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자료

용재총화 속의 선초의 음악가

 

鮮初의 音樂家

(1卷5話 9面10行~13面6行, 標題語: 音樂)


音樂於諸技最難學. 非有天資者. 不能得其眞趣. 三國各有音律樂器. 然世代綿邈不可詳. 惟今之玄琴出於新羅. 伽耶琴出於金官. 大笒倣唐笛而爲之. 其聲最壯. 爲樂之根本. 鄕琵琶亦倣唐琵琶. 其設掛則與玄琴同. 其調絃撚撥. 學者難之. 不善鼓則不堪聽也. 有典樂宋大平善彈. 其子田守傳得其法而尤妙絶. 余少時. 在伯氏家聽其聲. 如麻姑爬癢靡靡不厭. 然比諸都善吉則不及也. 然田守而下. 惟善吉近之. 其他則不可及也. 今則無能之者. 唐琵琶. 則田守亦爲第一手. 善吉與之齊名. 今之伶人多有能者. 至如士庶學樂. 必先琵琶. 然無有拔萃者. 惟金臣番盡得善吉指法. 而豪縱過之. 亦今之第一手也. 玄琴於樂最善. 學樂之門戶. 有盲李班. 遇知於 世宗. 出入禁中. 有金自麗者. 亦善鼓琴. 余少時聽之. 慕其音而不得指法. 今若律以伶人之樂. 則未免古態也. 伶人金大丁李亇知權美張春. 皆一時人. 當時論者云. 大丁之簡嚴. 亇知之要妙. 各臻其極. 大丁早誅未及聽. 美春皆凡手. 惟亇知爲士林所重. 至紆 聖眷. 再爲典樂. 余與希亮伯仁子珍而毅耆之. 嘗往學焉. 日日邀致. 或時偕宿. 聽之甚慣. 其爲聲也. 如從琴底坐. 無匙撥所行之跡. 心神驚悚. 眞絶藝也. 亇知死後. 其音盛行於世. 今士大夫家女僕亦有能之者. 皆得亇知遺法. 無瞽矇鄙習. 典樂金福根樂工鄭玉京尤善鼓. 爲當時第一手. 有妓上林春. 亦寢近之. 伽耶琴. 則有黃貴存者善彈. 余未及聽. 又聽金卜山之彈. 當時服鷹而不能已. 以今觀之. 亦太質直也. 近有老女召史者. 自公侯家謫出. 始播其音於外. 其音要妙. 人無與敵. 亇知歛袵自以爲不能及. 今有鄭凡者. 盲中之最善彈. 膾炙於世. 大笒.  世宗朝有許吾. 繼有李勝連徐益成. 勝連遇知於 世祖. 拜軍職. 益成往日本而死. 今有金都致. 年過八十而聲猶不衰. 推爲臣擘. 牙箏. 昔有金小材(村)者能之. 而亦死於日本. 其後廢絶已久. 今 上留意敎之. 能者相繼而出.


  음악은 여러 技藝 중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다. 하늘에서 타고난 소질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 참된 취미를 깨달아 얻을 수 없다.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각 음률과 악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대가 아득히 멀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지금의 玄琴1)은 신라에서 나왔고, 伽耶琴(伽倻琴)2)은 金官에서 나왔다. 大笒3)은 唐笛4)을 모방한 것으로서 그 소리가 가장 웅장하여 음악의 근본이 되었다. 鄕琵琶5)도 또한 당나라의 비파를 모방한 것으로서 그 장치는 현금과 같다. 그 줄을 고르고 뜯고 퉁기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 어렵게 여겨서 잘하고 고무 격려하지 않으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典樂6) 宋大平7)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향비파를 잘 탔다. 그의 아들 田守8)가 그 아버지의 手法을 배워서 더욱 절묘하게 연주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 伯氏9)댁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데 麻姑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10) 것 같아서 상쾌하고, 마음이 쏠려서 싫지 않았다. 그러나 都善吉11)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수 이후의 사람으로는 오직 도선길만이 서로 비슷하였을 뿐 다른 사람들은 전수를 따르지 못하였다. 지금은 잘하는 사람이 없다.

