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자료

헷갈리는 한자 이야기

헷갈리는 한자:
斟酌(짐작) 橫說竪說(횡설수설) 箴言(잠언) 詭辯(궤변) 道聽塗說(도청도설) 菽麥(숙맥) 復顔(복안) 濫觴(남상) 琴瑟(금슬) 滿身瘡痍(만신창이) 浪費癖(낭비벽) 癡呆(치매)

(1) 白眼視: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흘겨봄. 중국의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서 나온 말로, 진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반갑지 않은 손님은 백안(白眼)으로 대하고, 반가운 손님은 청안(靑眼)으로 대한 데서 유래한다.

(2) 比翼鳥連理枝: 비익조는 날개가 한쪽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새이고, 연리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3) 倚門望: 문에 기대어 애타게 기다림.

(4) 忘年之交: 나이를 잊고 서로 사귐. 곧 나이를 따지지 않고 서로 친구처럼 사귀는 일.

(5) 五福: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6) 興淸亡淸(흥청망청): 때는 연산군.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에게 투기심이 높은 어머니가 쫓겨나고 대신들의 건의로 죽은 일까지 알게 된다. 그 후 연산군은 삐뚤어져가며 당시 후궁이었던, 정 소용과 엄 소용을 죽이고, 그 자식들을 데려가 할머니 인수대비에게도 쇼크를 주게 된다. 연산군은 어미가 억울하게 죽었다 하여 '제헌'이란 칭호를 내려준다. 이렇게 어머니의 복수를 끝난 연산군은 폭정이 날이 갈수록 극에 치닫게 된다. 그는 왕이라는 권한이란 것을 이용하여 막강한 정치를 휘두른다. 그는 전국의 기생 중 요즘 '얼짱', '몸짱'인 퀸카들만 100명으로 골라 궁궐로 불러들인다. 처음에 불러들인 이 기생들은 운평(運平)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에 성이 안 차는지 벼슬아치의 첩, 창기 가운데서도 운평을 추가하게 된다. 이 운평의 수가 1000명에 달했다 하는데 얼마 안 가 9천여 명에 달하게 된다고 한다.

(7) 耳鼻爺(이비야): 어린아이가 울면 어른들은 ‘이비야가 잡아간다.’는 말로 겁을 준다. 어린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못 하게 할 때도 '이비!' 또는 '애비!'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비' 또는 '이비야'는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말이다. 그냥 생각하듯 아버지가 무섭게 야단친다는 뜻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남원성과 전주성 전투가 치열하였다. 당시 왜병들은 자신들의 전공(戰功)을 뽐내기 위하여 조선 사람만 보면 코를 베고 귀를 잘라갔다. 그래서 수 천 수 만 조선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상자에 담아 일본에 가져갔다. 지금도 일본에는 그 때 가져갔던 조선 사람의 코와 귀를 묻은 코 무덤과 귀 무덤이 남아 있다.

 왜병들은 죽은 사람의 코뿐만 아니라 산 사람의 코까지 베어 가는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이를 갓 낳은 집에 금줄을 끊고 들어가 산부의 코는 물론이고 갓난아이의 코까지 잘라간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왜병을 '코 베어 가고 귀 떼어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비야(耳鼻爺)'라고 불렀다. 이(耳)는 귀, 비(鼻)는 코, 야(爺)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이비야가 온다'고만 하면 울던 아이도 무서워서 울음을 뚝 그쳤다. 이후로 이비야는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를 나타내는 뜻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 순경을 '이비야'라고 하였고, 일본 순경이 오면 '이비야가 잡으러 온다'고 하였다. 지금은 뜻 모르고 쓰는 말이 되었지만,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해 주는 말이다. 

(8) 萬里長城(만리장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진시황은 이미 있었던 성을 증축하고 개축한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17세기까지 무려 이천 년이 넘도록 쌓아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 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묻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에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고, 죽은 사람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만리장성에 얽힌 설화나 전설도 많은데 그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본다.

* 맹강녀(孟姜女)의 통곡

  진시황이 통지하던 시절에 맹(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맹은 호리병박 씨를 마당에 뿌렸는데, 그 씨가 무럭무럭 잘 자라서 이웃집 강(姜)의 마당까지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없던 맹과 강은 호리병박을 잘 길렀고, 그 것은 곧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박을 가르고 보니 그 안에 여자 아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크게 기뻐한 두 사람은 아이의 이름을 맹강녀라 짓고 정성껏 길렀습니다.

  맹강녀는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만리장성 부역을 피해 맹의 집 앞마당으로 들어온 범기량(范杞梁)을 만났고, 둘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사흘 만에 범기량은 부역에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끌려 간 후 맹강녀는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결국에는 남편을 찾자 떠나기로 결심하여 몇 개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넌 끝에 마침내 남편이 부역을 하고 있던 산해관(山海關) 근처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부역을 하다 지쳐 죽어 만리장성 속에 묻혔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너무 원통한 맹강녀는 몇 날 며칠을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나면서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만리장성이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백골들이 나타났습니다.

  장성을 시찰하러 나왔던 진시황은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맹강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녀를 본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진시황은 맹강녀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이에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줄 것과 남편을 위해 국장을 치러 줄 것, 그리고 그 국장에 진시황이 검은 옷을 입고 참석할 것의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진시황은 이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이 드디어 맹강녀를 궁전으로 데려가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길옆의 바다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현재 중국 하북성(河北省) 산해관 동쪽 7 km 지점에 맹강녀의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멀리 만리장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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