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묵가논단 - 미어캣처럼 드론처럼 (줄인 내용)

묵가논단

미어캣처럼 드론처럼

 

권상호(문학박사, 칼럼니스트)

서울에 살면서 그나마 보람이라면 붓끝을 닮은 삼각산 인수봉을 습관처럼 바라보는 일이다. 위용을 갖추었으면서도 부드러운 저 봉우리보다 뛰어난 조각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인수봉은 누구의 작품일까. 날카로운 칼이나 단단한 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비와 흐르는 바람의 작품이었다.

그렇다. 엄정한 사초(史草)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글씨를 남긴 주인공도 바로 부드러운 종이와 흐르는 붓이었다. 부드러워서 붓이라 하는가, 아니면 붙잡으라고 붓이라 하는가. 세종 때의 붓의 표기는 이었으니 두 가지 생각이 다 가능하다.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싸움을 보면 당장은 딱딱함의 승리로 보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보면 언제나 부드러움의 승리였다.

자동차 모는 것을 운전(運轉)이라 하듯이 붓을 운용하는 것을 운필(運筆)이라 한다. 자동차 운전을 위해서는 면허증이 필요하듯이, 붓을 다루기 위해서는 운필법(運筆法)을 알아야 한다. 일단 운전면허증을 따면 도로 표지판과 노면 표시에 따라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음껏 달릴 수 있듯이, 운필법을 알면 어떤 서체든 마음껏 써 내려갈 수 있다. 그러나 운전 시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하듯 글씨도 방향을 전환할 때는 아프리카의 귀여운 동물 미어캣(meerkat)처럼 붓끝으로 오뚝 서서 주변 동정을 잘 살피고 난 다음에 나아가야 한다. 발음으로는 자동차도 붓도 지면위를 달린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런데 자동차는 평면이동에 그치지만, 붓은 평면이동에 상하이동을 더한다. 붓글씨를 쓰는 동안 붓은 드론과 같이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공간이동을 하므로 흔히 서예는 어렵다고들 한다. 알고 보면 붓털 하나하나가 굽혀졌다 펴졌다 하는 굴신성(屈伸性) 덕분에 서예가 예술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본다.

서예를 좀 더 품위 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운필의 평면이동뿐만 아니라 상하이동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을 획의 모양이 아닌 동작으로 이해해야 하듯이 모든 운필법도 동작으로 접근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붓의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상관관계로 먹을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붓의 평면이동은 전후좌우 사방팔방 경계가 없고 붓을 끌고 다니면 된다. 평면이동 방법으로는 장봉(藏鋒)과 노봉(露鋒), 중봉(中鋒)과 편봉(偏鋒), 방필(方筆)과 원필(圓筆), 전필(轉筆)과 절필(折筆) 등의 여덟 가지가 있고, 여기에 상하이동 방법인 제필(提筆)과 안필(按筆) 두 가지를 합하면 운필십법(運筆十法)이 완성된다.

여기에서 ()’ 자는 위로 끌어올리다(提高)’의 뜻이고, ‘()’ 자는 이와 반대로 편안히 누르다(壓筆)’의 뜻이다. 따라서 제필은 붓을 끌어올려 세우는 필법이고, ‘안필은 붓을 지그시 눌러 호를 구부리는 필법이다.

호를 미어캣처럼 일으키며 제필할 때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봉(筆鋒)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묵객들이 붓은 세워야 맛이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는데, 이 말은 객담이 아니라 서예의 법어이다.

그리고 한 획의 시작을 시필(始筆)이라 하지 않고 굳이 일어날 기()’ 자를 써서 기필(起筆)’이라 하는 것을 보면, 제필이 먼저이고 안필과 행필은 그다음임을 알 수 있다. 제필과 안필의 연속을 인체 비유하자면 유문괄약근(幽門括約筋) 운동과 같다. 유문괄약근은 숙변(宿便)을 가둬두었다가 배출하는 기능을 하듯이, 제안은 먹을 가둬두었다가 배출하는 기능을 한다.

운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금종(擒縱)과 돈좌(頓挫)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금종(擒縱)에서 사로잡을 금()’ 자는 붓을 꽉 잡으며 수렴(收斂)함을, ‘풀어놓을 종()’ 자는 붓을 느슨하게 잡아 방종(放縱)함을 뜻한다. 곧 금종이란 시종일관 붓을 꼭 잡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붓대를 쥐었다 풀었다 하며 쓰라는 말이다. 서예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지실장허(指實掌虛), 오지집필(五指執筆) 등을 운운하면서 붓을 꼭 잡으라 하는데, 골프채나 당구 큐를 잡을 때도 때에 따라 강약이 있듯이 집필 때의 손가락 힘도 강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돈좌(頓挫)에서 조아릴 돈()’ 자는 획을 그어나가다가 미어캣처럼 멈추고 서서 고민함을, ‘꺾을 좌()’ 자는 획이 나아갈 방향과 길이가 결정되었으면 안필하여 나아감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가 걷다가 방향을 바꿀 때, 발끝으로 찍고 턴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볼 수 있다.

필봉의 노장(露藏굴신(屈伸)의 변화는 영활(靈活)하면서도 듬직하다. 때론 신출귀몰하듯 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숨죽이고 붓걸이에 매달려 있다.

붓털로도 감정 표현이 부족할 때에는 숫제 붓대를 끌거나 밀기도 한다. 운필에는 인간의 모든 동작이 깃들어있다. 때론 붓대를 밀고 당기기도하고, 때론 들었다 놓았다 하는 모습은 마치 드론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자유자재하다. 그때마다 필봉의 크기와 붓털의 탄력에 따라 붓 맛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인수봉 위에 구름 한 점이 흐른다. 인수봉이 썼나 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

권상호
프랑스의 소설가 뒤마의 작품인 '삼총사'에는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작은 몸의 포유동물로 집단생활을 하는 미어캣은
저 구호를 가장 잘 지키며 살아가는 무리 중 하나입니다.
먹이피라미드에서 아래층에 위치한 미어캣들은
천적인 맹금류를 경계하기 위해 순번을
정해서 감시합니다.

그리고 자기 차례의 보초 순번이 오면
다른 미어캣이 식사할 때도 땡볕에서 감시하고
적이 공격해 오면 몸으로 동굴 입구를 막아
동료를 지키다 죽기도 하곤 합니다.

우두머리 미어캣을 포함해서 그 어떤 미어캣도
자신에게 이 가혹한 보초의 순번이 돌아왔을 때
보초를 거부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암컷 미어캣은 한 번에 2~5마리 정도씩 새끼를 낳는데
한 마리가 새끼를 낳으면 다 자란 다른 암컷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젖을 만들어내어 새끼들에게
젖을 먹입니다.

단 한 마리가 무리를 위해 죽어가기도 하고
단 한 마리를 위해 모든 무리가 사랑을
베풀기도 합니다.

'올포원, 원포올' (All for one, One for all)

사막의 작은 동물에게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개인주의로 가는 요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요.
----------------------------

# 오늘의 명언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