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자료

우리 가락 우리 時調

우리 가락 우리 時調
글/ 雲谷 姜張遠

2006/05/02 20:41 - 조선닷컴에서  


예로부터 문화민족에겐 그 민족 나름의 전통문화의 한 장르로서 민족시나 정형시가 발전, 정착돼 왔습니다.
중국에는 五言律詩나 七言絶句라고 불리는 漢詩가 있고,
영국에는 소네트라고 하는 14행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화카(和歌)나 하이쿠(俳句)라는 전통 문학이 있고,
한국에는 시조라는 이름의 정형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세계는 知-情-意 라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知的방면-眞-진리추구, 지식등의 학문을
情的방면-美-종교나 문화 예술을
意的방면-善-규율 법리 도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가 상호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모든 文化藝術은 情的方面의 美意識의 發顯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遊於藝-예술에 살다 - 라고 일러 왔습니다. 예술은 예술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예술에 속한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영화, 연극, 그리고 건축물이라든가 생활전반에 걸친 디자인등으로 엮어진 구조적 예술환경 속에 묻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조의 완성을 선의 일생과 비교하건대 도를 닦는 선승이 도를 깨치고 나면 大自由人이 된다고 합니다. 그 大自由라는 것이 계율을 범하거나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사미승으로서 지켜야할 사미10계와 비구계를 받으므로서 지켜야할 비구 50계 등 훼범하지 않아야할 계율이 많을수록 힘이 들 터인데 지계안에서 한점 불편함이라던가 자신이 부자유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無碍行을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깨달은 자의 대자유란- 호풍환우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도리를 깨닫는 것으로서 道通이라 부릅니다.

道通 - 즉 길을 通했다는 것이지요. 글씨를 공부하는 서예가의 경우엔 書通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경우는 畵通 이라합니다. 문학에서의 文通은 그 자체가 道通으로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대 문호의 작품을 보면 철학의 완성으로 귀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선승들이 한 소식을 얻으면 시인이 됩니다. 한 소식- 悟道의 경지에 이르면 悟道頌이라는 글을 짓게 되는데 몇년전에 열반에 드신 [전강선사]라는 스님은 어려서 조실 부모하고 여러 경로를 거쳐 스님이 되어 젊은 나이에 悟道에 이른 분입니다. 이 스님께서 지으신 悟道頌을 살펴 봅니다.

昨夜三更月滿樓 작야삼경 월만루
古家窓外蘆花秋 고가창외 로화추
佛祖高德喪神命 불조고덕 상신명
潺潺流水過橋來 잔잔유수 과교래

어젯밤 삼경에 달빛은 누각에 가득하더니
고가의 창밖엔 갈대꽃 만발한 가을이로구나
부처와 조사의 높은 덕행도 여기서는 신명을 잃었는데
다리아래 잔잔히 흐르는 물은 다겁을 지나오는구나
(田岡禪師1898-1975)

전강선사는 일제하에 국민학교도 2년인가 다니는 둥 마는 둥-부모님이 역병으로 돌아가시는 불운속에 먹을 것이 없어서 여러끼니를 굶게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배가 고파 기진한 어린동생에게 밥을 얻어먹이기 위해 친척집으로 업고 가던중 그의 어린 동생은 그의 등에 업힌체로 죽어갔습니다. 

