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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上下)․경향(京鄕)을 아우른 순백(純白)의 휴머니스트, 달문(達文)
서울여대 차충환
1.
달문이라고 하면 생소할지 모르겠다. 연암의 <광문자전>, <서광문전후>에 나오는 광문이 바로 달문이다. 연암 자신도 <광문자전>에서 달문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임을 밝히고 있다. 달문의 이름과 행적은 <영조실록>이나 <추안급국안>과 같은 공식 기록물뿐만 아니라 홍신유(1724-?)의 <달문가>, 이규상(1727-1799)의 <달문> 등과 같은 수종의 달문 전승에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연암만 달문이 아니라 광문으로 쓰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달문은 역모 사건에 얽혀 고초를 당한 바 있는데, 그 사건의 주동자는 달손이란 이름을 가지고 달문의 동생으로 사칭했다. 연암은 달손도 <서광문전후>에서 광손으로 쓰고 있다. 연암이 왜 달을 광으로 바꿨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정부의 공식 기록물에서도 달문으로 쓰고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광문의 본명은 달문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암의 글을 보면 달문은 종로바닥의 거지였다. 거지였으니 행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입어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로 생김새도 추했다. 그러면서도 신의가 있고 의로운 행실을 보여 윗사람에게도 사람 대접을 받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역모 사건에 휘말려 임금 앞에서 태장을 맞고 국문을 당하기도 한 인물이다. 국문을 당했다고 하면 주동자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거지패들이 일단의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패두를 따라다니며 작패를 부릴 수는 있었겠으나, 역모와 관련된 사건을 주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달문 역시 실제로 역모를 주동했던 것은 아니다. 무고하게 얽혀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국문의 현장에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분명 이채롭다. 또 달문은 남쪽으로 전라도 순천에도 발길을 했고 북쪽으로는 백두산에까지 갔다 온 인물이다. 이 외에도 달문의 행적은 많다. 그러나 종로바닥의 거지 출신이 역모 사건에 휘말리고 국토의 남북을 종단했다는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달문을 주목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달문의 그와 같은 기이하면서도 이채로운 행적을 중심으로 글을 썼던 것이다. 물론 달문의 기이한 행적만이 주목의 근거는 아니다. 종종 달문의 의로움, 신의 등에 초점이 모아진 글도 있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하잘것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의로운 일과 이채로운 행위를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천착하기보다는, 대개 행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힘써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달문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달문을 통해 한 고독한 예외인의 실존적 내면을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달문을 조선후기의 뚜렷한 흔적으로 부상시키고자 한다.
2. 달문은 누구인가.
달문의 행적을 담고 있는 기록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공식기록물
∙ 推案及鞫案 권 22.
∙ 왕조실록 권 44, 영조 40, 10월.
▪ 개인기록물
∙ 洪愼猷(1724-?), 白華子集, <達文歌>
∙ 李奎象(1727-1799), 幷世才彦錄, <達文>
∙ 朴趾源(1737-1805), 放璚閣外傳, <廣文者傳>, <書廣文傳後>
∙ 李鈺(1760-1812), 潭庭叢書, <桃花流水館小藁>
∙ 趙秀三(1762-1849), 秋齋集, 秋齋紀異, <達文>
∙ 劉在建(1793-1880), 里鄕見聞錄, <李達文>
∙ 李源命(1807-1887), 東野彙輯, <雲妓家廣文觀舞>
∙ 破睡錄
이 중에서 유재건의 <이달문>은 조수삼의 <달문>을 작품 말미의 시를 빼고 전재한 것이고, 이원명의 글은 연암의 <광문자전>을 축약한 것이기 때문에 둘 다 가치가 없다. 또 왕조실록의 기록은 <추안급국안>의 내용 중 공초의 결과만을 요약한 것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와 반대로 <추안급국안>, <달문가>, <광문자전>, <서광문전후>는 달문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추안급국안>은 조선시대 변란, 역모, 당쟁, 괘서 등에 관련된 중죄인의 공초를 기록한 책이다. 1601년(선조34)-1892년(고종29) 간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달문은 어찌하여 이 범죄 기록에 등장하고 있는가?
