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55- 바람은 인수봉을 만들고, 붓은 나를 키운다

바람은 인수봉을 만들고, 붓은 나를 키운다

 

도정 권상호

  이따금 삼각산 인수봉을 바라본다. 원만한 모습이 언제나 ‘세상일에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살아가라.’라는 무언의 교훈을 준다. 저보다 더 멋진 조각 작품이 있을까.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걸작이다. 어느 조각가의 작품일까. 정과 망치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어찌 저리도 장중하지만 어둡지 않게 다듬을 수 있을까. 그렇다. 단단한 저 바위를 둥글게 만든 조각가는 다름 아닌 부드러운 바람인 것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서예 작품과 엄정한 사초(史草)를 남기는 일은 부드러운 붓의 몫이다. 모질고 삐뚠 이 몸까지 다듬어 주는 것도 붓이다. 이크.

  붓으로 기록하는 일을 필기(筆記)라 하고, 필기할 때 사용되는 도구를 일러 필기구(筆記具)라 하것다. 연필, 철필, 만년필, 볼펜, 샤프펜슬, 플러스펜, 매직펜, 분필, 보드마커 따위의 다양한 필기구가 있지만, 여기서는 짐승의 털로 만든 모필(毛筆)만을 이야기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흔히 서재(書齋)에 필요한 종이[()], [()], [(], 벼루[] 등의 네 가지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한다. 중국에서는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 하는데, 얼핏 보기에 ‘보배[]’라는 말을 쓴 것은 그만큼 문구를 소중히 여김에 온 말이겠지만, 그 속내에는 물질 숭상의 사고와 출세 지향적인 인식이 담겨 있다고 본다. 고독한 실내에서 혼자서 붓글씨를 쓰는 일은 지루하고 고독한 작업일 수 있다. 그래서 문구를 ‘벗[]’이라고 본 점은 매우 정겹게 느껴진다. 문방사우 중에 가장 중요한 친구는 아무래도 붓 친구라 할 수 있겠다. , 다른 친구들 합동으로 열 받을라…….

  붓이 생기기 전에는 칼이 붓을 대신했다. 거북의 배뼈나 소의 어깨뼈, 돌이나 나무 등에다가 칼로 글씨를 새기는 일이 먼저 생겼다. ‘새기다’는 뜻의 刻(새길 각)이나, ‘긋다’는 뜻의 ‘劃(그을 획)’에는 칼[(칼 도)]이 붙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칼은 붓의 조상이다.

  지금과 같은 붓이 생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은대(殷代)에는 나뭇가지나 댓가지에 먹을 묻혀 쓰기 시작했으나, 그것이 불편하여 점차 부드러운 짐승 털로 바꾼 것이다. 앗싸.   

  그리고 붓을 뜻하는 최초의 글자는 ‘聿(붓 율)’이었다. 이 글자는 붓털과 붓대와 이를 잡은 손의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筆(붓 필)’ 자가 생긴 것은 진시황 이후의 일이다. (붓 율)에 竹(대 죽)을 얹은 것은 붓대를 대나무로 사용함에서 비롯되었다. 헌데, 지금은 ‘(붓 필)’로 쓰고 있으니, 그렇담 한자도 진화한다는 말인가.

  3세기 진()나라의 학자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蒙恬造筆(몽염조필)’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흔히 붓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나라 사람 몽염(蒙恬, ?~BC 209)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박물지>에는 그 기록이 없고, 다만 구양순(歐陽詢) <예문유취(藝文類聚)> 등의 여러 책에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허걱.

  결정적인 것은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중에는 이미 붓으로 쓴 다음 새긴 것이 있고, 또 붓으로 쓴 도기 조각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몽염에 의한 붓의 발명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런데 붓털은 무엇으로 만드는가. 붓털은 주로 동물의 털을 사용하고, 드물게는 수염을 이용하기도 한다. 붓털로 사용되는 동물은 양·말·개·닭·사슴·여우·이리·담비·토끼·호랑이·멧돼지·살쾡이·족제비 등 매우 다양하다. 같은 동물의 털이라도 채취 시기와 신체 부위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

  붓대는 대부분 죽관(竹管)을 사용하지만 금관(金管), 은관(銀管), 상관(象管), 도자관(陶瓷管) 등도 있다.

  붓은 호()의 굵기에 따라 극대필(極大筆)로부터 쥐 수염 너덧 개로 만든 미세필(微細筆)까지 종류가 많다. 호의 길이에 따라 서는 장봉(長鋒), 중봉(中鋒), 단봉(短鋒)으로 나누어진다. 호의 강한 정도에 따라서는 강호(剛毫), 겸호(兼毫), 유호(柔毫)로 나눌 수 있는데, 겸호는 강한 털과 부드러운 털의 두 가지 이상의 털을 섞어 만든 것이다.

  좋은 붓은 네 가지 덕()을 갖춘 것이라야 한다. 즉 첨(), (), (), ()을 말하는데 첨()이란 붓끝이 날카롭고 흩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며, ()란 굽은 털이 없이 가지런히 정돈된 것을 말하며, ()이란 보기에 원만한 모양을 지니고 회전이 잘 되는 것을 말하며, ()이란 충실한 획이 꾸준히 그어지며 붓의 수명도 긴 것을 의미한다. 덧붙여 붓대는 너무 크지 않은 것이 좋으며 각자가 잡기에 편하면 좋다.

  붓의 선택과 손질 역시 매우 중요하다. 붓을 고를 때는 털을 넓혀 봐서 붓끝이 가지런하고 털끝이 투명한 부분이 많은 것이 질이 좋은 것이다. 붓을 처음 사용할 때는 따뜻한 물에 담가서 풀기를 충분히 뺀 후에 먹을 찍어 써야 한다. 다 쓰고 난 뒤에는 호가 뒤틀리거나 썩지 않게 잘 빨아서 남은 먹물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빤 붓을 화선지 위에 걸쳐놓고 말려도 좋다. 이때 아름다운 붓꽃이 탄생한다.

  필가묵무(筆歌墨舞)란 말이 있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라는 뜻으로 자유자재로 글씨를 쓸 수 있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먹이 없으면 붓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붓은 언제나 먹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붓이 없으면 먹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먹물은 언제나 붓의 피가 되어 붓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 한다. 붓과 먹의 관계는 활과 화살의 관계와 같다. 필묵(筆墨) 모임은 붓과 먹을 사랑하는 모임이라기보다 필()과 묵()처럼 상생(相生)과 공존(共存)의 만남이다. 궁시(弓矢)도 마찬가지이다. 

  봄이 온다. 나무에 물이 오르듯이, 붓에는 먹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붓과 먹물의 만남처럼 긴밀한 접촉이 없이는 어떠한 창작도 인간적 접촉도 기대할 수 없다. 

  순간 인수봉이 붓으로 다가온다. 하늘은 화선지가 되고, 구름은 글씨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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