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미움받을 용기 1, 2 - 아들러 심리학 메모

<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 의학자, 심리학자,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개인심리학’을 창시) 현대 심리학의 3대 거장 – Gigmunt Freud, Carl Gustav Jung과 함께.
의 가르침. - ‘용기의 심리학자’, ‘자기계발의 아버지’.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정면 부정. 사람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목적론’을 내놓았다. 우리는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러의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부른다.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할 용기’가 부족한 거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결정한다.

김정운(문화심리학자)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현재의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
인생의 과제, 인정 욕구, 과제의 분리, 타자공헌, 공동체 감각과 같은 개념 이해.
기시미 이치로(案見一郞)의 탁월한 해석
프로이트식 ‘원인론’ -> 아들러식 ‘목적론’으로 뒤집음.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에 대해서는 돌직구 수준. 미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현재를 살아야 한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다가 만약 미래의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인생은 도대체 무엇인가. 설사 미래의 꿈이 이뤄진다 해도 그 꿈을 위해 희생한 그 숱한 ‘오늘’은 내 인생이 아니다.
인생은 선이 아니라, 點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다.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 욕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나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싸구려 인정’에 목매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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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인가. 단순한 곳인가. 괴짜 철학자.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청년: 아이에게는 근로나 납세의 의무가 없다. 부모나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즐겁게 살아간다. 어른이 되면 세계는 그 본성을 드러낸다.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라는 현실을 매정하게 보여주고, 인생 앞에 기다리고 있던 온갖 가능성이 불가능으로 반전된다. 행복한 낭만주의의 계절은 막을 내리고 잔혹한 리얼리즘 시대가 열린다. 어른- 일, 가정, 사회적 역할... 차별과 전생, 빈부격차...
철학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 그런데 느끼는 정도는 여름과 겨울이 다르다.

첫 번째 밤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는 것이야.
* 역설(Socratic Paradox) 그리스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이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선은 ‘아가톤(agathon)’이라 하는데,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다. 악은 ‘카콘(kakon)’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두 번째 밤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赤面恐怖症.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나에 대해 어떤 모자람을 느끼는 상태.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키가 작아서 고민. 155cm.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 감정이다. – 위압감을 주지 않고,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게 한다. 가치 전환. -> “너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
객관적인 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劣等感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할 수가 없다.”
“A라서 B를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열등 콤플렉스는 우월 콤플렉스
다이아몬드 같은 건 관점에 따라 한낱 돌멩이에 불과.
이 세계에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1달러짜리 지폐를 난로에 던져 넣고 불을 지필 걸세. 코를 풀지도 몰라.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준재이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받지 못한 것.
私憤과 公憤. 공분이 오래간다. 사분은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도구에 불과.
리스트컷증후군(wrist-cut syndrome, 손목자해증후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강박적인 행동이다.) - 목적은 복수이다. 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연에 방지를 위해서라도 싸움을 걸어왔을 때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메모 –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인생의 과제 – 일, 교우, 사랑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다. 연인이 붉은 실로 연결된 사이라 한다면, 부모자식은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된 관계.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다. 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리고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친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선악도 도덕도 아닌 ‘용기’의 문제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로 심리학’이며 동시에 ‘사용의 심리학’이다.

세 번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화폐란 주조된 자유다.”(도스토예프스키 소설)
‘굴레’ ‘인정욕구’ -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인정욕구는 상벌교육의 영향이다.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유태교 교리에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산다.
‘공부한다’는 과제.. ‘과제를 분리’하라.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은둔형 외톨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아이라면. - 일단 ‘이것은 아이의 과제’라고 생각. 개입하려 들지 않고,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그만둘 걸세. 그런 다음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모의 변화를 눈치 챈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도움을 구하거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할 걸세.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리가 가까운 가족이야말로 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것은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임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의 획기적인 점. 아, ‘자유’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을 끊으라. 고르디우스는 과거 프리지아의 국왕이었다.
기원전 4세기경에 활약한 마케도니아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가 프리지아 원정. 신전 기둥에 묶여 있는 전차 한 대. “전차를 묶은 대듭을 푼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되리라” 하는 전설이 있었다. 그는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보자마자 단검을 꺼내 단칼에 끊어버렸네. 그리고 아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왈, ‘운명이란 전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라고.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책과 얼굴의 거리 문제와 같다. 인간관계도 너무 가깝거나 멀면 볼 수 없다.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네. 아이의 신발 끈을 묶어주면 안돼. 예쁘게 빨리 묶어주면 그건 아이의 과제를 빼앗는 것. 완전한 개입이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아들러)
칸트의 ‘傾向性’
진정한 자유란 -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생’ vs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인생’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즉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아버지에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 아들러의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라고 생각.