  당비파는 전수가 역시 제일 高手이고, 도선길도 그와 함께 명성이 높다. 지금의 伶人12)에는 당비파에 유능한 사람이 많다. 士庶人으로서 器樂을 배우는 경우와 같은 때에서 반드시 비파를 먼저 시작한다. 그러나 별로 뛰어난 사람은 없다. 오직 金臣番은 도선길의 솜씨를 다 배워서 호기스럽고 자유방종한 맛은 오히려 도선길보다 낫다. 역시 지금도 그가 제일 고수이다.

  현금은 기악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서 음악을 배우는 門戶와 같은 것이다. 盲人 李班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世宗이 그의 현금의 재능을 알아주어서 禁中에 드나들었다.

  金自麗라고 하는 사람도 또한 현금을 잘 탔다. 내가 젊었을 때에 그 현금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흠모하였으나 배우지 못했다.

  이제 만약 광대의 음악으로써 음악을 평론한다면 古態를 면치 못할 것이다. 광대 金大丁13)․李亇知14)․權美․張春은 다 한때의 사람들이다. 그때에 세상에서 논평하기를 「大丁의 簡嚴15)함과 亇知의 要妙16)함은 각기 극치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대정은 일찍 베임을 당하였으므로 나는 그의 연주는 미처 듣지 못했다. 권미와 장춘은 다 凡庸한 솜씨였다. 오직 마지만은 士林의 소중히 여기는 바 되었으며 임금의 사랑을 입어 두 번이나 典樂이 되었다.

  나는 希亮․伯仁․子安․琛珍(침진)․而毅․耆蔡․籌之와 함께 같이 자기도 하곤 하여 그 소리를 매우 익숙하게 들었다. 그 소리가 현금의 밑바닥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 같아서 뜯고 퉁기는 자취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心神이 놀라고 두려워진다. 참으로 뛰어난 技藝였다.

  마지가 죽은 뒤에도 그 소리「音」만은 세상에 널리 펴졌다. 지금 사대부 집의 계집하인 중에도 또한 잘 타는 자가 있다. 다 마지가 남긴 법을 배운 것으로서 盲人 악공 鄭玉京이 가장 잘 타서 당시의 제일 가는 고수였고, 기녀 上林春이란 자도 또한 이에 가까웠다.

  가야금은 黃貴存이라는 사람이 타는 것을 들었다. 그때에는 나는 그 타는 소리가 가슴에 파고들어서 잊을 수 없었으나 지금 보니 역시 또한 너무 질박하고 愚直하다. 근래에는 늙은 召史17) 한 사람이 있는데 公侯18)의 집에서 쫓겨 나와서 그의 독특한 가야금의 음운을 비로소 세상에 퍼뜨렸다. 그 음률이 미묘해서 아무도 그에 필적한 사람이 없다. 마지도 옷깃을 바로잡으면서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鄭凡이라는 자가 있는데 盲人들 중에서는 가장 잘 타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世宗朝에 李勝連․徐益成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승련은 세종에게 그 재주가 알려져서 軍職을 받았으며 익성은 일본에 가서 죽었다.

  지금 金都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 80세를 넘었으나 그 소리가 오히려 쇠약하지 않으므로 그를 絃樂의 巨擘으로 推重한다.

  옛날에는 金小材라는 사람이 있어서 가야금을 잘 탔는데 또한 일본에 가서 죽었다.

  그 뒤로는 폐지되어 끊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더니 지금 임금께서 여기에 유의하여 가르치니 잘하는 자가 서로 이어 나오고 있다.



<참고사항>

1. 태조부터 태종에 이르는 3대에는 악기의 수선 및 신악기의 수입, 악공(樂工)의 중국 유학, 정통아악의 수입 등에 힘써, 세종 때부터는 조선의 음악이 점차 그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게 되었다. 국악사에 있어 세종 초기 및 중기는 아악의 완성시기라고 보는데, 당시 아악은 고려 말 이후 그 제도가 흐트러진 채 그대로 전승되어 오던 실정이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세종은 박연(朴堧) ․정양(鄭穰) ․유사눌(柳思訥)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아악의 제정 및 개정, 아악보의 간행, 아악기의 제작 등의 사업을 폈다. 

  이러한 기운을 타고 당시의 궁중음악은 한동안 아악 일변도의 현상을 빚기도 하였으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