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삼청시사전 전후 이야기

3단체 초대작가로 구성된 한시를 짓는 사람들의 모임인 삼청시사,
처음부터 이 단체에 참가하여 활동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에는 좀더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물론 공히 세 작품을 출품하는 일은 같지만
교정을 도맡다시피 하여 참신한 책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이틀을 잠을 못자며 치밀하게 교정을 보았지만
결과는 축사를 제하고는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우짜노...

많은 하객들이 자리를 빼곡히 메웠다.
5시 오픈인데 식전 행사로 계획했던
춤꾼 신미경님의 흥춤은 준비부족으로 식중 행사로 바꿨다.
축하차 은천님과 최바다님도 자리했다.
수원대와 관련하여 송종관 교수(회원) 내외
여숙자 회장, 신동운 사장이 자리했다.

뒤풀이는 죽마고우에서
뒤뒤풀이는 휘호하는 술집과 노래방에서
율산, 장암 셋이서 시작한 자리
율당, 율강 선생까지도 합류...
20대로 돌아가 새벽 4시 귀가.

이튿날 아침의 허무
시간 깨지고, 돈 깨지고, 몸 깨지고, 비참한 출근 전쟁이고...
그래도 정은 깊어졌으니 남는 장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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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소중한 분들
춤꾼 신미경 소개: 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중앙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 국자랑예무단 단장

김혜진: 한국미술관 큐레이터/

평암 이현준(석봉미술대전 주관) 연세 70대 추정/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청시사전에서 회장, 사무국장, 토우 선생과 함께 환담.
권상호
학문에 대한 기쁨을 맞이할 것이다
- 제3회 삼청시사전을 보고

임종현(경기대학교 외래교수)

서예작품은 다른 장르의 작품과 달리 문학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 단순히 관(觀)의 대상만이 아니라 독(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말은 읽을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면면히 이어오는 대문장가들의 명구나 성현들의 지혜와 진리의 말씀들을 붓과 먹을 통해 화선지에 펼쳐 보이면, 보는 이들은 멋진 시와 성현의 말씀을 통해 문학적인 감동을 받고, 거기에 멋진 서체미학까지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예적 특성이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관객이 문자, 특히 한자와 멀어지고 있으며 그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마저 전문성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각자가 지은 글을 가지고 작품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이들이 바로 ‘三淸詩社’인 것이다. 이들의 그간의 활발한 활동을 지켜본 필자로서는 기대를 가지고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선 그들의 필명이 이미 강호에 자자한 만큼 작품들은 서예적으로 뛰어난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서예작품을 감상할 때 획과 결구, 장법들을 위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스타일이지만 이번의 전시는 작자의 생각을 담아낸 시를 일일이 감상해보아야 이들의 전시의도와 맞을 것 같아 시의 해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감상하다보니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도정 권상호의 〈閑居自述〉은 유창한 시흥을 거침없는 필획과 전예를 아우르는 자유분방한 작품으로 일체의 속기 없는 작품이었다. 그동안 발표해온 작품과는 대별되는 작품으로, 표일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수작이었다.
율강 김부경은 〈仲秋佳節〉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획법과 결구를 사용하였다. 강경함만을 강조한 획법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획을 사용하였고, 결구 또한 소밀을 많이 사용하여 딱딱한 느낌을 배제하였다. 그것은 시를 직접 지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의 내용이 아름다운 가을을 맞은 여유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김장현의 작품은 늘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의 작품은 하나도 그냥 쓴 것이 없다. 한 작품, 한 작품이 치밀한 계획과 계산이 들어감 작품이다. 그냥 남들이 쓰는 대로는 쓰지 않겠다는 작가의 확고한 의지가 보인다. 예서로 쓴 〈詠雪〉은 강렬한 획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강경함은 물론이고 결구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글자를 압축하여 납작한가 하면 어느새 길게 처리하여 다양하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게 처리한 참신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해서로 쓴 〈立春〉도 작가의 습서를 거부하는 강렬한 의지가 보이는 작품이었다. 방필의 획을 사용하여 자칫 딱딱해지기 쉬울 수 있는데, 획의 진행상에 움직임을 주어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느낌을 갖도록 처리한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율산 리홍재의 작품을 보면서는 ‘넘치는 끼와 기운을 어찌할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민영보의 작품 중에는 〈蓮〉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절제된 듯한 강직한 잎의 처리와 거친 듯하면서도 철저히 계산된 여백부분의 터치들이 인상적이었으며 화제도 일품이었다. 문인이 그린 그야말로 문인화였다.
송종관의 작품은 경도가 높은 철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예서와 초서에서 보여주는 강경하면서도 능숙한 필치는 그의 서예술이 완숙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소헌 채순홍의 작품은 자주 보아서인지 친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주지의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글씨는 그만의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예서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가 정립되어있고 행초서 또한 북비의 골력과 남조의 전아함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西將臺〉라는 작품은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예서의 납작함에 양감을 넣기 위해 키를 약간 키움으로써 웅강해 보이도록 처리했으며 전서의 자법과 목간에서 보여지는 자형을 적절히 수용함으로써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홍우기 역시 상당한 역량을 가진 작가이다. 그의 예서나 해서는 이름을 보지 않아도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의 나이 아직 쉰 이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만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다. 그의 글씨는 칼을 잘 쓰는 사람의 칼솜씨를 보는 듯하다. 추획사의 시범을 보이는 듯했다. 이번 작품 중에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대전으로 쓴 〈養蜂〉이었다. 그간 많이 발표하지 않는 작품이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 전서를 마치 행서를 쓰듯 거침없는 붓질로 구사하였고, 오른 쪽이 약간 올라가는 해서나 행초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차용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써나간 것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필자는 한문공부를 하면서 진보에 대하여 회의를 수시로 느꼈던 것 같다. 노력도 할 만치 한다고 했는데 내용의 이해는 되지 않고 오히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닌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는 대학자인 주희도 비슷했던 같다. 아니면 그가 가르치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이런 회의에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선생이 시 한 수를 읊었다.

