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평론> 佛緣(불연)에서 筆緣(필연)으로

佛緣(불연)에서 筆緣(필연)으로

度一(도일) 스님의 108龍 특별전시회에 부쳐

 

龍(용)은 용하다. 용은 용케도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덕행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용은 용의주도하여 여의주를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이든 뜻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

용은 깊은 연못이나 바다에서 살며, 때로는 용솟음쳐 하늘을 날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기도 한다. 

용은 용감하다. 불의를 보면 불을 뿜어 용감하게 응징하기도 한다.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 크게 좋아지면 용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나 왕을 용에 비유하기도 한다.

용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납할 줄도 알고 용서할 줄도 안다. 용납하여 인정하면 용인하는 것이다.

용의 수염처럼 탄력이 있는 나선형의 쇠줄을 龍鬚鐵(용수철)이라 한다. 물이 솟아 나오면 涌出(용출), 귀를 쫑긋 세우면 ‘솟을 聳(용)’, 발로 튀어 오르면 ‘뛸 踊(용)’이다.

용(龍)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미르’이다. ‘미’는 ‘미더덕’ ‘미나리’ ‘미리내’ 등에서 보듯이 ‘물’을 뜻한다. 여기서 ‘미리내’의 ‘미리’는 ‘미르’에서 온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銀河水(은하수)는 무수한 뭇별들이 남북으로 띠를 이루며 강물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이 마치 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용은 기린, 봉황, 거북 등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이다. 이처럼 상서로운 동물인 용을 붓으로 그리고, 氣(기)를 불어넣기 위해 108배를 3천 번 반복하고, 기도로 정진해온 분이 계시니, 바로 오봉산 석굴암 주지 度一(도일) 스님이다. 스님은 7세에 절에 들어가 佛緣(불연)을 맺고, 그 후 50여년 간 筆緣(필연)을 맺어왔다. 이전에 5차례의 전시가 있었지만 특별히 이번 전시를 위해 지필묵과 더불어 정진해 온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결과 한지 위에, 더러는 나무 위에, 더러는 항아리 위에 108神龍(신룡)으로 나타났다. 스님은 용띠 해인 甲辰年(갑진년) 새해를 맞아 그간 공을 들인 용으로 ‘108龍 특별전’을 연다. 스님의 수행의 길에는 분명한 誓願(서원)이 있다. 크게는 國運昌盛(국운창성), 萬民安樂(만민안락), 靑年傳法(청년전법) 등의 세 가지 서원이 있고, 작게는 오봉산 석굴암 重創佛事(중창불사), 衆生回向(중생회향), 與隣同樂(여린동락) 등의 세 가지 실행 서원이 있다. 스님께서는 열두 달 내내 정진해 왔으니, 여기에서 108(3x3x12)이란 숫자가 나온다. 

 

 

인류는 유목, 농경,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정보화사회를 맞이했다. AI(인공지능)와 더불어 편리하게 살아가면서도 시대 주도권을 둘러싼 세계 각국의 경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의 등장으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지만, 역병과 전쟁, 환경오염과 재난은 더 심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탐욕과 편견, 아집과 비교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度一(도일) 스님은 나눔과 배려, 봉사와 헌신을 실천해 오고 있다. 

 

서예는 작가의 정신을 으뜸으로 삼고(神彩爲上), 자형이나 획질은 그다음(形質次之)이라고 했다. 글씨보다 그 사람의 心想(심상)이나 意境(의경)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다.

지난 23년 12월 19일, 1910년 3월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遺墨)이 국내 경매에서 19억5000만 원에 낙찰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글쓴이의 됨됨이가 글씨의 가치도 결정한다는 본보기다.

 

대인의 풍모를 보여주는 안 의사의 유묵시가 있다.

五老峯爲筆(오로봉위필) 오로봉을 붓으로 삼고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삼상의 물을 연지로 삼아

靑天一丈紙(청천일장지) 푸른 하늘 한 장의 종이에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내 마음속의 시를 쓰노라.

 

人間(인간)이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의 좌표 위에서 존재하듯이, 書(서)는 작가가 살고 있는 時代性(시대성)과 現實認識(현실인식) 위에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甲辰年(갑진년) 靑龍(청룡)의 해라는 시대성과 전쟁과 재난, 역병과 저출산 등의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 치밀하게 기획하고 창작된 2주간의 비교적 긴 호흡의 전시이다. 더구나 금년은 스님의 世臘(세랍)으로 還甲(환갑)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니, 般若(반야)의 향기 속에 壽福康寧(수복강녕)을 이루리라.

 

스님은 一筆一劃(일필일획)의 인생을 살아왔고, 일도일각(一刀一刻 )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오셨다. 108龍 역시 일필일획의 정신으로 한 번의 붓질로 용 한 마리를 탄생시키고 있다. 색깔이 청색인 것은 甲辰(갑진)의 甲(갑)이 靑(청), 東方(동방), 봄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石窟庵(석굴암)을 지키고 있는 五峰(오봉)은 스님에게 언제나 붓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붓과 함께 정진하는 스님께서는 아호로 五峰(오봉)을 쓰기도 한다. 五峰(오봉)의 능선을 바라보면 용이 비상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五峰(오봉)이 하늘에 기를 불어넣으니 구름으로 피어나고, 스님의 五指(오지)가 화선지에 기를 불어넣으니 용의 기운이 묵향으로 흐른다.

 

<주역>에 이르기를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했다. <설문해자>에 이르기를 용은 ‘춘분이면 하늘에 오르고, 추분이면 연못에 잠긴다(春分而登天 秋分而潛淵)’라고 했다. 이로 보면 용은 계절적으로 농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무지개 홍(虹)’ 자는 두 마리의 용이 입을 아래로 드리우고 물을 빨아올려 물로 아치형의 문을 만드는 모습이다.

도일 스님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있다. 흔히 禪書(선서)라는 이름으로 소통이 어려운 난해한 글씨를 접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의 글씨는 전통서예의 뿌리가 깊이 스며있어 소통이 잘된다. 반야심경 10곡병 글씨나 가훈 글씨를 살펴보면 필획이 살아있고, 자형과 章法(장법)이 매우 엄정함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스님들은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初雕大藏經(초조대장경)을,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八萬大藏經(팔만대장경)을 쓰고 새겼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護國佛敎(호국불교)로서 역할이 컸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의 승병 활약을 보더라도 그렇다.

 

龍蛇飛騰(용사비등), 臥龍壯字(와룡장자), 游雲驚龍(유운경룡)하는 글씨를 살펴보면 나라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불심이 드러난다. 이번 108龍(룡) 특별전시회가 蛟龍得水(교룡득수)하듯 부처님의 加被(가피)가 넘쳐 飛龍在天(비룡재천)의 영광이 있기를 서원한다.(끝)

 

도정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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