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헌법 7조를 보라 - 대통령 법률가 종교인 교육자 경제인 공무원 예술가 군경의 책무

대통령과 정치인은 미래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과거를 말하지 말고 비전만을 제시해야 한다.
법률가는 과거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적폐청산만 할 것이 아니라 논공행상도 병행해야 한다.
종교인은 현재의 행복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국민의 행복지수가 낮다면 종교인의 책임이 크다. 
국회의원은 소속 당이나 자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의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교육자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를 뿌리는 사람이고, 경제인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이다.
공무원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 아니다. 헌법 7조에 의하면 대민 봉사자이자 책임까지 져야 한다.
예술가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미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에 신명과 재미를 줘야 한다.
위의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24시간 지켜주는 파수꾼은 군인과 경찰이다.

우리가 그나마 무탈하게 '먹고 일하고 놀고 자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덕이라 할 수 있다.      - 권상호의 긴 생각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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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1. 行書는 幸書
杏(살구나무 행, 銀杏 행, xìng) 荇(마름 행 xìng) 倖(요행 행 xìng)
2. 행서는 개성의 출발
個性이란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 個人性의 준말이 아닌가 한다.
3. 행서는 感性 글씨
우리는 정반대로 법칙에서 자유를, 전체에서 개체를 그리고 격식에서 어떤 혼돈을 희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個人性이란 개인의 타고난 특유한 성격.
컬러가 분명한 작품- 개성이나 분위기. 또는 그 작품만의 느낌이나 맛.
individuality, personality
divide (둘 이상으로) 나누다.
know now.
the semicursive style of writing = Semi-cursive script
curve 곡선 straight line 직선
3. 행서는 곡선 중심(곡선은 자연적, 직선은 인간적)

4. 時計를 통하여 視界를 넓히자.
  9-3연습, 12-6 연습, (순행과 역행을 팔로 써 보라. 어느 쪽이 어려운가. 똑같다. 역행이 어렵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  順手 逆手
  * 順逆 ①순종(順從)과 거역(拒逆)  ②순리(順理)와 역리(逆理)  ③순연(順緣)과 역연(逆緣)
노력인가, 운명인가 – 운칠기삼. 그래도 노력편이어야. 왜냐하면 노력은 인간의 몫이므로.

5. 行書 쓰는 법
해서의 법도와 추소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예술성과 실용성이 매우 높다.
⑴ 分解와 連續 - 점획의 시작과 끝이 한숨에 이루어저야 한다. - 言
⑵ 映帶 - 점획 사이가 자연스럽게 照應하는 관계. 해서의 영대는 함축되어 있지만 행서의 영대는 비교적 활달하게 드러남. - 鉤(갈고랑이, 준말은 갈고리), 挑(뜀, 휨) 挑戰, 跳躍, 牽絲(이어짐) 등이 드러나서 모든 글자는 분명히 피가 통하는 듯하고 기운이 생동하는 느낌이 든다. - 基, 悟
⑶ 虛實 - 실획은 실하게 견사는 허하게
⑷ 行氣 - 글자와 글자가 이어진 맛, 위아래 글자간의 조응으로 마치 구슬을 꿴 것과 같다. - 與弟, 興寐
⑸ 變化 - ⓵ 획을 줄이거나 부분적으로 초서법을 원용하기도 한다. - 參, 大, 太, 追, 留
⓶ 붓을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빠르고, 節奏(rhythm)感이 많으므로 반드시 지나치게 붓을 먹물에 담그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먹빛의 濃淡, 潤渴의 변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이른바 ‘帶燥方潤(띠는 빡빡하고, 모난 곳은 윤기가 있음)’과 將濃遂枯(장차 진함에서 옅음에 이름)‘는 해서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흥취를 만들 수 있다.
⓷ 布棋(바둑처럼 벌려 놓는 것)해서는 안 됨 - 魚에서 점을 줄임, 書의 8개 가로획의 변화 추구.
⓸ 동일한 부수를 가진 글자가 이어질 때의 변화 - 使仙傷, 進造近
⓹ 똑같은 글자가 한 작품에 나타날 때의 변화 – 난정서의 20개의 之자와 7개의 一자, 6개의 以자, 4개의 人자의 변화는 意趣無窮
내가 서예(행서)를 지키고, 행서가 나를 지킨다.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켰다.

