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자료

단시조의 미학과 전망

단시조의 미학과 전망
- 맵디매운 고추의 시학

김 열 규

1) 짧아서 웅숭깊은 것

시는 압축이다. 시의 시다움은 그 응축(凝縮), 응결(凝結)에 있다. 비록 모든 시가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적잖은 수의 시가 보편적으로 나누어 갖고 있는 시다운 개성의 하나로, 그나마 으뜸가는 개성의 하나로 축약(縮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긴축(緊縮)하는 언어다.

줄일 대로 줄이고 깎을 대로 깎은 언어, 그것이 시다. 작아서 맵기로는 시와 고추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서정시의 과녁에는 이 말이 정통으로 꽂혀야 한다.

하지만 작은 언어라고 혹은 적은 언어라고 두리뭉실로 모두 다 시가 되는 건 아니다. 고추가 작아서 매워야 하듯이 작은 거인일 수 있는 언어가 비로소 시가 된다.

이래서 저 '호리건곤'이란 한문 숙어를 원용(援用)할 만해진다. 호리(壺裏)는 항아리나 단지 속이란 뜻이지만 이 경우는 술단지 속이란 뜻, 건곤(乾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 곧 천지란 뜻. 해서 노상 곤드레만드레로 술에 절어서 사는 인생 그게 다름 아닌 '호리건곤'이다. 거듭 풀어서 말하자면 술병 안에다 온통 세상사 모든 것을 내맡긴 고주망태가 워낙 '호리건곤'의 본 뜻이라고 해야 한다. 한데 이 말을 비유적으로 쓰지 말고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쓴다고 치자. 그럼, 작은 단지 안의 세계가 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거인을 뭉게구름인 듯 뿜어내었다가는 다시금 연기처럼 빨아들이는 마술의 호리병이 등장하지만, 그렇듯 온 천지를 통으로 삼켜버린 작은 단지가 있다면 그게 곧 문자 그대로 풀이한 '호리건곤'이 된다. 시야말로 이같은 뜻의 '호리건곤'이라야 한다.

시는 그래서 말을 아낄 대로 아껴 쓰면서도 함축성은 부풀 대로 부풀어야 한다. 이 모순의 공존이야말로 시의 본태(本態)요 원형이다. 이를테면 '과묵(寡默) 다함(多含)'의 언어 그것이 시다. 말수는 사뭇 적으면서 함축성은 풍요한 것, 그것에서 서정시는 더 한층 돋보이게 된다.

"우리들이 콜리지의 암시적인 다변(多辯)이거나 아니면 알렉산더 포프의 정교한 진술 어느 한쪽으로 시를 제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시의 극한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사이에는 노래(song)와 경구(驚句)에 걸친 수다한 중간 항이 개재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퓰리처 상을 탄 미국의 시인 호버트 힐여가 말할 때, 그는 다변스런 시와 대조적인 정교한 시를 '경구적 시'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말버릇을 따르자면 시는 그 한 극한에서 경구나 속담 혹은 잠언(箴言)처럼 짧게, 간결하게 오직, 저밀 대로 저미고 자를 대로 자른 언어일 수 있어야 한다. 시는 모름지기 치고 자르고 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의 극세공품(極細工品)이다. 한데도 그 속은 웅숭깊어야 한다.

말이 길어지면 드러날 것이 다 드러나고 만다. 노출증은 시와는 별반 인연이 없다. 짧아서 비로소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시는 여성의 '헛 스커트'와는 극단히 대조적이다. 후자는 짧아지면서 드러날 게 웬간히 죄다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시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다.

시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를 뜻하거나 시와 관련 있는 몇 개의 독일어 낱말에서 매우 요긴한 증언을 얻게 된다. 독일어 낱말 'Gedicht'는 시를 의미하거니와 이는 동사, 'dichten'의 과거분사가 명사화한 낱말이다. 한데 이 동사는 '시작(詩作)한다', 이외에 '압축한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하는 명사 'Gedicht'는 '압축된 것'이란 뜻도 갖게 된다. 이에서 압축한 시는 거의거의 동의어라는 결론을 쉽사리 얻게 된다. 하이데거가 'dichten' 동사가 갖는 두 가지 의미, 곧 '시작하다'와 '생각하다'에 근거를 두고는 시를 인간의 '제일차적 사고'라고 한 것까지 아울러서 고려하면 시는 필경 줄일 대로 줄이고 응축할 대로 응축한 제일차적 사고라는 것을 어렵사리 추리하게 된다.