국문 기록을 보면, 李太丁이란 자가 중이나 노비, 점쟁이 등 일단의 무리를 모아 역모를 꾀했는데, 그 무리에 가담했던 者斤萬이란 자가 경상감사 鄭存謙에게 밀고함으로써 발각이 된다. 이에 정감사는 가담한 무리들을 체포하여 모두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여기에 달문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영조가 친림한 가운데 1764년 4월 17일부터 일일이 국문을 당하게 된다. 대상자는 이태정을 포함하여 총 11명이었는데, 주동자 이태정은 주살되고 者斤萬, 李尙黙, 달문은 정배를 당하며 나머지는 모두 방송된다. 이때 달문은 두 차례의 형문을 당하는 동안 60대의 태장을 맞았다. 공초 기록에 의하면, 달문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연루되었다. 이태정이란 자가 달문의 유명세를 활용하고자 달문의 동생 달손으로 사칭하고 다녔기 때문에 얽혀든 것이었다. 국문을 통해 달문의 이러한 처지가 대체로 인정되어, 달문은 鏡城(지금의 함북)으로 정배를 당한다.
죄인 달문은 나이가 58세인데, 우주의 사이에 금수도 각자 짝이 있고 집이 있거늘 너는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직 배필도 없이 팔방을 돌아다니며 정처가 없느냐? 저는 7년 동안에 세 번이나 상을 당했기 때문에 장가를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쪽 친척은 있으나 아버지쪽 친척은 20촌 안에는 없습니다. 저는 길에서 걸식을 했지만 역적의 무리와는 수작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하향한 지 이미 7년이 지났지만 양반과 서로 친하게 지낸 적은 없으며 길에서 걸식하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비록 장가를 가려 해도 수중에 돈이 없기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만약 석방하여 주신다면 내일이라도 장가를 가서 마누라를 얻겠습니다. 저는 선심으로 사환의 일을 했기 때문에 常漢들이 혹 접대를 해주어서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족보는 조부가 살아계실 때 불에 타버렸는데 조모가 말해 주셔서 알았습니다. 저는 5년 동안 다리에 병이 나서 혹 남에게 전염될까봐 밖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본 사람도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심문 중에 나온 달문의 답변이다. 1764년 현재 58세이니, 달문은 1707년생이다. 그리고 영남으로 하향했다고 한 것을 보면 고향은 영남의 어느 곳인 것 같고, 7년 전인 1757년에 하향했다. 하향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7년 동안 세 번의 상을 당한 것으로 봐서 가족의 상을 계기로 하향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주된 생활은 걸식이었다. 족보가 있었다는 말로 볼 때, 애초의 출신성분은 그리 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초 기록에는 달문이 국족으로서 영남에 유명했다는 말도 나온다. 이로서 달문의 성명은 이달문임을 알 수 있다. 홍신유도 <달문가>에서 달문을 안평대군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연암은 <서광문전후>에서 ‘광문은 제 자신의 성도 모를뿐더러 평생 독신으로 형제나 처첩이 아예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달문이 자신의 신변을 주변인들에게 말하지 않고 스스로 고아임을 자처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조수삼은 <달문>에서 달문이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고 했다.
<서광문전후>에 의하면, 연암은 18세 때에 겸인들로부터 달문의 이야기를 듣고 <광문자전>을 썼다. 그러면서 연암 자신도 어렸을 적에 달문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연암이 18세면 1754년이다. 연암은 이어서 “당시 광문은 남으로 전라도, 경상도의 여러 고을로 다니며 놀았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소문이 높았다. 그 후 다시 서울에 들르지 않은 것이 수십년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연암은 그 수십년의 부재 기간을 역모 연루 사건으로 채워 넣고 있다. 연암의 기록은 이렇다.
경북 개녕의 수다사 절밥을 얻어먹고 있던 한 거지 아이가 달문을 호평하는 중들의 말을 몰래 듣고 달문의 아들로 사칭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지낸다. 이때 영남의 한 요망한 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수다사의 거지 아이의 행실을 알고, 아이에게 자신을 작은 아버지라고 불러준다면 부귀를 같이 할 것이라고 꾄다.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달문의 동생 달손으로 사칭한다. 그러나 일이 곧 발각되어 달문과 함께 모두들 붙잡히게 되는데 서로 대질해서 심문해 보니 서로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이에 그 요망한 자는 죽음을 당했고 거지 아이는 귀양을 갔다.
그런데 연암의 이 기록은 <추안급국안>의 공초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음은 <추안급국안>에 기록된바 역모 주모자 이태정의 진술이다.