당나라 때 장회관(張懷瓘)은 "진(眞)도 아니고 초(草)도 아닌 것을 행서라 한다", 
청대의 송조(宋曹)는 "행은 진서(眞書)를 약간 흘리고 간략화한 것으로 쓰기 쉬우며 서로 이어져서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 그 사이에 진하고 가는 획이 나올 수 있으며, 진도 초도 아니면서 모난 것[方]을 떠나 둥글게 되니(員) 곧 해서와 예서를 빠르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후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53년에 왕희지가 쓴 〈난정서 蘭亭序〉인데 이것은 당대의 필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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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서는 해서와 같이 섞어 쓰기도 하고, 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해·행·초 3체를 혼합해 쓰기도 하여 그 조화와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면 서법으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역대의 서가(書家)들은 행서에 치중하여 힘쓰고, 더욱 주의한다.
해서는 행서로, 다시 초서에 이르렀으나 초서는 알아보기 어려워 널리 쓰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필(帶筆)로서 단독감(單獨感)이 연속감(連續感)에 이르게 된다. 행서는 알아보기 쉽고 또 간이하여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서체로 더욱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해서(楷書)의 획을 약간 흘려 쓴 것처럼 보인다.

동영상 강의를 진행하는 중국 최고 명필 전영장 선생의 행서 교본을 샀다. 저자가 바이두에 게시한 동영상을 보니 교본을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하튼 지금부터 저 동영상과 교본을 참고하여 홀로 행서를 공부할 계획이다.
권상호
行書에 대한 고찰
* 배움의 토요일 (學土)
行書는 幸書
行의 의미 – 평생 할 수 있는 것이라곤 言行뿐. 四通八達, 四通五達,
書의 의미
行(갈 행; ⾏-총6획; xíng,háng)

1. 서론
  현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서체는 주로 楷書와 行書이다. 그 중 행서는 한 점 한 획을 일일이 떼지 않고 이어서 쓰므로 적당한 속도감이 있지만 읽기에 그다지 부담이 없다. 편리하면서도 결구와 율동이 아름다워서 實用性과 藝術性을 겸비한 가장 뛰어난 서체라 할 수 있다. 운필법이 비교적 자유로워 변화가 풍부하지만 그래도 절도와 안목을 길러야 한다.

 2. 성립
  일반적으로 行書라 하면 楷書를 약간 흘려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행서의 성립은 隸書의 비능률성과 草書의 난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행서의 효시는 後漢 桓靈(환령) 때의 劉德昇(유덕승)으로 알려져 있다. 행서의 명칭이나 유래는 王義之(왕희지)와 함께 書의 명인으로 추대되고 있는 魏나라의 鐘繇(종요, 151-230)가 行神書(행신서)를 잘 썼다고 하는데, 행서란 명칭은 바로 이 '행신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행서의 역사
1) 漢代
  한 대는 아직 행서다운 행서는 없었다. 당시는 이른 바 ‘波勢의 시대’ 곧, 예서의 시대였다.

2) 三國時代 이후의 東晉
  書聖 왕희지의 탄생은 행서의 성숙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는 ‘喪亂帖(상란첩)’을 보면 가히 행서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행서를 보면 波勢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右回折(우회절)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점과 획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필획의 技巧가 발달하여 예리하고 섬세한 면이 있다. 글자마다 마무리도 특별하며 묘미가 있다.

3) 初唐
  초당은 古典主義, 즉 왕희지 서체의 절정기로 毆陽詢(구양순), 諸遂良(제수량), 虞世南(우세남)이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작품으로는 구양순의 ‘史事帖(사사첩)’과 우세남의 ‘汝南公主墓誌名(여남공주묘지명)’, 저수량의 ‘枯樹賦(고수부)’ 등이 있다.

4) 中唐
  저수량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古典主義가 안진경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격동의 시대이다. 안진경은 그의 해서의 골법 그대로 행서의 필세도 필획의 겉과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전주의와는 다르게 비튼 듯한 기법으로 中鋒 기법으로 붓을 잡아돌려 의지적인 통일력이 전체에 나타나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행서의 표현을 만들어 내고 있다.