2) 잠언, 금언(金言), 그리고 경구의 세계

내 나이 스물하나였을 적, 어느 어진 이가 말했다네

금은 보화(寶貨)는 죄다 주어도 네 가슴과 꿈은 안 되지

그러나 스물한 살의 나이, 말해야 소용 없었다네.

가령, A. E. 하우스만의 '내가 스물한 살적에'라는 시에서 그 원문을 크게는 손대지 않고 우리말로 올겨놓으면 그래서 우정 석 줄로 옮겨놓으면 영낙 없이 시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구의 시도 경구나 잠언의 성질을 갖추면, 절로 깔끔하고도 조촐해진다. 혹은 노발리스가 혹은 모르겐슈테른이 '프라그멘테', 곧 '단상집' 또는 '아폴리즘'이라고 이름한 글 모음에 실은 것 가운데는, 다음 보기처럼 더러는 경구가, 더러는 잠언이 섞여 있지만 그것들은 거의가 다 '경구적인 시'라고 가름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람한 잣나무가 말한다네. 우린 슬프지 않아

우린 기쁘지도 않아, 우린 축제(祝祭)야

(모르겐슈테른, 아포리즘 모음 : '개방된 비밀에 관하여'에서)

이 점은 가령 우리 세기 최대의 캐톨리시즘의 시인, 뽈 끌로델의 '세속의 기도'에서도 쉽사리 확인될 수 있다.

비 멎은 바닷가 절벽, 가지 끝 솔잎에 엉긴 빗방울 하나

머뭇대다 머뭇대다 떨어지면

바다는 끝없이 끝없이 그를 에워서 맴돈다

한데 끌로델의 경우는 시정과 신앙심의 일체화를 바탕으로 하여서 높은 상징성과 깊은 함축성을 은근히 또 살며시 풍기고 있음에 유념하게 된다. 물론 하우스만이나 모르겐슈테른의 보기들처럼 통찰하는 예지에 넘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전나무의 경구나 빗방울을 위한 기도나 다같이 혹은 말하고 혹은 기도하는 당사자의 '내면의 즉물성(卽物性)', 그것도 한 찰나, 한 상황에서 잡혀진 '마음의 즉물성'을 공유하고 있음에눈을 떠야 한다. 물론 전자에서는 객체 내지 자연의 다소간의 주관적 변용이, 이에 비해서 후자에서는 객관적 묘사성이 상대적으로 돋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전자에서는 마음의 눈이 차지하는 구실의 크기가 후자보다는 크다. 이에 비해서 후자는 자연의 한 순간의 정경 그대로, 곧이곧대로 말을 옮겨 놓은 몫이 크다. 그러나 전자에서도 마음의 눈이 없이는 나무가 '축제'를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다.

결국 우리들은 말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과 한 사물 또는 한 정경의 내면이 서로 하나로 얼려 있음을 전제하고서는 두 보기가 마음 눈 본 그대로, 한 순간, 한 상황의, 한 사물, 한 자연의 정경을 스냅 사진 찍듯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깊은, 웅숭깊은 함축성을 내장하고 있고 그로 해서 시적인 서정이 교훈성과도 속을 나누고 있음을 더불어서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같다.

