모두들 안견의 화혼에 젖어 붓질한다. 더러는 쓰고 그리며, 더러는 흥겹게 춤을 춘다.

  실로 감동적인 글씨와 그림의 난장판이었다. 안견의 화혼이 환생하여 이 땅에 세계적인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길 기원하는 자리였다. 초록빛 숨 쉬는 해미읍성의 품속에 발갛게 익어가는 붓쟁이들의 꿈이 펼쳐졌다. 이제 해미읍성은 축제로 더욱 빛나고, 서산시는 문화예술의 허브 도시로 거듭나리. 몽유도원도를 보고 안평대군이 지은 서시(序詩)로 종을 칠까 하노라.

 

世間何處夢桃源(세간하처몽도원)

이 세상 어느 곳이 꿈속 도원이었던가?

山冠野服尙宛然(산관야복상완연)

산관에 야복차림 오히려 완연하네.

著畫看來定好事(착화간래정호사)

그림으로 그려 보니 진정 호사인데,    

自多千載擬相傳(자다천재의상전)

천 년토록 어루만지며 서로 전해 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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