저의 아버님은 역적으로 죄를 받은 자로 성은 이이고 이름은 上字는 夏, 下字는 定이라고도 하고 徵이라고도 합니다.---금년에 者斤萬을 개녕 水多寺에서 만났는데 그가 달문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또한 달문의 동생인 달손이라 칭하여 숙질로서 정의가 서로 좋았습니다. 때문에 수작할 때에 과연 흉측한 이야기를 자근만에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연암의 기록 중 수다사의 거지 아이는 자근만이고 요망한 자는 이태정임을 알 수 있다. <추안급국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선조34-고종29까지의 기록이므로, 이 자체는 고종29년 이후에 완성된 책이다. 따라서 연암이 이 책을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선조34년 이후의 방대한 공초 기록들이 누적적으로 필사되었을 것이므로, 연암이 중간에 얻어봤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국문이 서울에서 영조의 친림 아래 행해졌기 때문에, 당시 서울에 살았던 연암이 국문 자체를 목격했거나 아니면 관여자로부터 소문으로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앞서 언급한 대로 <추안급국안>에는 달문이 정배에 처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배지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풀려났는지는 알 수 없다. 역모 연루 사건 이후의 달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달문가>와 <서광문전후>에만 나타나는데, <달문가>에는 달문이 귀양을 갔다가 이내 풀려났다고 되어 있고, <서광문전후>에는 놓여난(得出)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달문가>에서 홍신유는 “앙상한 머리에 전립을 쓰고 비쩍 마른 몰골에 누더기 걸쳤으며 세파 풍상 겪은 나머지에 기특했던 기운 사그라졌구나. 어느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려 종적 구름처럼 찾을 수 없네.”라고 표현함으로써 달문의 마지막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으나, 연암은 달문과 표철주의 대화를 장황하게 기록함으로써 달문의 만년을 비교적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는 한 시대를 그야말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살다 간 달문의 삶이 집약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소한 58세에 이른 늘그막의 달문은 그 형용이 연암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광문은 빠진 머리를 아직도 땋고 있어 쥐꼬리 같이 보였다. 이빨이 빠져 입도 합죽해져서 이제는 주먹을 입안에 넣지 못했다.”
달문은 표철주를 만나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주고받은 뒤 바로 영성군과 풍원군의 안부를 묻는다. 표철주는 영성군, 풍원군 모두 죽었다고 대답한다. 영성군은 박문수이고 풍원군은 조현명이다. 둘 다 영조 때의 소론 명신들로서, 영성군은 1756년이 몰년이고 풍원군은 1752년이 몰년이다. 달문이 이들의 죽음을 몰랐다는 것은 달문이 1752년 이전에 이미 서울을 떠났음을 말해준다. 앞서 인용한 공초 기록에서 본 바와 같이, 달문이 1757년에 영남으로 하향했다고 했으니, 그 사이 5,6년 동안에는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주유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연암은 달문이 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언급은 홍신유도 했고, 이규상도 “나이가 늙어서는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영남으로 내려가 여관에 고용되어 있다고도 한다.”라고 하고 있어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조수삼은 달문에 대하여 특이한 행적을 남기고 있다. 영조 때에, 집이 가난해 관례와 혼례를 치르지 못한 백성들에게 나라에서 비용을 대어 예를 치르도록 했는데, 달문도 이때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그막에 영남 땅으로 내려가 집의 자식들을 모아 장사를 시키며 살았고, 서울 사람을 볼 때마다 흐느끼면서 혼인을 치루어준 나라의 은덕을 이야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영조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관례, 혼례를 치르도록 해준 것은 영조 33년(1768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1768년이면 달문의 나이가 62세인데, 과연 이때 혼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앞서 인용한 공초 기록에서 달문은 석방만 시켜준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장가를 가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늘그막까지 혼례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달문이 62세 때 조수삼은 7살이었다. 추재기이의 서문을 보면 조수삼은 총기가 매우 뛰어나 6,7세 때 이미 경사자집을 외었다고 한다. 또 70이상의 노인들 틈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갑이 넘은 늘그막에 어릴 때부터 메모해 둔 것과 기억나는 것을 참고하여 추재기이를 엮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조수삼이 지은 <달문>은 이 추재기이에 실려 있다.