구태여 서구의 시사(詩史)를 옆눈질한다 치면, '경구 시'나 '잠언 시' 혹은 '세속 기도 시' 등의 보기를 앞세워서 서구의 단형시들이 한 순간, 한 상황의 내면적 즉물성을 서정과 교훈이 공존하게 또는 그것을 따로따로 노래한 것을 아예 일정하게 규약된 격식 또는 형식을 갖추어서 노래함으로써 혹은 한국의 시조가 그리고 일본의 '단까(短歌)'며 '하이꾸(排句)'가 생겨난 것이라고 하면 서구의 보기들과 동양의 보기 사이에 걸친 상호간의 대비를 보다 더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동서의 비교를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서구의 '에페그람'을 위시해서 '막심(maxim)', '아포리즘(aphorism)' 그리고 일부의 단상과 묘비명까지 해서 이들이 그 교훈성에 더불어서 단형의 언어 표현체로서 시적 서정을 갖추고 있기도 한 것인데, 아울러서 그것이 한 편의 시의 텍스트 속에 내재해 있기도 한 것인데, 동양에서는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는 단형 정형시들이 이들을 따로 정식으로, 또 공적으로, 포용할 품을 연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같다. 이 경우, 실제로 한국의 시조와 일본의 단까며 하이꾸가 그리고 심지어 '센류'까지도 강한 교훈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을 방증삼아도 좋을 것이다. 한편 중국의 정형시 가운데서도 가령, 절구(絶句)라면 이를 한국과 일본의 단형시와 나란히 두고서 서구와의 비교의 시야를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3) 단발(單發) 단심(單心)의 시학

"모든 사람을 / 죽이고자 벼르는 / 나의 속마음 / 그 마음이 나에게 / 신을 보여주었다."

이건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시인, 나까하라 쭈야(中原 中世)의 단까다. 평론가 히구찌 사토루(桶口 覺)의 '나까하라 쭈야, 목숨의 소리'라는 평전에 의하면 랭보를 즐기고 베르렌느를 좋아한데다 다다이스트에 심취한 나까하라다운 작품이란 것은 금세 눈치챌 만한 것이다. 악마주의적인 세계관이 섬뜩하지만 그건 그대로 자극적인 역설의 교훈성이 읽혀질 만하다고 여겨진다.

번역은 비교적 본문을 충실히 따르되, 일본 단까의 자수율인 ' 5 / 7 / 5 / 7 / 7 '을 지키는 데도 마음을 썼다. 텍스트 중간중간의 사선(/)은 일본어로 된, 원 작품이 지키고 있는 자수율을 보이기 위해서 필자가 찍은 것이다.

스스로 품은 내심의 어느 상모가 직선적으로 또 단도직입적으로 표백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담대한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다. 심정을, 속정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도 있다. 그것은,

"이 속마음을 / 털어놓는 몰염치 / 그렇다 쳐도 / 털어놓지 않으면 / 더욱 짐승인 것을"

이 또 다른 그의 단가와 견주어보면 받아들이기 더 한층 쉬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애닲게 보라 / 달빛이 어려 있는 / 봉우리 눈이 / 젊디젊은 귀인의 / 납색(蠟色) 얼굴 같음을"

이 처연한 단가는 시인의 내심에서라서야 비로소 비친 어느 한 찰나의 정경를 노래하고 있다. 섬쩍지근하기는 두 작품이 다 마찬가지지만 전자는 내심의 토로고 후자는 정감의 토로라는 차이를 보이고 만다.

하지만, 직정(直情)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혹은 직심(直心)이라고도 달리 부를 심회(心懷)가 두 단까에서 지적되기는 서로 다를 바 없다. 그것도 '단발(單發)의 단심(單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까하라는 이내 단까를 버리고 현대시에로 옮아 간다. 이같은 시인의 변화에는 "단까가 다만 마찰하는 것뿐인, 이를테면 애감(哀感)밖에 갖지 못하는 것은 짓는 이에게 하모니가 없기 때문이다. 그를 나는 '자연 시인'이라고 부른다."라고 한 고백이 수반되어 있다. 이를 두고서 앞에 인용한 히구찌는 "(자연 시인은) 인식이나 의식의 매개가 없다시피하는 경지에서 대상물을 생리작용으로 써나간다. 그것은 일과성(一過性)의 애감뿐이고 그때그때, 이 당장의 시공에 일방적으로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해설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같은 부정적인 혹은 소극적인 평가에야말로 오히려 단까 및 하이꾸라는 일본의 단형 정형시의 속성이 보다 더 적절하게 또 간략하게 포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는 되려 '조탁된 간결'의 미학 그리고 솔직한 미학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일과성 이외에 마찰이라고 표현된 감각적인 직관 그리고 주어진 시공에의 몰입이라고 표현된 즉좌성(卽座性) 등을 열거한다면 그걸로 일본의 단형 정형시의 매력이 되려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데 이 경우, 우리들은 '닫혀진 한 사황에서 한 개체가 간섭이나 단절 없이 갖는 경험의 직접적 표백'이야말로 시적인 서정성 그 자체라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동양의 단형 정형시에서 이 서정시의 '경험의 범역'이 극단적으로 전형화되어 있음을 인지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다.