전강선사께서는 노경에도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불쌍한 동생을 못내 그리워하며 슬퍼했습니다. 자신이 일찍 서두르지 못해 죽었다고 자책까지 하곤 했습니다. 그런 불행한 삶을 영위했던 전강선사에게 스님이 되는 것은 먹을 것을 해결하는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전강선사가 언제 시 공부를 했겠습니까만 전강선사의 오도송이 지금도 선객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는 것은 철학이 깃든 높은 문학성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시를 쓴다는 것은 철학으로 연결되었을 때 훌륭한 문학으로 남는 것이며 철학의 완성으로 남는 것입니다.
흔히 어려운 글일지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문리를 깨치게 된다고 말하듯이 시조도 역시 3434 3434 3543 이라는 평시조의 규격에서 얼마던지 자유스럽게 부르고 싶은 내면의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시조는 어떤 예술일까요?
우리시조의 발생은 800년 이상 면면히 그 맥을 이어왔습니다만 시조문학의 기나긴 역사에 비해 아직까지 장편 서사시조 한 편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의 크나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조란 그림이며 음악입니다. 이것을 얘기하려면 시조가 시조창으로 불리어진 연유를 살펴 봐야합니다.


고려시대부터 불리어져 온 시조는 문인사대부- 선비들의 몫으로 조선조에선 문재에 뛰어난 기생들에 의하여 많이 불리어지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사료를 통하여 흔히 접할 수가 있습니다. 선비들의 시회에는 당연히 그 지방의 기생들이 불려와 참석했을 것이고보면 문재에 뛰어난 기생들은 즉석에서 한수의 시조로 화답하는 풍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문학사에 시선으로 기록된 당나라의 이백은 술을 좋아했습니다.
이테백의 글을 보면 술과 달이 많이 나오는데 오죽하면 우리네 민요가사에서 조차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달 아래에서 시를 읊는 풍류에는 술이 있었고 술이 있는곳엔 여인이 따라오기 마련이라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문인사대부들간의 시회에는 음률에 능한 기생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풍류에 능통한 기생들에 의해서 거문고와 대금의 합주로 시조창이 불리어져 시회에 더욱 흥을 북돋았을 것으로 짐작하건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풍류기생들에 의해 불리어진 시조창은 그렇다치고 그러면 어찌해서 문인 사대부들간에 시조창이 불리어 졌을까요?

옛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여섯가지 덕목이 있었으니 -禮-樂-射-御-書-數-입니다.


이 여섯가지 덕목중 악(樂)이라는 것은 음률을 의미하는데 선비들은 악기중에 현악기로서 거문고와 관악기로서 단소나 대금을 즐겨 연주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시조는 관현악기와 더불어 합주를 즐겨 해왔는데 요즘 여러 문인들의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문단의 심포지움이라느니 하는 행사에 시낭송을 즐겨하듯이 시조는 즉석에서 지어 시조창으로 불려지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조창이 시조시 발상의 도출에 원용된다는 것은 우리의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조창도 우리 민족의 조용하고 은은한 민족성의 소리인 것입니다.

시조의 음률에 대해서는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는 정확한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나 궁중에서 연주되던 아악중에서 불려졌던 정악이라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사료되어집니다.

우리 민족시인 시조는 초·중·종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초장이 3, 4, 3, 4,
중장도 3, 4, 3, 4, 인데
종장만이 유독 3, 5, 4, 3으로 자수의 변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시의 5언이나 7언, 일본의 화카(和歌)·하이쿠(俳句)가 모두 자수의 배열에 있어서 한 자의 가감이나 어떠한 변용도 용납이 안되는데 반해, 우리 시조는 초장, 중장에 있어서도 자수의 가감이 가능할뿐 아니라, 종장에 와서는 물굽이가 한 바퀴 감았다가 다시 풀어져 흐르는 듯하는 변용(3, 5, 4, 3)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3 4 3 4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없네
3 4 3 4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3 5 4 3

이 시조는 고려 공민왕의 신하로서 정몽주등에게 성리학을 공부하여 1386년 문과에 급제-성균관학정 벼슬에 올랐던 吉 再(길재)의 시조입니다. 조선조의 이방원이 태자가 되어 태상박사직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출사하지 않았던 그가 망해버린 고려왕실의 궁터를 찾아 읊은 세월무상의 시조로서 그 기본율에 맞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율에서 벗어나 더 휘청거리는 멋이 있는 작품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3 4 3(4) 4
만중운산에 어내 님 오리마난
3(2) 4(3) 3 4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3 5 4 3

