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여가 선용으로 얻은 결실 (KBS 근로자미술제 서예 부문 심사평)

여가 선용으로 얻은 결실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도정(塗丁) 권상호(權相浩)

국가 산업의 주춧돌로서 주야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붓을 잡고 예술 활동을 펼쳐, 마침내 땀방울을 먹방울로 열매 맺은 출품자 여러분께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각박한 삶 속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는 여러분은 어쩌면 낭만파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융합문화의 선두 주자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여러분의 일과 예술 활동을 본다면 과연 풍류 민족으로서 풍류지도(風流之道)를 지키고 있구나라고 감탄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탄생하면서 인류는 쓰기 시대(writing age)’에서 누름 시대(tapping age)’로 바뀌는, 문자 생활의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편리한 볼펜조차도 가지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준비와 절차가 복잡하고 오랜 수련을 요구하는 서예에서 동양 미학의 정수를 찾는 여러분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문화 지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번 38회 근로자미술제 심사에서는, 많은 출품작 중에서 한문·한글·문인화·캘리그라피까지 합쳐서 22점만을 입상작으로 뽑아야 한다는 극히 좁은 선발 기준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되도록이면 부문별 출품 수에 비례하여 선별할 것을 약속하고 심사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전체 작품 수준을 둘러보면서 좋은 작품일지라도 오·탈자가 있으면 내용을 모르고 썼거나 무성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선택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작품을 출품했을 때에는 잘 쓴 하나만을 골라서 경선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출품 시차를 달리하기도 하고, 장르를 바꿔가며 여기저기에 출품한 사람이 있어 다소 혼선이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기록경기가 아닌 작품 심사는 심사위원의 미적 기준과 심미안에 따라 등위가 바뀔 수도 있는데, 이날은 놀랍게도 시종일관 큰 이견(異見) 없이 순조롭게 합의 심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본 행사에 대한 더 큰 호응을 기대하며 심사 과정을 말씀드립니다. 우선 응모 작품이 타 공모전에 출품했는지의 여부 확인, 응모 작품의 예술성과 창작성을 기준으로 하되, 획법·자법·장법 등의 기본을 지켰는지 살폈습니다. 장법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억지로 종이에 글자를 나눠 쓴 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몸에 맞는 옷을 골라야 하는데, 옷에 맞는 몸을 만드느라 고생한 격이지요. 그리고 낙관문을 쓰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글자의 크기 및 위치가 잘못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명인과 호인의 처리에서도 미숙함이 더러 노출되었습니다.

물론 금상, 은상, 동상 권에 들어가려면 이러한 여러 조건 외에도 필력과 독창성과 함께 좋은 문장과 먹빛도 뛰어나야 하므로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나마 부문별 최고 작품은 위의 조건들을 잘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금상에 선정된 단연 서필숙 씨의 궁체 정자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는 정교하면서도 유려함을 잃지 않은 수작이었습니다. 은상에 선정된 효천 전재규 씨의 이백 시 초서가행(草書歌行)’은 핵심 어구를 부각한 장법이 남다르고 북위 해서를 바탕으로 한 개성적 서체에 진지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문인화 부문과 캘리그라피 부문은 출품 수가 적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출품작 비율로 보면 한문이 절대적으로 많았고 수준 또한 높았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입상작에도 많이 선발되었습니다. 한글은 출품 수는 적어도 뛰어난 작품이 많아 선별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문인화 부문에서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더러 있었지만, 화제에 약점이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캘리그라피 부문은 개인차가 상대적으로 심했으며,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배경 그림에 가려 주제가 혼돈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많은 낙선자에게 패배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평소 좋은 글과 잦은 붓질을 통한 자기 수련에 더욱 매진하시길 기원합니다.

 

2017.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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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 수상작 전시: 2017. 10. 19(목) ~ 25(수)

구성궁예천명
https://www.youtube.com/watch?v=KNyuTr9F7ks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 – 이동국
https://www.youtube.com/watch?v=QtuNnRBKr_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