5) 末唐
  안진경 이후 이렇다할 만한 대가의 탄생을 보지 못한 시대이다.  柳公權의 聖慈帖(성자첩), 정번즉의 最燈張來目錄跋(최등장래목록발), 杜牧(두목)의 張好詩幷序(장호시병서) 등이 유명하다.

6) 宋代
  송대에는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미비라는 걸출한 대가들이 출현한다.  소식(1036~1101)은 詩, 詞, 故, 書畵에 모두 능한 천재로 東波道人이라 불리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黃州寒食詩 등이 있다.  또한 송대 최고의 서가로 불리우는 그의 글씨를 보고 筆意를 느껴 폭넓은 공부를 하여 自成一家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이러한 대가들을 배출한 것과 더불어 강한 의지, 강한 주관을 표출하는 表出主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7) 元~淸
  이 표출주의의 탄생이후 南宋으로부터 元으로 또 明으로 反古典의 바람은 확산되어 간다.  원의 趙子昻(조자앙)이나 明의 文徵明(문징명) 같은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가 나타나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반고전의 운동은 끊임없이 생겨나 명말에는 浪漫主義의 흥성과 더불어 草書의 기법인 蓮綿勢(연면세)의 도입과 金石學의 행서 필법에의 도입등이 나타난다.  명말의 낭만주의는 해서 필세인 연면세를 행서에까지 도입하여 행서의 신경지, 즉 楷書적 구성을 초월하여 유동감을 가미하게 된다. 이 신경향은 명 말부터 청초에 걸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청대에서는 老古學古文書學의 한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금석학의 필세에의 도입이 시도된다.  이러한 시도를 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趙之謙(조지겸)으로 古法을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파괴의 무법자'로 보여 많은 배척을 받았다. 원래 북위의 石刻이라면 해서로 극한되는데 그는 여기서 찾아낸 유형을 다시 행서의 형까지 끌어들여 북위의 석각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지성으로 새로운 행서를 등장시킨다.  조자앙의 출현은 중국적 현대의 출발을 의미한다.

8) 現代
  지금 중국은 커다란 회전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館閣體(관각체)를 해방하라는 소리가 널리 외쳐지고 있다.  관각체란 관공서의 체, 즉 관료체로서 이것은 곧 전래의 고법을 의미한다.  옛날 魯邊(노변)이란 사람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中華의 사상을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관각체의 추방운동과 이 사상을 비교해서 본다면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4. 행서의 필법
  행서는 楷書를 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 書法도 해서의 그것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書藝의 모든 書體가 외따로 튀어나온 것이 없으므로 서법이란 것이 전체를 꿰어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해서와 행서의 다른점을 살펴보면, 해서는 주로 藏鋒(장봉)으로 쓰지만 행서는 露鋒(노봉)으로 쓴다.  藏鋒(장봉)을 감추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붓끝의 흔적일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반대로 露鋒(노봉)은 붓끝을 드러내어 쓰기 때문에 끝이 드러나게 된다.  다음으로, 해서는 붓을 대고, 밀고, 들고해서 한획 한획을 쓰지만 행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데 행서는 해서와는 달리 외연적 연결성이 뚜렷하므로 筆順을 잘 알아서 한꺼번에 써 내리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행서에는 미약한 虛劃이 있다.  해서에서도 갈고리를 할 때 허획이 생기지만 행서보다는 덜하다.  행서에서 연결성은 허획으로 강조되는 경우가 많응데 이 허획을 實劃과 구분하여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어 좋은 글씨가 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행서를 쓸 때 문제점은 中鋒과 側鋒(편봉이라고도 함)인데 해서는 거의 중봉으로 쓰지만 행서나 초서는 중봉으로만 쓰기에는 묘미가 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된다.  초심자는 당연히 중봉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 연륜이 쌓였다고 느낄 때 조심스레 편봉에 눈을 돌려야 하리라 본다.  행서를 꿰뚫는 대원칙의 하나가 행서를 쓰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막히는 곳이 있으면, 해서를 찾아보면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행서의 대표적 작품
1) 蘭亭敍(난정서) : 왕희지의 난정서는 행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晉(진)의 穆帝(목제)때인 永和 9년 (353) 3월 3일, 강남의 문인, 묵객 41명이 會稽山陰(회계산음)의 蘭亭(난정)에 會合하여 契事(계사)를 지내고, 流觴曲水(유상곡수)의 연을 베풀어 시를 지으며 봄날을 즐겼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는 서빈필로 蠶繭紙(잠견지)에 시의 서문 초고를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난정서로 그 자신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유언으로 그의 무덤에 같이 묻게 하였으므로 진본은 남아 있지 않고, 후세에 전하여 오는 것은 당시의 능서가들이 임서한 것이며 여러 종류가 있다.

