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52- 풍류(風流) - 바람처럼 물처럼

풍류(風流) - 바람처럼 물처럼

 

도정 권상호

  ‘풍류객(風流客)’ 또는 ‘그 사람 풍류를 아네그려.’라고 할 때의 ‘풍류(風流)’는 무엇일까. ‘바람 풍()’에 ‘흐를 류()’ 자를 쓰는 걸 보니 바람과 물처럼 살아가라는 뜻일까. 바람처럼 허허롭게, 물처럼 자유롭게 삶의 멋과 앎의 맛을 즐기라는 뜻일까. 절대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 영혼을 가리키는 말일까.

 

  ‘風(바람 풍)’ 자는 凡(돛 범)과 虫(벌레 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촉감과 음향만 있기 때문에, 바람의 이미지를 글자나 그림으로 나타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돛단배를 보고 바람을 표현했으리라. 그것이 바로 凡(돛 범) 자이다.

  그런데 風(바람 풍) 자에 虫(벌레 충) 자는 웬 말인가? 벌레와 바람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바람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옛사람들은 바람을 아주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鳳(봉황새 봉)과 風(바람 풍)을 같이 쓰고 있으니, 이는 거대한 봉황새가 바람을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상상의 새인 鳳凰(봉황)이 다스리고, 구름은 상상의 동물인 龍()이 다스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凡(무릇 범, 돛 범), (돛단배 범), (봉황새 봉), (바람 풍) 등은 발음이 서로 통하며, 모두 바람과 관련이 있는 글자들이다. (풍년 풍)도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야 가능하다. 그래서 발음이 風()과 같다.

 

  그럼, 풍류(風流)라고 할 때의 ‘流(흐를 류)’ 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놀랍게도 ‘아기가 양수를 따라 태어나는 모양’에서 나온 글자이다. ()’ 자의 윗부분은 ‘子(자식 자)’를 거꾸로 쓴 모양이다. 아랫부분은 해산(解産)하기 바로 앞에 태포(胎胞) 안에 흘러든 양수인 전양수(前羊水)를 가리킨다. 전서 이전의 流() 자는 좌우에 모두 水() 자를 붙여 놓았다. 양수(羊水)란 양막(羊膜) 안의 액체를 가리킨다. 양수는 태아를 보호하며 출산할 때는 흘러나와 분만을 쉽게 한다.

  양수에서 출발한 流() 자가 나중에는 모든 ‘물의 흐름’뿐만 아니라 문물의 ‘교류(交流), 한류(韓流)에서처럼 ‘유행(流行), 상류사회(上流社會)에서처럼 ‘계층’은 물론 ‘풍류(風流)’ 등의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본래 물이 흐르는 모양은 ‘水(물 수), (내 천), (길 영)’ 등에서 볼 수 있다.

 

  풍류(風流)의 사전적인 의미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이라 했다. 풍류의 비슷한 말로 ‘화조풍월(花鳥風月)’이 있다. 꽃과 새와 바람과 달이라……. 천지간의 아름다운 것은 다 갖다 놓은 말이다. 그렇다면 풍류는 향기롭고 아름다우며, 자유롭고 멋스러운 일이렷다. 그리고 대풍류, 줄풍류 따위의 관악 합주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한 걸 보면 풍류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풍류를 알다’, ‘풍류를 즐기다’, ‘풍류를 울리다’, ‘풍류의 고장’ 등의 예에서 보듯이, 풍류란 배워서 알아야 하고, 실행을 통하여 즐기고 울려야 하며, 나아가 자신이 사는 고을을 풍류의 고장으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풍류를 얘기할 때, ‘멋, , (), (), 태깔, 고움, 은근(慇懃), 끈기, 신명, 아름다움’ 등과 같은 다양한 용어를 쓴다. 이 중에 제일 멋진 말은 역시 ‘멋’ ‘맛’ ‘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한()’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한’을 통하여 민족이 더 결속되고, 이를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 ‘한()’은 ‘멋’과 ‘맛’을 통하여 ‘흥()’으로 승화된다. 멋은 맵시, 맛은 솜씨, ()은 마음씨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분석적인 서양미학에서는 미적 범주를 흔히 숭고미(崇高美), 우아미(優雅美), 비장미(悲壯美), 골계미(滑稽美) 등의 네 가지로 나눈다. 예컨대, 대상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숭고함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하는 경우는 숭고미에 해당하고, 자아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우아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연을 인식하는 자아의 실현 의지가 현실적 여건 때문에 좌절할 경우는 비장미에 해당하고, 자연의 질서나 이치를 의의 있는 것으로 존중하지 않고 추락시킴으로써 나타나는 미의식은 골계미에 해당한다. 골계미는 풍자와 해학의 수법으로 익살을 부리는 가운데에도 자아에게 교훈을 준다.

 

  풍류의 금메달 선수로 장자(莊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고정 관념의 틀을 박살 낸 풍류객이었다. 대우주를 그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절대 자유의 경지에 노닐면서 생()과 사()를 하나로 생각하고, ()와 공()을 초월했던 호방한 인물이었다.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巡禮)하며 풍류를 즐겼던 화랑도(花郞徒)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풍류를 도()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려 이른바 ‘화랑도(花郞道)’를 이루었다. 달빛을 벗 삼아 거문고를 타고,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전해 듣고 그 기쁨에 무궁화(無窮花) 꽃봉오리를 붓 삼아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라는 편액을 쓴 만공(滿空) 스님도 경계가 없는 풍류객이었다.

 

  풍류객(風流客), 바람 같은 자유와 물 같은 융통성을 지닌 사람, 자연의 리듬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우주 만물의 영과 교감할 줄 아는 멋쟁이가 그립다.

  올해에는 총선(總選)과 대선(大選)이 있는 선거의 해이다. 인기에 영합하지 말고, 당선에 연연하지 말고, 풍류를 아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고 싶다. ()을 극복하고 낙()으로 가는 과정에 흥()이 있다. 이 흥을 돋우어 주는 풍류정치가(風流政治家), 아니 풍류정치꾼이 그립다. 서민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웃음으로 울음으로 달달 긁어 줄 수 있는 그런 정치가…….

 

  연초에 용이 춤추고 봉황새가 나는 그런 풍류의 한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무봉상(龍舞鳳翔)’이란 네 글자를 큰 붓으로 휘둘러보았다. 국회의원을 꿈꾸는 분의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노래와 함께 ‘붓 풍류’를 즐겼다. 풍류는 혼자서 즐기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즐기는 맛이다. 남의 풍류에 갈채를 보내고, 추임새를 넣어야 제맛이다. 따라서 풍류는 상생(相生)의 길이다. 4월에도 12월에도 크게 한번 외쳐 보자.  

  ‘잘한다’ ‘지화자’ ‘좋다’ ‘멋있다’ ‘신 난다’ ‘얼씨구’ ‘절씨구’ ‘예술이다’ ‘죽인다’ ‘멋져부러’ ‘판타스틱’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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