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만주 여행 중에 쓴 글씨 5품

만주에 가고 싶다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여순감옥

지금 그곳의 간판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로 적혀 있다.

1907년에 건축된 건물이니 꼭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발해의 수도 동경성과 하얼빈까지.

다시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5시간이 걸린다.

압록강(鴨綠江)이다.

두만강이 ‘(동해로) 도망가는 강이라면

압록강은 ‘(앞으로) 누비는 강인가.

머리가 푸른 물오리가 많아서 붙인 이름인가.

6.25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반이 끊어진 채 그대로 놓아둔

압록강 단교(斷橋)를 지나 위화도를 지나

북한 신의주를 지척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위화도는 최근 북·중 간의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중국에 50년간 조차되었다고 한다.

인근의 황금평과 함께 50년 조차에 50년 연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북녘의 강토가 천연자원과 더불어 하나 둘씩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2017. 8. 14. 강의 자료 - 涂丁 权相浩 
북저(北渚) 김류(金瑬)의 ‘부서심양(付書瀋陽)’
高梧葉落雨凄凄 높다란 오동나무 잎 떨어지고 찬 비 쓸쓸히 내리는데
塞路三千夢迷(亦)迷 변경(邊境) 가는 길 아득히 머니 꿈속에서도 헤매네.
欲向征人寄消息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소식 보내려 하는데
一行書又萬行啼 편지 한 줄 쓰자니 눈물이 억수같이 흘러내리네.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나라가 치욕을 당하고, 백성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김류(1571, 선조 4~1648, 인조 26)는 안산 사람으로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으로 후에 영의정을 지냈고 시(詩)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외아들 김경징이 강화도 패전의 책임으로 사사(賜死)되는 쓰라린 고통을 겪고,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에 칩거하였다.
이 시는 1640년(인조18) 호란으로 청(淸)에 붙들려간 김상헌 등 3학사 등의 소식이라도 알고자 해도 감감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려 하나 그들을 생각하면 글 한 줄 못 쓰고 눈물이 앞서는, 깊은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쓸쓸한 배경을 통하여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지정(憂國之情)과 비애지통(悲哀之痛)을 느낄 수 있다. 청나라에 항복한 후 두 왕자와 척화파 신하들이 붙잡혀 가고, 또 김상헌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출병에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에 붙잡혀 갔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심양에 편지를 쓰는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기구는 쓸쓸한 가을비다. 높이 솟은 오동나무에 잎은 지고 가을비가 처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높은 오동나무는 조선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상관물이기도 하다. 승구는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다. 한양에서 심양이 삼천리 떨어져 있고, 심양으로 향하는 길이 굴욕스러운 길이기에 꿈에서마저 심사를 어지럽게 한다. 전구와 결구는 편지를 쓰며 느끼는 통분한 심정이다. 심양으로 가는 사람에게 편지를 부쳐 보내려고 글을 쓰면서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범벅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청나라의 침입에 굴복하여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통분한 심정이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응하(金應河)의 ‘別恨(이별의 한)’
天涯各南北(천애각남북) 하늘 끝 남북으로 서로 나뉘니
見月幾想思(견월기상사) 달 보며 몇 번번이나 그리워했던가.
一去無消息(일거무소식) 한 번 가고는 소식조차 전혀 없으니
死生長別離(사생장별리) 생과 사는 기나긴 이별이런가.
김응하(1580~1619)는 조선 중기의 무신. 선안동김씨. 1618년 명이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따라 좌영장으로 출정했다. 이해 3월에 부차령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조선의 원군도 후금 군대에 항복했을 때, 3,000의 군사로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1620년 명 신종(神宗)으로부터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청나라와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의 대표자였다.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主和派)의 대표인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가려 하자 국서를 찢고 통곡했다. 임금이 항복문서를 가지고 산성을 나가려 하자 김상헌은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삼학사가 죽은 뒤 3년 후 청나라는 그를 위험인물로 지목했다. 그는 심양으로 끌려가 심양에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 청의 굴복 요구에 끝까지 거역하며 저항했다. 이 시조는 김상헌이 청나라로 붙잡혀 가는 길에 삼각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조이다.
북한산의 원래 이름은 삼각산이다. 3개의 높은 봉우리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87m)가 삼각을 이루었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린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북한산의 정기를 말살하려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북한산으로 개명하였다. 지금 삼각산으로 고쳐 부르자는 운동과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세 학자인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을 말한다. 삼학사란 이름은 1674년(현종 15)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편찬하면서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청 태종의 12만 군대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함께 47일간 항쟁하면서 끝까지 싸울 것, 곧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청에 끌려간 삼학사는 청태종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아 심양에서 참형을 받게 된다. 남한산성에는 삼학사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한 현절사(顯節祠)가 있다. 현절사는 숙종 때 세운 사당이다.
경이 한 장의 글월로 – 광해가 이이첨에게 경계한 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다. 하지만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경계를 받았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는 교사를 역임하여 신임을 쌓았으며 조식의 제자이자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가르침을 받았고 허균(許筠)과 친밀하게 지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동궁(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상궁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했다.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하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옹립했던 유영경 등은 모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이첨은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뒤 사사(賜死)하였으며, 광해군의 조카인 진릉군(晋陵君)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하였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과거(科擧)를 주관하게 된 것을 기화로 소북파(小北派)는 완전히 전멸하였으며 서인과 남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로써 대북파가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1613년(광해군 5년) 서양갑(徐羊甲)과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자백하게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안치하여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1617년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광해군이 호패법을 실시하려고 하자 정인홍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중단시켰는데, 이는 당시 이이첨과 정인홍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 임진왜란 때 소집된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힌 뒤 이튿날 참형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대북 소북파
1602년에 임진왜란 때의 타협적 정책을 빌미로 정인홍의 탄핵을 받은 유성룡이 밀려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북인은 고위 관료 중심의 대북과 신진 세력인 소북의 두 개 정파로 구성되었으며, 선조 말기에는 소북이, 광해군 대에는 대북이 집권했으며, 소북은 영창대군을,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1606년에는 인목대비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치열해졌다. 선조가 1608년에 세자 문제를 결정 짓지 못하고 사망하여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광해군을 적극 지지한 대북이 집권당으로 부상했다. 이이첨과 허균, 홍여순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골북(骨北)·중북(中北)으로 나뉘며, 소북은 청소북(淸小北)·탁소북(濁小北)으로 분열한다.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북인은 몰락하였고, 특히 광해군 재위 당시 집권당이었던 대북은 거의 전멸하였다. 이후 동인의 전통은 서인의 보복을 피하여 살아남은 남인과 일부 소북이 잇게 되었다.

위키백과 – 붕당의 계보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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