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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씨 뿌린 붓글씨
- 라이브 서예, 워싱턴 주 터코마 시에서 공연 -
도정 권상호
미국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美國’과 ‘米國’의 둘이 있다. 우리와 중국은 전자를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후자를 사용한다. 글자 그대로 보면 美國은 ‘아름다운 나라’,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처럼 보이고, 米國은 ‘쌀이 많이 나는 나라’, ‘백인이 많이 사는 나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아메리칸’을 줄인 단순한 음차(音借)의 결과일 뿐이다.
좌우지간 나의 관심은 미국에 한국의 문화, 특히 서예 문화를 심는 일이다. 마침 미국 워싱턴 주 터코마 시와 서북미문화재단의 초대로 열흘간 미국을 다녀오게 되었다. ‘제25회 소수민족축제(25th Ethnic Fest)’에 참가하여 우리 먹빛의 오묘함을 미국 사회에 전도하고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다행히도 터코마 시장 메릴린 스트릭랜드(여, 48. Marilyn Strickland)씨는 어머니가 한국계이고, 서북미 문화재단 안경숙 이사장 역시 대구 출신의 무용가이어서 더욱 정감이 갔다. 사실 미 주류사회에 한국문화 알리기에 열심인 안 이사장의 추천으로 3년 전에 이은 두 번째의 초청 방문이다.
지난 7월 25일, 나는 마침내 붓을 타고 나는 기분으로 태평양을 건넌다. 마침 일탈과 잉여 자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름 방학 기간이어서 다행이었다.
며칠간의 워밍업을 거친 후, 드디어 30일 터코마 다운타운에 있는 라이트 공원(Tacoma’s Wright Park)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하나인 ‘라이브 서예(Live Calligraphy Performance)’ 공연을 펼쳤다.
‘라이브 서예’란 말은 ‘2002 한일 월드컵’ 때 남산 한옥마을에서 참가국 32개 팀을 응원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내가 만들어 본 말인데, 지금은 제법 일반화된 용어가 되었다. 각종 행사나 다른 장르와 함께 현장에서 펼치는 서예 퍼포먼스를 말한다.
이 행사를 처음으로 기사화한 문화저널(munhwai.com 대표 김정태)의 타이틀은 ‘한국문화, 소수민족 축제 사로잡았다’, 부제는 ‘도정 권상호가 빚어낸 서예의 신비’였다.
축제에는 84개국 소수민족들이 참여하여 모국의 춤과 음악, 회화, 음식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부스에서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3년 전에는 한지의 우수성을 알릴 겸, 종이 한복을 입고 한글 소개에 주력했고, 이번에는 백의민족의 흰색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모자를 쓰고 종이 한 가운데에 ‘Korean Wave(한류)’라 썼다. 너른 녹색 잔디 위에 수십 미터나 되는 흰 종이를 펼쳐놓은 것만으로도 시각적 감동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1부 공연은 ‘도정(나의 호)의 붓질 마당’, 2부 공연은 ‘함께 즐기는 서예’였다. 종이는 ‘라디오 한국’(사장 서정자)에서 협찬했다.
이윽고 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붓 가락도 흥을 돋운다. 내 팔뚝에는 푸른 힘줄이 돋아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이른바 붓은 노래하고 먹은 춤추는 형국인 ‘필가묵무(筆歌墨舞)’의 마당이다. 얼씨구. 우선 대나무와 난초 등을 쳐 나갔다. 사군자는 서예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그린다.’는 표현 대신에 ‘친다.’고 한다. 노래는 끝나면 허공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붓 자국은 언제나 착하게 그 결과물이 남는 법.
무대 위에서는 ‘팀 코리아’ 소개에 이어 벌어진 춤사위. 순간 도우미들의 협조로 내 작품도 춤을 추며 무대 앞을 지나간다. 움직이는 서예, 춤추는 서예, 흥미롭지 않은가.
매인 무대 위에 오른 38개 팀 가운데 서북미문화재단 단원들이 가장 많은 갈채를 받았다. 화려한 의상으로 차려입은 단원들은 주로 부채춤과 화관무, 북 공연 등을 선사했다. 환호 속에 사회자는 안경숙 단장을 무대로 다시 초대하여 인터뷰와 함께 앙코르 무대를 요청했다. 마침 내가 준비해 간 합죽선을 나눠 들고 즉흥 춤도 선보였다.
2부 공연, ‘함께 즐기는 서예’는 현지인들을 위한 서예 체험의 마당이다. 참여한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생후 처음으로 붓글씨를 맛보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끝이 뾰족한 원추형의 붓, 먹물이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휘청거리는 붓을 잡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잘도 써 내려갔다. 특히 흥미를 끄는 일은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 보는 일이었다.
한류 물결을 느낀 것은, 인사 정도나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사랑’ 또는 ‘대한민국’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살 안팎의 두 여대생은 ‘동방신기, 윤호 사랑해’라고 능청스럽게 써 나가지 않는가.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전미 한인골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철홍 프로는 시종일관 능숙한 솜씨로 한글 붓글씨 시범을 보이며 통역과 한글 홍보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에서 유학 또는 어학연수를 온 다섯 명의 남녀 학생들도 도우미를 자청했다. 고마운 일.
한국 문화와 서예의 홍보를 위해서는 영어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서예가의 영어, 틀려도 좋고, 맞으면 다행이다. 쪽팔림은 순간이나 서예 홍보는 영원하다. 남이 와서 보고 느낀 점을 자국어로 소개하도록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지루하다. 내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시범을 보이고 대화하며, 종이를 펼쳐놓고 붓을 그들의 손에 친히 쥐어 주면서 써 보게 해야 적극적 홍보가 된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한류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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