일단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젊은 날의 행적을 제외한 달문의 생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달문은 1707년생으로서 영남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성명은 이달문이며 애초에는 그리 천하지도 않았고 또 가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원군이 죽은 1752년 이전에 서울을 떠났다. 연암이 어렸을 때에 달문을 직접 봤다고 했는데, <광문자전>을 지은 18세 때가 1754년이니 아마도 연암은 13,4세 무렵에 달문을 본 것으로 보인다. 달문은 51세 때인 1757년에 영남으로 하향했다. 그후 7년 동안 상을 세 번이나 치르고 걸식을 하면서 살다가 58세 때인 1764년에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62세에 장가를 들었을 수 있다.
3. 젊은 날의 달문
홍신유에 의하면 달문은 안평대군의 자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상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한다. 그런 달문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거지 노릇을 한 연유는 전혀 알 수 없다.
달문 관련 자료는 달문의 생애를 거지에서 출발시키고 있다. 이규상의 <달문>과 연암의 <광문자전>에서 달문은 종로바닥의 거지였다. 그러다가 뭇 거지들의 추대를 받아 패두가 되었는데, 아마도 달문이 나이가 많았거나 거지들 중에서도 남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달문이 돌보던 병든 거지 하나가 그만 죽게 되었다. 한기가 나고 전신을 떨며 신음했다고 하니, 아마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심한 감기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이가 곧 죽게 되자 달문은 직접 밥을 빌어 왔다. 그러나 먹이려고 하다 보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달문은 무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다른 거지들이 달문이 그 아이를 죽였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쫓겨난 달문은 동네의 어느 집에 의탁했고, 집주인은 다음날 달문이 수표교 아래에 버려진 그 아이를 손수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묻어주는 모습을 보고 의롭게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달문을 약국의 부자에게 추천하여 점원이 되게 했다. 이것이 달문이 거지 노릇을 하다가 거지 아닌 다른 사람과 조우하게 된 첫걸음이다.
나는 1970년대 초반인 초등학생 이전과 초등학생 전반기 시절에, 농촌 시골에 살면서 거지들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거지들은 사시사철 아침이면 우리 집으로 밥을 빌러 왔고, 우리 어머니는 으레 하는 말로 왜 또 왔냐며 한마디 하고는 있는 대로 바가지에 넣어주고 내일은 오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거지는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왔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 어머니는 또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없이 살던 시절에 그냥 박절하게 내쳐도 될 것인데, 올 때마다 큰 불평 없이 선뜻 내어주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할머니 등 다른 가족들도 거지들을 유다르게 홀대하지 않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구걸이 끝나면 거지들은 동네 어귀의 다리 밑에서 대개 잠을 잤다. 지금이야 시멘트로 만든 신식 다리지만, 그때만 해도 홍수가 한번 나면 흔적 없이 쓸려 내려가고 마는 나무 다리였는데, 그 밑에서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를 치우고 대충 기거하며 살았다. 겨울에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낡은 천조각들로 몸을 둘둘 말고 돌아다녔다. 특히 여름이면 냇물, 냇가가 우리들의 놀이공간이었는데, 그때는 거지들과 같이 놀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대개 나이가 제법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이 거지들이었기 때문에 막말로 대하고 막말로 놀리던 일이 예사였다. 그러다보면 안면도 익숙하게 되었다. 간혹 생전 처음 보는 거지가 나타나 끼어들기도 하고, 그동안 있었던 거지가 없어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없어진 거지는 아마도 죽었던 것 같다. 그들이 죽은 동료 거지를 어떻게 처치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어른들 말로는 물에 떠내려 보내거나 인적이 드문 풀숲 같은 데 버렸다고 한다. 이렇듯, 내가 접한 거지들은 농촌 시골의 거지였다.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지도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다. 거지들이 마을에서 말썽을 일으켜 소동이 일어난 경우는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 거지들이 대개 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지들은 시골에도 있고 도시에도 있다. 그리고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내가 현재 사는 동네에도 거지 한 명이 있다. 그러나 이 거지는 구걸을 하지 않는다. 동네 주민들이 먼저 밥을 갖다 주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경험으로 안 거지는 1970년대 초반의 시골 거지와 이 시대의 도시 거지다. 따라서 나는 옛날의 도시 거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1930년대의 종로 거지를 본 것밖에 없다. 그러나 옛날의 도시 거지들의 삶을 보여주는 자료는 매우 많다. 그 중에서 성대중(1732-1812)이 남긴 <개수전>은 단연 압권이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서울 도성 안에 거지들이 언제나 수백명 들끓었다. 거지들은 그들의 법대로 한 명의 두목을 뽑아 꼭지딴(丐帥)을 삼았다.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행동을 꼭지딴의 지시를 따라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거지들이 아침저녁 빌어온 것으로 정성껏 받들어 꼭지딴은 기거 음식이 편안했다.