네 번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내기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과제의 분리- 인간관계의 출발점/ 공동체 감각 – 인간가계의 목표!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 공동체 개념은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를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할 걸세. 사회학에서 말하는 최소 단위는? ‘나와 너’ ‘자기에 대한 집착’은 ‘자기중심적’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폭군 리어왕이 연상된다. 제멋대로인 사람도.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네.
지도로 보지 말고 지구의로 보라. 자네는 공동체의 일부이지 중심이 나닐세.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과제를 분리하면서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시킬까 하는 점.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수평관계’라는 개념일세.
채찍과 당근... 아이들을 기르거나 부하직원을 가르칠 때,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야단치는 방법과 칭찬하는 방법. 그러나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야단도 칭찬은 금물이다’라는 입장을 취한다네. 칭찬은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든다.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상벌교육 부정.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같지는 않지만 대등’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공부는 ‘개입’이지만 아픈 사람을 보면 ‘지원’이다.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는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한다.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만 용기를 얻는다.” 병석에 누워계시는 할아버지는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아이를 이상적인 100점에서 보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걸세.

다섯 번째의 밤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신용(담보 필요)과 신뢰. 信賴의 반대는 懷疑.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 타자공헌의 예- 일, 자신의 존재 가치.
‘자기수용’ - ‘타자신뢰’ - ‘타자공헌’의 순환구조.
일중독자 –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
인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rkl를 실감할 수 있다. 단 그때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철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행복이란 ‘공헌감’이라고.
‘안이한 수월성 추구’이자 불건전한 태도, 앞서 말한 ‘복수’와 연결됨 – 수업 중에 지우개 던지기, 큰 소리를 내어 수업 방해.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 등교 거부, 음주, 흡연 등도. 은둔형 외톨이인 친구.
평범해질 용기 – 자기 수용을 위함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인생이 정상 등정이라면, 인생의 대부분을 途上위에서 보내게 되네. 이는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거라네. 정복 실패하면?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춤을 추듯 살라.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 – 목적론적 인생.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 – 현실태,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과정의 상태. 곧 춤을 추는 인생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 인생 최대의 거짓말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꿀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고 오늘부터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

