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자료

노원신문 38 - 여름과 벼 이야기

여름과 벼 이야기

 

도정 권상호

  夏至(하지) 안팎으로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며칠간 계속되는 듯하더니 6월의 이른 장마가 성큼 다가왔다. 이 장마가 지나면 본격적인 더위와 함께 삼복더위가 기다리고 있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갈마들고 인생에는 喜()와 悲()가 갈마들 듯 여름철에는 더위와 장마가 갈마든다. 대지의 헐떡이는 불볕더위를 순간에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하늘이 쏟는 시원한 빗줄기이다. 더위와 빗줄기, 이 둘은 삼라만상의 젖줄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논의 벼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이중주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禾(벼 화)’ 자 얘기를 풀어볼까 한다. ()의 갑골문이나 전서를 보면 한 포기의 잘 익은 벼의 모양이다. 탱글탱글 잘 익어 고개 숙인 벼 이삭, 볏잎, 대궁, 뿌리까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벼가 주는 최고의 교훈은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렷다.

  벼는 五穀(오곡)의 대표이다. 그리하여 穀(곡식 곡)의 부수도 禾()이다. ()은 殼(껍질 각)에서 발음이 왔다.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는 빻거나 두들겨야 한다. 그래서 ‘치다’는 의미의 殳(몽둥이 수)가 붙어있다. 穀食(곡식), 穀物(곡물), 甲殼類(갑각류), 地殼變動(지각변동)이로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黃鳥歌(황조가)의 배경설화에, 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 ‘꿩 치()’ 자의 치희(雉姬)가 ‘벼 화()’ 자의 화희(禾姬)에게 사랑싸움에서 패하고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이 땅에 수렵시대가 끝나고 농경 시대가 왔다고 해설하기도 한다. 이로 보면 적어도 이 땅의 벼 심기는 이천년은 족히 넘었으리라.

  벼를 탈곡하여 껍질을 벗기면 ‘米(쌀 미)’가 된다. 벼를 경상도 사투리로는 ‘나락’이라고 하는데, 이는 ‘낟알’의 의미와 상통하고, 쌀은 우리식 한자로 ‘()’로 쓴다. 쌀밥은 우리의 주식이다. 김이 물씬 나는 쌀밥 한 숟가락에 김치라도 걸치면 연신 목구멍에 도리깨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속설에는 88번 손을 거쳐야 쌀이 탄생하므로 ‘八十八(팔십팔)’을 엮어 ‘米()’ 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절묘한 해석이다. 88세를 일컬어 米壽(미수)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기실 米()의 갑골문 모양은 벼를 터는 큰 나무막대를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쌀알의 모습이다. 전서에서부터 막대기가 十(열 십)자로 바뀌어 오늘날의 글자 모습이 나온다. 지금 중국에서는 쌀을 大米(대미), 조를 小米(소미)라 일컫는다. 그리고 소리를 취하여 미터(m)를 米()로 쓰니, 백 미터는 곧 百米(백미), 킬로미터는 千米(천미)가 되는 것이다.

  뽀얀 쌀을 米()라고 발음하니 얼마나 이쁘고 미더운가. (아름다울 미)도 味(맛 미)도 같은 발음이다. 白米(백미), 玄米(현미), 米穀(미곡), 米飯(미반)이로다.

  그러나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의 알곡은 ‘稻(벼 도)’라고 한다. ()의 갑골문은 키질을 하여 큰 그릇 담는 모양이고, 금문에는 깃발[(기 기)]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람을 이용하여 벼를 까부는 모습이다. 발음 //인 것은 刀(칼 도)나 搗(찧을 도)처럼 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빻거나 찧는 소리를 흉내 냈다. 밟거나 뛰는 동작도 ‘蹈(밟을 도)’이다. 올벼는 早稻(조도), 늦벼는 晩稻(만도), 볏잎에 반점이 생기는 열병은 稻熱病(도열병), 논에 자라고 있는 벼를 세워 둔 채 미리 돈을 받고 팔면 立稻先賣(입도선매)로다.

  볍씨를 선택하는 방법은 ‘種(씨 종)’ 자에 답이 나와 있다. 볍씨를 물에 담가 쭉정이는 건져내고 무거운[()] 것만으로 새싹을 틔우고 못자리를 만들고 모내기를 한다. 예로부터 모내기는 夏至(하지) 전후가 적기라고 했다. 그만큼 벼는 햇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벼는 확실히 작열하는 태양을 즐길 줄 안다. 種子(종자), 特種(특종), 純種(순종), 雜種(잡종)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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