조선조 성종(20) 명종(1)(1489~1546)년간에 도학으로 유명했던 서경덕 徐敬德(花潭)선생의 시조입니다.서화담이 그에게 글 배우던 황진이를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시조란 틀에 박힌 듯 하면서도 박히질 않고, 또 자유분방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경우이든 내재율만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느만큼 자수의 가감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파격(자수가 많으면)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라 믿습니다. 다만 글자를 규격화된 자수에 억지로 맞추는 어리석은 시문이야말로 가장 함축되고 생략되어 단순해야 할 시어를 손상시키는 것으로써 시를 시답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자수만 맞았다고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시조에 있어서 허락될 수 있는 자수의 테두리는 얼마만큼의 것인가?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歲月<이희승>

꽃피듯 다가와서 잎이지듯 가는 세월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책장을 넘기듯이 겹겹이 쌓이는 세월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부피도 있을법 하다만 두깨조차 없구나
3(부동) 5(7자까지 가능 ) 4(5자까지 가능) 3(4자까지 가능)

이것을 풀이한다면 초·중·중장의 전후귀가 3, 4자로 합하면 7자인데, 9자까지가 가능하고 (예컨대 3, 4도 좋고 3, 5도 좋고 3, 6도 좋고, 2, 7이나 4, 5도 좋고), 종장 3, 5, 4, 3의 첫 3자는 부동이나 5자는 7자까지, 4자는 5자까지, 3자는 4자까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변용된 작품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수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내재율을 잘 살려 낸 작품으로
이호우 선생의 <聽秋(청추)>라는 작품의 첫 수입니다.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싫단 말 다신 않을래
3 4(6) 3 4(5)
이밤도 또 밤새워 우는 저 가을 벌레들 소리
3 4(6) 3 4(5)
더구나 우수수 잎들이 지면 어이 견딜 까본가.
3 5(8) 4 3

파격이 전혀 없는 천의무봉한 가락으로 이와같이 우리 시조가 얼마나 멋이 있으며, 부자유한 듯하나 기실은 자유롭고, 또 분방한 듯하나 아주 잘 정제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조가 지닌 여유입니다.


청산도 절로절로
3 4
녹수도 절로절로
3 4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3(5) 4(5)
산수간에 나도 절로절로
3(4) 4(6)
그중에
3
절로절로 자란 몸이
5(8)
늙기도 절로절로
4(3) 3(4)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산절로 수절로 라는 시조입니다. 이렇게 틀에 박힌 듯 하면서도 박히질 않고, 또 자유분방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인 것입니다.

또한 시조는 현장에서 바로 시흥에 접신되어 울어나오는 문학입니다. 즉흥시조가 얼마나 멋진 지 고시조 중의 외설시조로 소개하겠습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을 지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선조때 강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였습니다. 松江 鄭澈이 강계의 이름없는 기생 眞玉과 주고 받은 격조가 높은 진한 외설시조가 그것입니다.

귀양살이하는 정철 선생이 달 밝은 밤 적막한 처소에서 혼자 취해 누워 있는데 오동잎 지는 소리는 스산하고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그를 더욱 쓸쓸하게 하였습니다. 밖에서 나즈막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송강은 누운 채로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대답 대신 문이 스르르 열리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들어섰습니다. 달밤에 보는 지붕위의 한 송이 박꽃처럼 여인은 너무나 고왔습니다. 그가 바로 기생 眞玉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 하고 앉은 그날밤, 송강 선생께서 은근한 음성으로 진옥에게 말했습니다.
"진옥아. 내가 시조 한 首를 읊을테니 그대는 이 노래에 화답을 하겠는가?"
"예, 그리하지요."
기생 진옥의 가야금 반주에 맞춰 송강 정철 선생께서는 목청을 가다듬어 한가락의 시조창을 읊펐습니다.