이처럼 수백 명의 거지들을 개수 한 명이 일사불란하게 통솔하였던 것이다. 서울 도성 안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종로거리가 아닌가 한다. 개수란 바로 패두를 가리키는데, 이 개수는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듯하다. 내용을 좀 더 보자.
경진년(1760년)에 대풍이 들어 영조는 널리 영을 내려 잔치를 열고 즐기게 했다. 이때 용호영의 풍악이 오영 중에서도 제일이었는데, 용호영 악단의 패두는 이씨였다. 이패두는 거문고, 젓대, 피리, 장고 등의 전문가와 여러 기생들을 거느리고 대감들의 연회에 불려가 풍악을 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거지가 와서 다음과 같이 청한다.
“거지의 두목 아무가 패두님에게 청하는 말씀이오. 나라의 명으로 만민이 함께 즐기는 이런 좋은 시절에 소인네들은 비록 거지이오나 그래도 나라의 백성이라 아무 날에 거지들이 모두 모여 鍊戎臺에서 잔치를 벌이려 하오매 감히 패두님께 수고로움을 끼쳐 풍악으로 흥취를 돋우고자 하옵니다. 소인 또한 그 덕을 잊지 아니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이패두는 ‘음악이 아무리 천한들 거지까지 나를 부리려 하다니’라고 하면서 화가 상투 꼭대기까지 올라서 분통을 터뜨리며 그 거지를 내쫓았다. 그러나 거지는 실실 웃으면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조금 있으니, 패두 집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사납게 들려왔다. 내다보니 온통 해진 옷에 체구가 장대한 사나이였다. 개수였다. 눈을 부릅뜨고 이패두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패두님, 이마에 구리를 깔았수? 집은 물로 지었수? 우리 떼거지 수백명이 장안에 흩어져 있어 포도청 순라군도 어쩌지 못하는 줄 모르오? 몽둥이 하나 횃불 하나면 족합니다. 패두가 능히 무사하실 듯 싶소. 우리를 이다지 업수이 여긴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이패두는 지체없이 청을 받아들였다. 개수는 “내일 조반을 드신 후에 패두님이 기생 아무아무와 악공 아무아무들을 거느리고 총융청 앞 계단에 크게 풍악을 차려 주오. 언약을 어기지 말기로 합시다.”라고 말하면서 이패두를 한번 더 뚫어져라 바라보고 가 버렸다.
또 잔치에서 기생들이 개수의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지 못하자 이패두는 눈짓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서라, 이년들, 웃지 마라. 저 꼭지딴은 내 목숨도 마음대로 빼앗아 갈 수 있단다. 너희 같은 것들이야 꼭지딴 앞에 파리 목숨이다.”
이처럼 개수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달문은 패두 자리에서 쫓겨났다. 거지 하나 죽는 것은 예사일 텐데, 그 일로 쫓겨난 것을 보면 아마도 연암의 기록은 실상과 다른 것 같다. 달문이 패두에서 쫓겨났다는 위의 기록은 연암의 <광문자전>에만 보인다. 패두에서 쫓겨난 달문은 약국의 점원이 되는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달문은 점원이 되면서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연암은 거지인 달문을 세인의 주목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패두에서 쫓겨난 것으로 쓴 것 같다. 아니면 달문이 걸식을 하긴 했으나 거지들의 패두 노릇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연암은 달문이 만석중놀이를 잘했으며 철괴무도 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홍신유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달문은 팔풍무를 잘 추는데
물고기 용이 꿈틀거리며 노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면 머리가 발에 닿고
배꼽이 불쑥 하늘을 쳐다보네.
온몸이 유연하여 뼈가 없는 듯
삽시간에 몸을 돌려 뒤집더니
어느새 휙하고 바꾸어
꼿꼿이 섰다가 갑자기 넘어진다.
바로 보지 않고 눈을 흘기더니
비뚫어진 입에 나오는 대로 떠드누나.
山臺의 좌우부에
장안의 악소년 무리들
그를 모셔다 상석에 앉히고서
귀신이나 모시듯 떠받드네.