2권. 2013년 출간. 한국에서는 14년
(전작이 ‘지도’였다면 이 책은 ‘나침반’입니다. 사랑과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첫 번째 이야기 -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라는 핑계
아들러의 철학은 과학일까, 종교일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과학(science)의 어원인 라틴어 ‘스시엔티아(scientia)’는 단지 ‘지식’이라는 의미에 불과.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는 과학과 달리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진’ ‘선’ ‘미’까지 다루네. 이 부분이 아주 큰 핵심이지.
칼 포퍼의 이론 ‘반증이 가능하지 않으면 과학이 아니다’
종교와 철학의 차이- 신의 유무. 종교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네. 신은 세계를 설명하는 커다란 이야기의 주인공이지. 그에 비해 철학은 이야기를 거부하네. 주인공이 없는 추상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지. 철학(philosophy)의 어원인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지혜를 사랑한다’라는 의미가 있네. 즉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愛知學)’이고,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愛知者)’인 셈이지. 거꾸로 말하면, 모든 지혜를 다 알고 완전히 지혜로운 자(지자)가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가 아닐세.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칸트는 “우리는 배울 수 없다. 철학하는 것을 배울 뿐이다.” 철학은 인생을 사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추구하려고 하지 않네. 나는 언제까지나 자아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할 걸세.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히 ‘모른다’고 해야겠지.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소피스트)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네.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는 교육이다. ‘자신의 과제’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라. 공부는 아이의 과제이며 부모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 교육자들은 아이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불법 침입자들인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카운슬링을 치료라고 생각지 않고 ‘재교육’의 장으로 본다네. 교육자는 카운슬러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네. 교육의 목표는 지식 연마, 사회성 기르기, 심신 건강...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自立’이지.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더 나아지길 바라는 욕구를 가진, 즉 ‘우월성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라고 생각하네.  일어서고, 말을 배우고, 의사소통을 하고... 교육이란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인 셈이야.
혼자 살면 지혜가 필요없다. 그러나 타인이 있고, 사회가 있기 때문에 배워야 할 ‘지혜’도 있는 것이다. 지혜 속에는 ‘知性’도 포함되네.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알고 이해하는 것. 아들러는 이것을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했네.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 지식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등의 인간관계를 통해 배울 수밖에 없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가정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교육의 장이라고 할 수 있지.
가정과 학교의 교육에 있어 앞에 든 네 가지가 중요. ‘자립’이라는 목표를 도외시하면 안 된다. 교육은 강제적인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촉구하는 ‘지원’에서 멈춰야 한다.
교육, 지도, 지원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세울 때, 그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존경’이라는 명확한 지침이 있다. 교육의 입구에는 ‘존경’ 외에 없다. ‘자네’가 먼저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나.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네. ‘가르치는 쪽’에 있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쪽’에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존경이 없는 곳에서는 좋은 인간관계는 생길 수 없고, 좋은 인간관계 없이는 자네의 뜻을 전달할 수도 없네. 어떤 문제아라도 존경해야.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아들러와 같은 시대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한 말일세.) 또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존경이란 ‘용기 부여’의 출발점. 존경(respect)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피치오(respicio)’에는 ‘본다’라는 의미가 있네. 먼저 있는 그대로의그 사람을 보는 걸세. 타인을 조정하려는 태도,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절대 존경이 없지.
이 세계에서 어떤 권력자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네. ‘존경’과 ‘사랑’. 권력자에게 고분고분한 것은... 그것은 공포가 깔린 복종. 분노의 광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릴 뿐. 첫발을 내딛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통할 리 없다.
미소를 지으며 “너를 존경하고 있어”라고 말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아니, 존경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닐세. 게다가 그렇게 다가오는 어른의 ‘거짓말’이나 ‘속셈’을 아이들은 민감하게 읽어내지. ‘이 사람을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존경하는 마음은 나오지 않을 걸세.
결론. 존경부터 시작하라, 철학자는 말한다. 교육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는 존경에서 비롯된다면서. 분명 인간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철학자의 주장에도 이해가 가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모든 타인을 존경하라, 학급의 문제아도 세상의 악당들도 전부 존경의 대상이다, 라는 주장에는 절대 반대한다. 게다가 이 남자는 자기의 무덤을 팠다. 간과할 수 없는 모숨을 말했다...
 존경이란 공은 던진 사람에게만 돌아온다는 것을, 마치 벽을 향해 공을 던지는 것과도 같지. 자네가 공을 던지면 돌아올 수도 있어. 하지만 벽을 향해 “공을 던져”라고 외쳐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공동체 감각’ - 영어로 ‘소셜 인터레스트’라고. 이것은 ‘사회에 대한 관심’, 곧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뜻이 되네. 독일어로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게미인샤프트’와 감각을 의미하는 ‘게퓔’을 조합시킨 ‘게마인샤프트게퓔’이라고 했네. 이를 영어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커뮤니티 필링’이나 ‘커뮤니티 센스’가 되었을지도 몰라.
아들러 심리학의 중심 개념이자 난해하기 그지없는 ‘공동체 감각’, 철학자는 이것을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감이라는 기술이 필요하고, 공감의 첫걸음은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 아들러의 사상은 “인간은 언제나 자아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인간의 존엄과 가능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네.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열 명이 있으며, 그 열 명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지.자네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는 것이지.
역사는 늘 승자가 다시 쓰는 것. 우리 개인들도 마찬가지라네.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네. 인간은 과거에 일어난 방대한 사건 중에 지금의 ‘목적’에 합치되는 사건만을 골라서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으로 삼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의 ‘목적’에 반하는 사건은 지워버리는 거지. 아들러의 심리학의 ‘사용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네. 과거가 ‘지금’을 정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의 ‘지금’이 과거를 정하는 것이지.
‘나쁜 그 사람’을 비난하느냐, ‘불쌍한 나’를 어필하느냐.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말은 결국 둘 중의 하나. 삼각주의 한 면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카운슬러 삼각주)
자네가 말하는 과거는 ‘지금의 자네’가 교묘히 편찬한 이야기에 불과해.
아들러의 심리학은 건설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에 대한 존경을 토대로 하는 인간 이해의 심리학이네.

두 번째 이야기 – 왜 ‘상과 벌’을 부정하는가
교실은 하나의 민주주의국가다.
존경부터 시작하라.
교실이라는 공간의 주권자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일세. 그리고 교실의 규칙은 주권자인 학생들의 합의를 통해 제정되어야 하네. 교실을 하나의 국가로 본다면 학생들은 ‘국민’이 되겠지. 교실은 교사가 통치하는 독재국가가 아니야.
...
‘니버의 기도’ “신이여, 바로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를 되새기면서 한 번 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반성문은 시키는 쪽의 자기만족을 그치지.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 머무는 까닭은 결단력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책임지는 상태’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데, 칸트는 이를 ‘계몽’이락 표현했다.
“그런 건 스스로 결정해도 돼”라고 가르쳐줄 것.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 – 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 –가 있으면 제공해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라네.
학생을 의심하는 것은 존경하지 않기 때문. “내 인생은 나 스슬 선택할 수 있다” 영원한 주제.

