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은 역사적으로 문자와 관계가 깊은 도시다. 인천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과 강화도 선원사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인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간행·조판한 곳이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제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 맥락에서 인천은 절정의 서예가를 배출했다. 바로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 서예가로 평가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이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검여 유희강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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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와 회화를 함께 공부하며 자신의 서풍을 다듬다”
검여는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부평군 서곶면 시천리(현재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태어났다. 검여가 태어난 지 28일이 되던 날, 그의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검여는 큰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4살 때부터 한문을 익힌 그는 일찍이 서예의 토대를 닦았다. 검여는 1934년 명륜전문학원(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고 1938년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검여는 중국에서 8년동안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 시기는 검여만의 특성을 만든 중요한 시기다. 검여만의 북위해서 서체와 회화적인 공간 구성은 이때 연구하며 만들어졌다.
검여는 해방 이후 1946년 귀향해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에 참여했다. 많은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중책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석남 이경성의 뒤를 이어 2대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7년동안 맡았다.
제1회 서도예술전에 생애 첫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인천문총이 주최한 3회 미술전에는 양화와 서예를 동시에 출품했다. 2회 국전에는 첫 작품으로 ‘념’과 ‘고시’를 출품해 입선했다.
1956년 2회 인천시문화상에 유화를 출품해 미술부문문화상을 수상했고, 6회 인천미협전에도 유화작품을 출품했다. 총 유화작품 22점을 출품했다. 검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검여는 서예에만 몰두했다.
검여는 국전에 초대작가로 등장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대를 양성했다. 검여는 국전에 모두 초대작가로 12번, 심사위원으로 6번 참여했다.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
검여는 자신의 작품을 국전에 출품하며 서예가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검여는 송나라 황정견과 소동파, 청나라 등완백과 조지겸, 조선 말기 김정희 등 여러 서예가들의 서예를 연구하고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등 다양한 서체를 실험적으로 학습했다.
검여는 서예가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6년, 1957년 각각 5, 6회 문교부장관상을 연속으로 수상했다.
검여는 1959년 인천 은성다방에서 1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검여의 여러 서체가 담긴 50여 점을 출품했다.
검여는 국전 특선, 문교부장관상 연속 수상, 국전 추천작가, 초대 작가 심사위원 등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특히 2회 개인전에서 소위 검여체라 불리는 ‘북위해서’ 풍의 행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중후하고 질박함을 보여준 절정기를 보여준 검여는 반신불수로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검여, 정신력으로 육신의 고통 극복하다”
검여는 1968년 9월 7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다. 2주 만에 깨어났지만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 증세로 더 이상 서예가로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검여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적극 권유로 검여는 왼손으로 서예를 시작했다.
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은 도, 양쪽에 날이 있는 칼은 검이라 부른다. 유희강의 아호 ‘검여’의 검이 칼 검이다. 아호에 담긴 운명처럼 검여는 양 손을 사용한 서예가로 부활했다.
검여는 1969년 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첫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0년 국전 초대작가로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3년 서울화랑에서 상형문자를 위주로 한 4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5년 5회 개인전인 ‘검여 유희강 좌수전’을 열고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출간했다.
검여의 강인한 정신력도 하늘의 뜻을 이길 순 없었다. 1976년 10월 16일 절친한 화가 배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쓰다가 17일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검여는 한마디 유언도 없이 18일 운명했다.
검여의 사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전시회 등을 열며 검여를 기렸다. 2006년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이 모여 ‘시계연서회’를 만들었다. 시계연서회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시계서회전을 개최해 그를 기렸다.
같은 해 인천문화재단이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 인물로 검여를 선정하고, 검여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했다.
검여의 유족들(유환규, 유소영, 유신규 등)은 2019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작품 400점과 습작 600점,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
검여의 작품을 검여의 출생지인 인천이 수장고가 없어 한 점도 품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검여의 생가가 있던 서구 시천동 아라뱃길 매화동산에엔 검여 선생의 생가만이 봄 햇살을 맞이하고 있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