泛舟
昨夜江邊春水生  간밤 강변에 봄물이 불어
艨艟巨艦一毛輕  배가 가뿐하게 두둥실 떴다.
向來枉費推移力  여태껏 배를 끌려 헛수고했네
今日中流自在行  오늘은 홀로 떠서 잘도 가는데

어느 날 봄비가 밤새 내려 강물이 불었다. 강물이 가슴이 벅차도록 뿌듯하게 흘러가고, 그 위에 지금까지 꼼짝하지 않던 배가 두둥실 떠서 강 가운데로 저절로 떠간다. 배를 띄우려고 계획했던 것도 아니고, 배를 가볍게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봄물이 모여서 그 큰 배를 두둥실 띄운 것이다. 공부에 진보가 없다고 고민하지 말라! 어느 날 문리가 터지고 이해가 잘되는 순간을 맞이하여 학문에 대한 기쁨을 맞이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인 것이다.
이렇듯 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시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 문학적 미감을 살려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꾸준히 노력해야할 덕목이다. 자신의 생각을 5자나 7자로 그저 풀어놓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서단에 좋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수작들이 많았다. 기운이 생동하는 획들과 작가주의적 생각이 담은 조형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좋은 전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직접 지은 글들을 서예로 옮겼다는 것은 실로 긍정적이다. 물론 반드시 자기가 시를 지어서 작품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현들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잘 선구하여 쓰는 것이 되지도 않은 시를 마구잡이로 지어서 쓰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문호 톨스토이는 시정이 넘치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문호(文豪)라는 수식어를 붙일 뿐이지 문성(文聖)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반면 성당시대의 시인 두보를 일러 우리는 시성이라 부른다. 그만큼 짧은 문장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시가 어렵고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도 대단하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시는 누구나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두고두고 읽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아직 젊은 작가들이다. 앞으로의 노력으로 더 좋은 시로 작품을 하여 들고나올 것이란 기대를 가져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단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출처 :열린서예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 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