이처럼 달문은 산대놀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달문은 처음부터 거지들과는 달랐다고 생각된다.
거지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성대중이 묘사한 거지들의 연회 참석 모습은 보고 넘어가자.
총융청 앞뜰에 풍악을 배설했다. 온갖 악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기생은 모두 춤을 추었다. 이 때 거적을 둘러쓰고 새끼로 허리를 동여맨 거지떼들이 춤추며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개미들이 장을 선 듯 했다. 와글와글 어울려, 춤이 그치자 노래가 나오고 노래가 그치자 다시 춤을 추면서 “얼시구 좋네 절시구 좋아. 우리네 인생도 오늘이 있도다.”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라. 일견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지만, 아마도 거지들에게는 세상을 다 차지한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광문자전>을 계속 보기로 하자. 약국의 점원이 된 달문은 어느날 주인의 의심을 받는다. 주인의 돈이 없어진 것이다. 집에는 달문이 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여러 날 지나서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 돈을 꾸러 왔다가 주인이 없어서 그냥 가져갔던 것을 오늘 갚으러 온 것이다. 이로 인해 주인은 달문을 의심한 것을 후회하고 달문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종실의 빈객들과 여러 대감들에게 달문의 자랑을 했다. 이때부터 달문은 온 장안에 이름이 났다. 연암의 <서광문전후>를 보면, 달문이 역모 연루 사건에서 해방되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상고당 김광수(1696-?)가 사람을 보내어 달문을 위로했다는 내용이 달문의 입으로 피력되고 있다. 상고당 김광수는 조선후기 고동서화의 수집과 감상의 일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문벌이 혁혁한 경화세족의 일원으로서, 벼슬을 마다하고 서화고동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인물인데, 달문이 이런 인물과 교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 유명세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달문은 또 이름난 신용보증인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패물이나 의복, 가옥이나 토지 문서 등을 전당 잡히고 돈을 빌렸는데, 달문이 보증을 서면 전당물이 따로 없어도 한 번에 천 냥을 빌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또 달문은 “낮에는 부잣집에 가 거래하고 아침에는 대갓집에 가 흥정”했다는 홍신유의 표현대로 주릅 노릇을 했다. 주릅은 거간꾼이다.
연암의 표현을 빌면 달문은 외양은 극히 추하게 생겼고 말도 누구를 움직일 만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또 당시에 아이들이 서로 야유하는 말로 ‘네 형이 달문이다’고 할 정도로 천대를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달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자, 자기도 옷을 벗고 함께 싸울 것처럼 덤벼들어 무엇이라 중얼거리며 구부리고 땅에 금을 그어 시비를 가리는 형상을 차리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으며 싸우는 사람들도 그만 웃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달문이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단순히 보면 달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물 같다. 그런데도 천 냥짜리 보증인이 되고 부자 대갓집을 왕래하는 주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비록 남의 말을 빌려 한 것이지만 연암도 달문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고 홍신유도 달문의 신의를 높이 사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규상의 말이 명료하다.
달문은 서울 저자에 앉아 있었으나, 팔도에 통하는 큰 장사치로 막중한 상권을 잡은 자라도 그의 말을 받들어 그 말대로 좇지 않은 자가 없었다. 대개 전적으로 신의를 가지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비록 큰 장사치와 통하였지만 물화 하나라도 가까이 하지 않고 자기 몸은 매양 걸인 무리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팔도의 내로라하는 장사치들이 모두 달문의 말을 듣고 거래를 했을 정도인데, 그 원천은 달문이 신의가 있는 사람이고 또 남의 물건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시장의 점포 주인들이나 여관의 주인들도 달문에게 물건을 지키게 하거나 맡기려고, 달문을 다투어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달문의 명성은 상거래에서만 난 것은 아니었다. 홍신유가 표현한바 “기생들 역시 그의 이름 들었던 터, 한번 보고 크게 반가워하며 한껏 뽐내다가 애교로 바뀌어 슬슬 기고 고분고분하는구나.”와 같이, 달문은 기생들에게도 이름이 났다. 이름만 난 정도가 아니라 기생들의 조방꾸니를 했다. 조방꾸니는 妓夫, 곧 기둥서방이다. <광문자전>의 기록을 보자.