2)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 : 집자성교서는 당의 僧(승)인 현장법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친히 태종이 서문을 짓고 고종이 그 記(기)를 적어 현장이 번역한 心經과 같이 새긴 것으로 글씨는 흥복사의 승려인 懷仁(회인)이 왕희지의 진적 행서중에서 한자씩 모아 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무려 1792자나 되며 회인 반생에 걸친 노력의 결정이라고 한다.  청아한 선과 기품이 높은 이 글씨는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을 일컬어 온다.  다만 한자한자 집자한 것이기에 글자사이의 필의가 이어지지 않으나, 왕희지의 행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枯樹賦(고수부) : 고수부는 저수량이 35세때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운필에 미묘한 변화가 있고, 탄력이 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그리고 글자가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아 보이고, 글줄기가 굽어 있으나 필의가 잘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다.

4)爭坐位帖(쟁좌위첩) : 쟁좌위첩은 草稿(초고)로 쓰여진 것으로 고래 안진경의 삼고중의 하나로서 유명하나, 왕희지의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용필에 꾸밈새가 적고, 장봉, 원필로서 선이 비교적 굵고 둥근 맛이 난다.  그리고 운필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라 할 수 있고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서첩에는 행초중에 많은 해법이 섞여 있다.  넓고 소박한 마음으로 대범하게 써 나가면 이 서첩과 서로 호흡이 맞을 것이다.

5) 松風閣詩券(송풍각시권) : 황산곡이 58세때(1103) 流謫(유적)의 몸으로써 湖比鄂城縣(호비악성현)의 樊山(번산)에서 쉴 때 이 지역의 토지의 풍경을 사랑하고 산중의 노송사이에 있는 한 누각에 松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쓴 것이다.  이 시구에'東波道人(동파도인)이 이미 샘물에 잠기고 張候(장후) 언제라도 눈앞에 떠오르네'라고 있는데 이 때에 소동파는 이미 죽고 장후가 오게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는다.  하룻밤 비에 젖어 추워진 계곡을 바라보고 오로지 거듭되는 궁핍한 역경을 벗해 여러 친구와 酒遊(주유)할 수 있을 거라고 비탄한다.  황산곡이 만년, 憂悶(우민)의 생각을 품과 四川地方에 있었던 때의 작품은 기상이 매우 높은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6) 范滂傳(범방전) : 崇年(숭년) 4년(105) 산곡이 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정치상의 신구양당의 싸움이 있어, 정권을 취하고 있는 신법당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구법당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황산곡도 그 중 한사람으로 만년에는 이와같은 가장 궁벽한 시골로 추방되었다.  거기에서 한 대에 있어서 청절이 높은 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范滂(범방)의 전기를 휘호하는 일을 그 지방관리를 지낸 여씨가 청탁했다.  그때 산곡은 범방전을 암송하여 대서했다.  끝마칠 때는 겨우 2-3자의 오자만 있었다고 한다. 

행 서 ( 行 書 )
 
1)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 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 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제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 집 자 성 교 서 ( 集 字 聖 敎 序 )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 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 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 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 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워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 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이라 구분해 부른다.
권상호
이육사·윤동주 ‘친필원고’ 문화재 된다
5G는 최대 다운로드 속도가 20Gbps, 최저 다운로드 속도는 100Mbps인 이동통신 기술이다.
5세대 이동통신[5G Networks] 1GB를 10초 안에 내려받는 시대. L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