무릇 이같은 서정시의 범역에서는 시는 첫째, 말하거나 노래하는 사람, 곧 발화자의 사적이고도 개인적인 정신의 움직임 및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둘째 발화자의 타인에 대한 행동을 표현하는 것 등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 제미노 H. 아바도가 그의 '서정시의 형식 탐구'에서 한 말이거니와 전자는 '표현의 시', 후자는 '발설(adress)의 시'로 각기 범주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바도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후자에서도 전자와 다를 바 없이 발화자의 사적인 감정 또는 사고가 발설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한데 이 두 가지 범주의 시 어느 것에서나 일과성, 감각적 직감 그리고 즉좌성이 단선적으로 직접 표출되는 것으로서 동양의 단형 정형시가 그 개성적인 좌표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역시 간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은 불교의 선의 경지에 견주어질 '직지(直指) 인심(人心)'에 버금할 '직지 아심(我心)'이야말로 단까나 하이꾸 그리고 동양의 단형 정형시의 압도적 매력이라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극한적 세공품이 곧 이들 단형 정형시들이다.

한편 서정시가 순수하게 발화자의 사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정 또는 사고의 움직임을 표출한다는 전제하에서 다시금 그것들이 순간적이냐 아니면 영속적이냐 하는 가름을 앞에서 인용한 아바도는 시도하고 있다. 그는 전자가 단일 시간 안에 그 자체로 매듭지어지는 단일한 사건, 정황 등을 표현하는 특색을 갖추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단일한 방향으로 거의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되, 더는 쪼갤 수 없는 단일한 감정과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것 등의 설명을 덧붙인 끝에 그 전형의 하나로서 일본의 하이꾸를 들어 보이고 있다.

"야윈 개구리 / 지지를 말라 / 여기 있도다" - 이싸 -

"고추잠자리 / 그의 얼굴 진실로 / 다만 눈일 뿐" - 치소꾸 -

"그 눈망울 속 / 먼 산이 가득하구나 / 고추잠자리" - 이싸 -

이들은 모두 5 / 7 / 5의 자수율을 지키고 있는 하이꾸들이다.

차례로 이싸, 치소꾸 그리고 다시 또 이싸의 작품이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가인(歌人)'이라고 부르고 있는 전문인들이다.

하나같이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순박하다면 역시 순박하다. 뒤의 두 작품은 다만 객체의 묘사가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본 그대로의 말로 옮기고 있는 것뿐이다. 하나 바로 이 점이 일본 하이꾸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경쾌하고 또 사뿐한 익살이 곁들어져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을 강조해서 아바도는 하이꾸의 '희극적 찰나성'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첫째 작품은 시적 자아가 타자에게 건네는 발설로 이룩되어 있다. 한여름, 논가에서 개구리 두 마리가 맞겨루고 있는 사건 현장을 대하고는 시적 자아가 자신처럼 야윈 개구리 편을 들면서 개구리보다 더 용을 쓰고 있는 장면이 익살맞다.

계절 감각을 필수적으로 배경삼고는 그때, 거기 그 자리의 그 사물, 그 정경, 그 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반영하면서 하이꾸는 이룩된다. 그것이 솔직과 담백 혹은 경쾌를 더불어서 노래되는 것이다.