세 번째 이야기 –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기초하라
공동체 감각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굴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걸세. 공동체 감각이란 뜬구름 같은 이상이 아닐세. 우리 인간에게 내재된 삶의 근본 원리인 셈이지.
교육의 목표는 자립이다. 그리고 교육자는 카운슬러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수평관계에 기초한 ‘민주주의 심리학’인 셈이지.
열등감은 핸디캡이 아닌, 늘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어 왔으니까. 만약 인간이 말만큼 빨랐다면 마차를 발명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자동차도 그렇고.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면 비행기도 발명되지 않았을 테지. 흰곰처럼 온몸이 털가죽으로 덮여 있었더라면 방한복도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고, 돌고래처럼 헤엄칠 수 있었다면 배도 나침반도 필요하지 않았겠지. 문명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약점을 보상하기 위한 산물이고, 인류사는 열등성을 극복하는 과정인 셈이지. 더 나아가 인간은약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만들고 협력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네.
거꾸로 말하면, 인간에게 고립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받지. 그래서 ‘유대’ 갈망.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지. 공동체 감각이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굴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걸세.
교육은 일이 아닌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일로서 학생을 대하지 말고, ‘교우(벗과 사귐, 아들러의 미친 소녀 상담)’로 현장에 나가길. 일, 교우, 사랑이란 세 가지 ‘인생의 과제’를 피하지 말길.

네 번째 이야기 – 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모든 기쁨도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 행위가 아닌 관계. 아들러의 고민 정의: ‘모든 고민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래 고독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그래 사회의 탄생, 그것은 고뇌의 탄생이지. 충돌, 경쟁, 질투, 고독, 열등감... 등의 다양한 고뇌에 직면.
인간의 기쁨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네.
교우의 과제에 대해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네. “우리는 교우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배운다”라고. 이것은 공동체 감각의 정의이기도.
신용할 것인가, 신뢰할 것인가. ‘신용’이란 상대가 가진 조건을 믿는 것‘, ’신뢰‘란 아무런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믿는 것. ’그 사람을 믿는 나는 믿는다‘
아들러, “만약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모든 거서이 제공되는 행성에서 산다면, 게으름이 덕이 되고 근면함은 악덕이 될 것이다.”
타인과 ‘분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어야만 하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지.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인생의 시련이다.
성경,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아들러, “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 사랑하는 인생을 선택하라
이기적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이타적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닐세.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네.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꿔주지.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쌓아올리는 것이다. ‘의지력’을 발판 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네.
‘사랑받는 기술’에서 ‘사랑하는 기술’로. 아들러가 일관되게 설파한 것은 능동적인 사랑의 기술, 즉 ‘타인을 사랑하는 기술’이었네.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다. 공헌감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오로지 믿고 오로지 주는 이타적 태도를 통해서만 교우의 관계가 생긴다네. ‘나’와 ‘너’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우리’라네. 이처럼 인생의 주어를 바꾸어라. ‘나’의 행복도 ‘너’의 행복도 아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립이란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립이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라네. 사랑이란 진정한 자립. 자립이란 경제상의 문제도, 취업상의 문제도 아닐세. 인생에 대한 태도, 생활양식의 문제라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다네. 사랑은 진정한 자립이네.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서 사랑이 힘든 거라네. 상대가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네. 사랑에 몸을 던지는 거지.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라네. 자네가 제어할 수 없지.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일세.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해줄까?’ 하는 것만 보고 사랑한다면 그런 태도로 기다리는 자네를 누가 사랑해주겠나? 이런 자기중심적 욕구에 응해주는 이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 우리에게 운명의 상대는 없다. 의미 없는 ‘만남’을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키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하네. 말을 걸든 편지를 보내든.
사랑이란 ‘결단’이다. ‘운명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세.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은 모든 결정론을 부정하고 운명론을 거부하네. 우리에게 ‘운명의 사람’은 없다. 사랑이란 결단이다. 결혼이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세.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거지. 대상은 누구라도 상관없다.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짝과 ‘지금’을 춤추는 거지. 두 사람이 오래 춤을 추며 그려낸 궤적을 사람들은 ‘운명’이라 부르겠지.
생활양식을 다시 선택하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밖에 방법이 없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다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하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
행복해질 용기.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한다. 그것이 얼마나 고된 길인지를...
단순하게 산다는 것.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계속 단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기 때문이지. ‘처음 한 걸음’이 중요하다고 하네. 터닝 포인트는 그 ‘처음 한 걸음’이 되겠지. 가능하면 아들러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지 말고, 자네 손으로 갱신하게.. 아들러는 ‘모든 사람들의 심리학’이라고 정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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