서울의 명기로 인물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이름을 내주지 않으면 일전의 값도 없었다. 언젠가 羽林兒(궁궐의 호위와 儀仗의 임무를 맡은 근위병)와 各殿의 別監, 부마도위의 겸인들이 소매를 떨치고 운심의 집에 들렀다. 운심은 이름난 계집이었던 것이다. 마루에 술상을 벌이고 가야금을 퉁기면서 운심에게 춤을 청했다. 운심은 짐짓 지체하고 좀처럼 춤을 추려 안했다. 광문이 밤에 운심의 집에 들러 대청 밑에서 서성거리다가 곧 자리에 나아가 서슴없이 상석에 앉는 것이었다. 광문은 비록 헤진 바지와 저고리를 걸쳤지만 행동은 앞에 아무도 없는 듯 혼자서 득의연하게 굴었다. 그리고 눈곱 낀 눈을 들어 흘끔거리며 일부러 취한 척 트림을 하는데 염소 털같은 머리를 뒷꼭지에다 꽁댕이처럼 올려붙였다. 모두들 깜짝 놀라 서로 눈짓을 하고 일제히 때려 주려고 했다. 광문은 더욱 다가앉아 무릎을 쳐서 곡조를 맞추며 콧소리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에 운심은 곧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는 것이었다. 모두 아주 즐겁게 놀았다. 광문과 서로 친구를 맺고 헤어졌다.
달문은 운심이의 조방꾸니였다. 운심은 밀양 기생 출신으로 칼춤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이다. 당시 조방꾸니는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우림아나 겸인들 등 몇몇 제한된 부류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달문은 여타 조방꾸니들을 간단히 제압하고 있다.
‘두 주먹이 입에 들락날락할’ 정도의 추악한 얼굴, ‘눈곱 낀 눈에 염소 털같은 머리를 뒷꼭지에다 꽁댕이처럼 올려붙인’ 형용! 이러한 달문의 그 무엇이 당대 일류의 기생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신의만 가지고 있으면 될까?
달문이 운심이의 조방꾸니만 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기둥서방들이 여러 명의 창녀들을 관리하는 것처럼, 예전의 조방꾸니들도 다수의 기생들을 관리했다. 이번에는 <서광문전후>를 보자.
“전에 풍원군이 밤에 기린각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오직 분단이만 데리고 잔 일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서 풍원군이 입궐하려고 서두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고 있다가 잘못해서 초피 모자를 태웠겠다. 분단이가 황공해서 어찌할 줄 모르자 풍원군이 웃으며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로구나’ 하고 즉시 압수전(기녀들에게 주는 화대) 오천 푼을 얹어주더군. 내가 그때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난간 밑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시꺼먼 것이 우뚝 귀신처럼 보였겠지. 마침 풍원군이 지겟문을 밀치고 침을 뱉다가 섬뜩 놀라 분단에게 몸을 기대고 귀에다 ‘저 시꺼먼 것이 웬 물건이냐?’고 소곤거리더군. 분단이 ‘천하에 누가 광문을 모르오리까?’라고 아뢰었지. 풍원군은 빙긋이 웃으며 ‘저 사람이 너의 後陪냐. 불러들여라.’ 하고 내게 큰 술잔을 내려 주셨지. 그리고 당신은 홍로주 일곱잔을 마시고서 軺軒을 타고 가시더군.”
달문이 분단이의 조방꾸니를 했을 때다. 표철주로부터 분단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회고한 것이다. 조방꾸니와 기생, 그리고 기생을 산 사람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바, 애잔하면서도 낭만적이다(?).
연암은 달문이 역모에 연루되었다가 돌아오자 “노소 없이 모두 구경을 나가 서울의 저자가 여러날 텅 빌 지경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시장바닥의 모든 사람들이 다 달문을 알았다는 것인데, 물론 과장이 섞인 것이다. 그러나 달문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기식하고 약국과 점포의 점원이나 관리인을 했으며, 또 주릅이나 조방꾸니를 주로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항의 무리들이나 뒷골목 사람들과 접촉이 잦았을 것이다. 이 점은 <서광문전후>에 잘 나타나 있다.
광문이 표철주를 보고 말했다.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가 아니냐. 이제는 늙어서 별 수 없구나.”
망동은 표철주의 별호였던 것이다. 이어서 근황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했다. 광문이 묻는다.
“영성군과 풍원군은 무양하시냐?”
“이미 다 돌아가셨단다.”
“金君擎이는 지금 무슨 구실을 다니느냐?”
“용호영의 장교로 다니지.”