사정(射精)이 아니면서도 그것에 견줌직한 '사정'이나 '사감(射感)', 아니면 토정(吐精)이나 '토감(土感)'을 하되 필경 사물과 정경과 인간 내심의 토정이 곧 하이꾸의 정(精)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인이 국기로까지 드높이고 있는 검술(劍術)의 '카타나(검)'의 후려침, 단 한 칼질에 겨룸을 끝장내는 검도의 손놀림에 견주어질 감정과 정서의 순발(瞬發)이 거기 번개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쓰는 말버릇인 '일도(一刀) 양단(兩斷)'을 이에서 연상해도 좋을 것같다.

하기에 하이꾸는 '돈지(頓智)의 시'다. 돈지란 일본인이 자주 쓰는 말로 단숨에 홀연히 터득하는 지혜다. 따라서 하이꾸는 한순간 휘번득거리는 지혜의 시다. 해서 하이꾸가 입선(入禪)과 겨루어서 이야기되곤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Furuike-ya kawazu tobi-komu mizuno-oto

오랜 연못아 개구리 뛰어드는 물살의 소리

Oh! ancient pont! a frog leaps in, the water's sound!

일본의 대표적 가인인 바쇼의 대표적인 하이꾸다. 오직 'ya'를 빼고는 시적 자아의 주관은 그 편린도 비쳐져 있지 않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객관적 한순간의 정황을 감득한 그대로 말로 옮겼을 뿐이다. 한데도 일본이 낳은 선(禪)의 철인(哲人) 스즈키 다이세쯔는 이 노래에는 완벽한 일체감이 괴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치 오래된 그 연못 그 자체이듯 이 시에는 깊으나 깊은 공감, 정경과 소리와 인간의 감각 사이의 일체감 그리고 객체와 주체가 더는 구별 없이 하나되는 공명이 철철히 고여 있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 공(空)의 경이가 여기 있노라고도 말하고 있다.

"오랜 연못이 온 우주를 감싸고 온 우주가 확연하게 연못에서 그 자체를 보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스즈키의 설명, 아니 설법이다. 돌이켜 한국의 시조에서도 이같은 선지헤의 시정신이 담긴, 다음과 같은 작품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잘 새는 날아들고 새 달은 돋아 온다

외나무 다리에 혼자 가는 저 중아

네 절이 얼마나 하건데 북소리 들리나니 (송강 정철)

그런가 하면 다음 시조에서는 송강의 시선(詩禪) 일체의 경지가 더 한층 깊어져 있는 것을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기두 기두(磯頭)에 누웠다가 깨달으니 달이 밝다

청려장 빗겨 짚고 옥교를 건너 오니

옥교에 맑은 소리를 자는 새만 아놋다 (박인로)

깊은 산속, 달이 밝은 한밤, 그 한 때, 한 상황이 묘사되면서 거기 정감이 겹친다. 달빛 속에서 지팡이 소리, 물소리 그리고 시적 자아의 움직임이 한 빛, 한 소리, 한 존재를 이룬다, 그 정적의 어울림은 필경, 자는 새의 낮은 구구거림으로 은근한 여운이 된다. 순간적, 즉좌적인 감흥이 시와 그림과 선(禪)의 삼위일체를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시조 또한 재치와 서정의 해조(諧調)에 덧붙여서 교훈과 정감의 어울림을 십분 누리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한일 양국간의 단형 정형시의 공통성을 보다 더 진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조는 그 자수율이 일본의 단형시의 그것과 대비시킬 때, 이를테면 7 / 7 / 7 / 7 / 8(9) / 7과 같이 표출될 수 있는만큼, 글자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에 의지해서 일본의 단가나 하이꾸와는 달리 우여곡절과 굴절을 포용한다. 일본의 것이 단숨의 직선이라면 한국의 것에는 한 숨 돌리는 곡절이 안존하게 내재해 있다.

이같은 비교를 위한 결론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다. 단편적인 비교나마 이웃한 두 나라의 단형 정형시가 상호 교감을 바탕으로 하고서는 서로 다른 미덕을 향유하고 있음을 보이는 데에 얼마쯤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김 열 규 :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한국민속학 연구'(1971, 일조각), '서정과 형상'(1983, 대방) 등 연구 논문과 '아리랑 역사여 겨레여'(1987, 조선일보사) 등 수필집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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