玉이 玉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뚜러볼가 하노라

이 시조를 요즈음의 말로 풀이하면 대충 이렇습니다. "옥이라 옥이라 하기에 번옥(가짜 옥 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참옥(眞玉)임이 분명하구나.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여기서 살송곳이란 남성의 심볼을 의미)

송강의 시조 창이 끝나자 지체 없이 진옥이 받았습니다.

鐵이 鐵이라커늘 섭철(섭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正鐵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뇌겨볼가 하노라

"쇠라 쇠라 하기에 순수하지 못한 섭철(잡다한 쇳가루가 섞인 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정철(正鐵·松江은 鄭澈임)임에 틀림 없구나.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그 쇠를 녹여볼까 하노라" (골풀무란 쇠를 달구는 대장간의 풀무로서 여기서는 여자의 심볼을 의미)

그날밤 이 시조를 촉매제로 하여 송강과 진옥은 아름다운 사랑의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렇듯 탁월한 메타포적 수법으로 남자의 상징을 [살송곳]으로 비유한 송강의 기지나, 여자의 상징을 남자의 그것을 녹여내는 [골풀무]로 비유한 기생 진옥의 수법은 참으로 훌륭한 작품으로 요즘 유행하는 Y담처럼 깊이가 없고 직접적인 표현의 음담패설과는 너무나 수준의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한 시인이 어느 노시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옛날에는 이론이나 평론이니 하는 것이 없었어도 곧잘 불후의 명작들이 나왔는데 요즘은 그 요란스런 평론이니 무슨 주의이니 하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렇지 못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시인 왈
"옛날 시객이나 문객들은 붓만 들면 붓 끝에 그 [흥]이라는 게 따라왔지만 지금 시인들은 [흥]이라는 것에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더랍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시의 기능공은 많아도 시의 장인(匠人)은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시(時調)가 무엇입니까?
그림입니다. 詩中有畵요 畵中有詩라 했습니다. 시가 곧 그림이며 그림이 곧 시라는 뜻입니다. 詩中畵 畵中詩 그 이전애 書畵同源이라 했습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서 시작 된 것이 글과 그림입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산천경계가 펼쳐지면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글로도 표현합니다.

훌륭한 그림을 보고는 거기에 맞는 시를 쓰고 싶어하고
훌륭한 시를 읽고 나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詩中有畵요 畵中有詩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글자라는 것- 이것이 인간의 마음을 전달하는 촉매재로써 만능한 것입니까?

언어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언어를 글자로 표기한 것이 문장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습니다.

아울러 언어를 글자로 표기한다는 것 또한 어려운데 하물며 마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뜻글일 지라도 표현의 한계가 있고 더더욱 소리글은 의성이나 의태는 표현이 수월할지라도 인간의 복잡한 감정의 표현은 어렵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감탄하는 방법이 개개인이 다 다릅니다.
[---아- 어- 오- 우- 으- 음- 엉?- 햐- 햐- 호- 후우- 허어- 와- 와우----]
등등의 여러 가지 표현방법이 있습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이, 그림을 그리는 이. 노래를 불러 보이는 이 등등 어느 것 하나 표현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이 여러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입니다.

 

슬픔이나 기쁨, 혹은 행복한 상황을 표현했을 때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은 실패한 것입니다.
흥에 겨워 노래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시조를 쓰는 우리는 문자라는 촉매를 통하여 흥과 접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흥이 없는 시조는 글자의 나열이며 낱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조란 함축된 마음의 표현 언어입니다.

 

그 시인의 철학과 사고- 그리고 가치관 등등과 美的 感性의 發顯이 곧 시(時調)입니다.

시조가 그 [흥]에 접신하여 그 [흥]을 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조라는 문학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문학이 있는 우리의 예술적 일상 생활이 더욱 행복해 질 것입니다.

 

시조(時調)는 우리의 일상중에 살아있는
음악이며
미술이며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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