“그녀석이 미남자였거든. 몸은 좀 뚱뚱했지만 기생을 끼고 담장을 뛰어넘고 돈쓰기를 똥과 흙처럼 여겼지. 이제 귀한 사람이 되어서 만나볼 수도 없겠구나.”(---)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제일 유명하냐?”
“소아란다.”
“그 조방군은 누구냐?”
“최박만이지.”
“아침 절에 尙古堂께서 사람을 보내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셨지. 들으니 집을 원교 밑으로 옮기고, 집 앞에 벽오동 한 그루가 섰는데 늘 그 아래서 차를 끓이고 쇠돌이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한다지.”
“쇠돌이의 형제들이 시방 이름을 떨치고 있다네.”
“그래 그 녀석은 金鼎七의 아들이겠다. 내가 그 아비와 좋게 지냈거든!”
광문은 다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이게 모두 내가 떠난 뒤의 일이야.”
인용문은 달문이 역모 연루 사건에서 풀려난 뒤에 표철주를 만나 대화하는 부분이다. 표철주는 표망동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소싯적에는 “용감하고 날래며 인물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장대장전>) 그런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깡패이자 한량이었다. 그런데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친했던 것처럼 보인다. 다만 ‘네가 사람 잘 때리던 표망동이가 아니냐?’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두 사람이 서로 어울리긴 했어도, 달문은 표철주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의 김군경이도 지금은 용호영 장교지만, 과거에는 역시 조방꾸니 겸 한량 겸 깡패였다. 또 소아란 기생의 조방꾸니 최박만이도 달문은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문고 명인인 김정칠과 그 아들들도 직업상 달문과는 근접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달문의 주위에는 상고당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가 비슷한 인물들과 교유한 경우가 아무래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달문이 장안에서만 명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신유의 표현처럼, 이름이 이미 온 나라를 들썩였다.
홀연 달문이 어디서 나타나자
모두 전처럼 은근히 맞이하고
그 고을 사람들 달문 한번 보자고
가는 곳마다 몰려 떼를 이루었네.
서로들 잡아끌어 집으로 데려가서
안주는 수북수북 술잔이 넘치는데
익살에다 속담을 섞어서
이러구러 반년을 놀다보니
지루하고 염증이 나는구나.
인용문은 홍신유의 <달문가>에서 뽑은 것이다. 이 장면은 달문이 부산 동래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홍신유에 의하면, 그 무렵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를 보기 위해 5,6백명의 인민이 동래 바닥을 빼곡히 메웠는데, 그들이 인용문의 내용처럼 달문을 환대했던 것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달문은 남쪽의 순천에서 북쪽의 백두산에까지 갔었는데, 홍신유에 의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구경나온 사람들로 담장을 둘러”쳤다고 한다.
그런데 달문의 이러한 전국적인 유명세는 설명하기가 몹시 어렵다. 장안에서의 명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고 하겠는데, 그것이 진정 가능한 일일까. 요즘도 대통령이나 유명 예능인, 또는 희대의 사기꾼이나 살인자 등 일부 요인이 아니고서는, 이름을 전국적으로 떨치기는 어렵다. 하물며 옛날에는 영의정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달문은 홍신유와 연암이 말했던 것처럼 시속의 아이들까지도 다 알았다. 또한 <서광문전후>에 나오는바, 경북 개녕의 수다사 중들도 달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달문을 애모하고 그리워했고, 절에 기식하는 거지 아이조차도 달문을 알았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달문의 명성에 포장된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천착해보도록 한다.
달문이 장안에서 이일 저일 하면서 살았지만, 본래 달문은 어디에 매인 데 없이 바람처럼 산 사람이다. 홍신유의 <달문가>를 보자. 달문은 어느날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장안을 떠난다. 그후의 달문의 노정은 이렇다.
한강변-문경새재-낙동강-동래. 여기서 다시 호남으로 호서로 두루 주유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초 기록을 보면 달문이 순천에 갔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니, 호남으로 간 것도 분명하다. 여기서 다시, 대동강-청천강-통군정-의주. 이곳에서 달문은 한 연회에 참석하여 환대를 받는다. 다시, 금강산 비로봉-백두산 꼭대기까지.
이것도 몹시 특이하다. 비렁뱅이 같은 달문이 어떻게 이런 유랑이 가능했을까. 위의 여정이라면 수년이 걸렸을 텐데,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혹시 달문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4. 달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달문의 행적과 명성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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