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말과 글 그리고 서예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26

말과 글 그리고 서예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서 열리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기탁도서전에 다녀왔다. 규장각의 ()’는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로 글이나 문장을 주관하는 별의 이름이며, ‘규장(奎章)’은 임금이 쓴 글이나 글씨를 의미한다. 따라서 규장각(奎章閣)’국왕이나 황제의 친필 글씨를 보관한 건물이라는 뜻이 된다.

숙종 때부터 규장각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창덕궁에 규장각을 세우고 관리를 두면서 학술연구기관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의 도서들이 규장각으로 통합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 관리하다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규장각 소장 도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및 왕실 행사 보고서인 각종 의궤(儀軌)를 소장하고 있다. 책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경성제국대학교 도장이 찍혀있어 가슴이 아려오기도 했지만, 빛나고 매끄러운 한지 위에 쓰인 글씨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금방 쓴 것처럼 살아서 돋아날 것만 같았다.

인간 발명의 최고 작품은 아마 일 것이다. 글씨, 특히 한지에 붓으로 쓴 글씨는 불변성과 영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말은 휘발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일단 입 밖에 나오는 즉시 자취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느 때 어떻게 의미가 왜곡되어 전해질지도 모를 말을 오랫동안 보존하고자 만든 발명품이 바로 글이다. 바로 이 글을 매체로 필묵을 이용하여 종이 위에 점과 획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바로 서예이다.

흔히 말하기는 쉬워도 글쓰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쉬우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고, 어려우면 회피하기에 십상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아껴가며 말하고, 글쓰기는 어렵지만 되도록 많이 써야 한다. 모든 성공한 CEO들은 한결같이 적는 일에 골똘했다고 한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적자생존론이 여기에서 탄생한다. 분명한 언어유희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공한 CEO는 글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능했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은 모두 서예를 즐겼던 분들이다. 바쁜 와중에도 서예를 통하여 자신을 다스림은 물론, 시간을 초월하여 외부와의 큰 소통을 꾀한 분들이다. 이처럼 붓을 통한 소통을 필통(筆通)’이라 하는데, ‘(feel)이 통()해야 필통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과 글은 공기나 물과 같다. 살기 위해서는 공기를 호흡하고 물을 마셔야 하듯이, 피할 수 없는 말과 글이라면 맑고 깨끗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평생 사용할 말과 글이라면 즐겁게 배우고 행복하게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아무도 말과 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을 못하면 언어 장애인으로, 글을 모르면 문맹자로 취급된다. 말과 글을 모르면 서로 간에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사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미개인으로 낙인찍힌다. 미개인은 언제나 문명인의 부림을 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부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글을 익히고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의 계절 이 가을에 말글의 바다인 도서관에 풍덩 빠져 보는 건 어떨까. 미국의 작가이자 최초 페미니스트였던 마가렛 풀러(Margaret Fuller, 1810 - 1850)오늘의 리더가 내일의 리더(Today a reader, tomorrow a leader)’, 곧 오늘 책을 읽는 사람이 내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reader’‘leader’라는 발음의 유사성이 재미를 더해준다.

그리고 맛있게하고, ‘멋있게써야 한다. 맛있는 말은 명곡과 같고, 멋있는 글은 명화와 같다. 말에 맛이 없으면 귀가 더러워지고, 글에 멋이 없으면 눈이 피곤해진다. 멋있는 글을 예술적 견지에서 서예라고 한다. 일찍이 서예는 작가가 공감하고 있는 시대 정서를 문자를 통하여 즉시 표현한 첨단 예술이었다. 그 덕분에 지난 시절 서예는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높은 지위에서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또 시대 정서를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해 서예를 하는 사람은 선택받은 지도자로서 문자권력이란 높은 지위를 누리며 문학과 역사는 물론, 철학과 정치 등의 흐름을 정확히 대변하고자 노력해 왔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생전에 예술품의 존귀한 바는 그것이 우수한 작품일수록 그 시대와 문화를 가장 정직하고 똑똑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까닭에 있다라고 하면서 예술품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서예가는 붓대 같은 굳은 의지로 자신을 지키고, 붓털 같은 부드러운 감성으로 오감을 열어놓고 시대를 읽어왔다. 서예가는 현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붓끝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지킴이요 시대의 대변자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서예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아가던 당대의 키워드와 현실 인식이 붓길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서예가로서 문학과 역사는 물론 종교와 철학, 생활과 윤리에까지 관심을 두고 붓으로 써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를 정확히 읽고 미래를 대비할 줄 아는 당대의 리더였기 때문으로 본다. 체화된 삶을 살아온 서예가는 역사적으로 문자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트렌드 리더의 역할도 충실히 해 왔다.

 

안타깝게도 20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이란 전대미문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인문학은 팽개치고 힘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중요성만을 부각해 왔다. 그리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순수한 경제 정의는 사라지고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끝없는 절정을 향하여 지금도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SNS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온라인 세계가 펼쳐지면서 오프라인 세계는 시들기 시작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남은 온라인 세계에 탐닉하고, 오프라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심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데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청정제 역할을 해야 할 종교는 희석되고, 세칭 자본주의교만이 돈을 교주로 믿고 따르며, 돈으로 모든 것의 서열을 매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인류는 직업군과 실업군, 부유층과 빈곤층이라는 두 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키보드(keyboard)나 키패드(keypad)를 얻는 대신에 붓이나 펜을 잃어버렸고, 컴퓨터를 얻는 대신에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쉽게도 첨단예술의 지위에 있던 서예는 전통예술 속으로 밀려나 물리적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 기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 로봇이 기사를 작성하고 소설을 쓰며,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마주하며 살고 있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

금세기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란 새로운 시대가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과연 인간은 유토피아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산업이 발달하는 와중에도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핵폭탄을 드러내놓고 만드는 게 인간이 아닌가.

밤이 깊고도 길어지고 있다. 이 가을에 책 속의 진리의 샘물을 마시며, 한 번쯤 잊었던 느림의 예술 서예를 즐겨봄 직하지 않은가. 규장각의 그 많은 글씨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머리를 스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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