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칼럼 56-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붙여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붙여

 

도정 권상호

  검은 겨울이 가고 푸른 봄이 왔다. 싱그러운 봄기운에 유별스레 설치다가, 봄나물에 점심밥 썩썩 비벼 먹고 나면, 순간 까무룩 찾아오는 쪽잠 맛.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봄의 선물이다. 봄바람이 살랑 고개 넘어 불어오자 봄비도 살갑게 내리고, 봄 햇살이 고샅길을 간질이면 산천의 초목들은 주체할 수 없이 싹을 토해 낸다.

  봄 입김에 새들은 둥지 틀기에 부산하고, 춘기(春氣)를 이기지 못하는 인간들도 어두침침한 방을 박차고 나가 봄나들이 나선다. 땅속의 벌레들이 부스스 겨울잠에서 깨어나자 산과 들도 자신의 누드에 화들짝 놀란 듯이 부드러운 감촉의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꽃샘추위가 그래도 두려워 몰래 발돋움하며 피어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 등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나름의 향기를 바람 속에 실어 보내면, 벌 나비는 주체할 수 없는 유혹의 몸짓으로 집집이 방문하며 이웃의 연서(戀書)를 전달한다. 그러면 꽃들은 갈 길 어두울세라 꽃등 밝히고 조그마한 꿀 종지를 선물로 싸 보낸다.

 

  봄에 어울리는 짝은 아무래도 가을이다. 그래서 춘추(春秋)렷다. 나이도 춘추요 역사도 춘추이다. 옷은 춘추복(春秋服)이요 집은 춘추관(春秋館)이로다. 볼 게 많아 봄이라면 가둘 게 많아 가을이렷다. 냉이, 달래, 쑥 등이 봄 입맛을 돋운다면, 가지, 도라지, 토란대 등은 가을 입맛을 돋운다. 바닷가에 산다면 응당 ‘봄 조개 가을 낙지’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요,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다. 그래서 혼인할 나이가 지나도록 장가들지 못하고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떠꺼머리총각을 위한 마지막 성교육 내용은 ‘봄 씹은 쇠젓가락도 자르고 가을 좆은 솥뚜껑도 뚫는다.’였다. 이크. 밑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얘기는 안 하기로 했는데……. 그리하여 봄은 ‘여자’ 또는 ‘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매춘(賣春)이라면 봄을 파는 일인데, 여기서 봄은 꽃이요, 꽃은 여성을 가리킨다. 에크.

   

  우리말에 철부지와 철든 이가 있다. 철부지는 계절을 분별하는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철든 이는 몸에 철분이 들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철을 잘 분별하여 그 계절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거둬들일 줄 아는 사람이 철든 이이다.

  오방색(五方色)으로 보면 동쪽, 곧 봄의 색깔은 ‘푸를 靑()’이다. 그래서 청춘(靑春)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나무 목()’이다. 여기의 목()은 비단 나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대표한다고 본다. , 삼라만상이 매년 한 번씩 청춘을 맞이하는 봄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북극이 내려왔는지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아니라, 오한삼온(五寒三溫)이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양춘방래(陽春方來)하니 빙해설소(氷解雪消)로다. 얼씨구, 따스한 봄이 바야흐로 오니, 얼음이 풀리고 눈이 녹는구나.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절씨구, 꽃이 봄 성에 난만하게 피어나자, 만물이 바야흐로 화창하게 돋아나누나.

 

  그런데 지난 세기에 인간의 탐욕으로 이 지구상에는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 바로 ‘핵()’이라는 재난의 꽃이다.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옛 소련(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북한의 영변 핵시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우리의 고리원전사고 은폐 논란, 이란 핵시설 공격 여부로 골몰하는 이스라엘……. 온통 지구촌의 관심사는 核() 문제이다. 핵이란 무엇인가. 군사적 의미로서 核武器(핵무기)이다. 원자 폭탄이나 수소 폭탄 따위의 핵반응으로 생기는 힘을 이용한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리킨다.

  본래 핵()이란 ‘씨’를 가리키는 아름다운 의미의 글자이다. 씨란 것은 봄에서 가을까지 빛과 물과 토양의 영양을 받아서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 정상인데, nuclear’란 핵 씨앗은 그런 과정 없이 씨앗에서 곧바로 꽃으로 피어나니 불행의 씨요, 대재앙의 꽃이다.

  씨란 식물의 열매 속에 있는, 장차 싹이 터서 새로운 개체가 될 단단한 물질을 가리킨다. 씨를 뜻하는 한자에는 ‘種(씨 종)’ ‘核(씨 핵)’ ‘氏()’등이 있다. 열매를 ‘실()’이라 하고, 그중에 무겁고 충실한 것[]을 골라 씨앗으로 삼을 것을 ‘종자(種子)’라 하며, 그 종자의 핵심(核心)을 ‘핵()’이라 한다.

  그리고 식물의 씨가 ‘種()’이라면, 사람의 씨는 ‘氏()’라 할 수 있다. 곡식이나 채소 따위의 씨만이 ‘씨’가 아니다. 김씨(金氏), 이씨(李氏)라고 할 때의 ‘-()’도 ‘씨’이다. 남편의 첩을 일러 ‘씨앗(시앗)’이라 하는데, 첩이란 씨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본 데에서 붙인 말일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는 아내와 첩을 아울러 이를 때, ‘두 씨앗’이라 한다.

  씨앗은 본래 여물고 껍질이 단단하다. 이처럼 굳은 씨앗에서 싹이 터져 나오는 모습의 글자가 十干(십간)의 첫째인 ‘甲()’이다. 땅콩, 목화, 사탕무 따위 씨앗은 껍질이 너무 단단하여 씨앗 껍질에 상처를 내고 물기가 안으로 스며들게 하여, 굳은 씨앗을 빨리 싹트게 한다.

 

  2012 3 26, 27일 양일간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ummit Seoul 2012)’가 서울에서 개최된다. 이 회의는 전 세계 50여 국가 정상 및 국제기구 수장이 참가하고, 테러집단으로부터 핵물질과 시설을 방호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안보분야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이다.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글로벌 코리아가 앞장섭니다.(Beyond Security Towards Peace)라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홍보대사 박정현 씨의 노래 Peace Song ‘그곳으로’에 풍덩 빠져 하루를 보낸다. 국제연합, 국제형사경찰기구, 국제원자력기구, 유럽연합 대표들도 참가한다.

  9·11 테러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겪으며 안보나 핵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계속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 속에 열리는 이번 핵 안보 정상회의에서는 ‘핵 테러 대응을 위한 국제적 협력 방안, 핵물질의 불법 거래방지, 원전 등 핵 관련 시설들의 방호’ 등을 주요 아젠다로 삼고 논의할 예정이란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2010 서울 G20 정상회의’를 비롯하여 경제, 문화, 스포츠 등 각 분야의 각종 국제회의 유치를 통해 선진 한국의 위상을 쌓아 왔다. 이에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사실은, 안보분야에서도 한국의 위상과 국격이 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틀간의 회의에서 ‘씨 핵()’ 없는 씨잘때기 없는 소리가 아니라, 꼭 쓸 만한 말들을 주고받아서 가시적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오동나무의 씨를 보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 장차 이 씨가 싹터서 큰 나무가 될 것이고, 그러면 베어서 가야금을 만들 생각을 하니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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