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세계일보 칼럼- 문자로 보는 세상 28- 숨 쉬는 한지, 한 너머 한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28

숨 쉬는 한지, 한 너머 한

 

우리의 종이를 가리키는 한지(韓紙)’라는 말은 해방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이나 <한국문집총간>은 물론 어느 고전에도 그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서양에서 들어오거나 서양식으로 만든 양지(洋紙) 사용이 일반화되자, 주객이 전도되어 양지를 가리켜 종이라 부르고, 우리의 종이는 ()’ 자를 앞에 붙여 한지(韓紙)’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한지뿐만이 아니라 한복’, ‘한옥’, ‘한방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만든 종이를 당지(唐紙)라 했으니, 조선에서 만든 종이란 뜻으로 조지(朝紙)’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조선 시대 승정원에서 결정된 사항을 기록 반포하던 관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글 창제 이후 종이를 가리키는 말로 됴희, 됴ᄒᆡ, 조회, 조희, 죠희, 죠ᄒᆡ, 죵ᄒᆡ등이 있다. 종이의 어원은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풀이하고 있지만, 종이는 펼치는 순간 밝고 깨끗하게 느껴지고, 일상에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므로, ‘깨끗하다는 뜻의 고어 조타, ‘요긴하다는 뜻의 종요롭다와 관계가 깊은 말로 생각한다. 그리고 종이의 주원료가 닥나무 껍질이므로 닥나무 저()’ 자의 발음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국(韓國)’은 물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준말이다. 한편, 조선 고종 34(1897)에 새로 정한 우리나라의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준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일제 강점기 1919년에 선언한 ‘3·1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을 잠시 살펴보자. ‘吾等(오등)()() 朝鮮(조선)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에서 왜 대한의 독립국임과 대한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한이 아니면 한국이라 했어도 좋았을 텐데. 다행히 3·1운동 직후, 이러한 운동을 진행하려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상하이에 수립한 정부는 조선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문자에서 찾은 재미는, 한국의 ()’과 조선의 ()’, 두 글자에 공통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발음이 서로 다르듯이 문자학적인 출발은 서로 달랐으나 지금은 놀랍게도 두 글자의 왼쪽부분을 똑같이 쓰고 있다. 초원 위로 태양이 솟는 모양으로 해 뜨는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 환인, 환웅, 단군, 해부루, 해모수, 박혁거세, 알영, 김수로, 허황옥, 김알지, 박달, 배달 등이 모두 와 관련된 말이다.

동이족(東夷族)이 만들었다고 보는 갑골문에서, ‘()’ 자는 풀밭() 위에 뜨는 해()’지는 달()’이 동시에 나타난 모습이니 아침의 상황이다. ‘일찍 조()’ 자 역시 해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발음도 ()’와 같다. 그런데 ()’ 자는 아쉽게도 갑골문에서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금문(金文)에는 나타난다. ()(), (), (), (), 등과 음과 뜻이 통하는 글자이다. 우리 역사에서 ()’ 자는 삼한(三韓)시대부터 쓰였는데, ‘크다(), 많다()’라는 뜻의 형용사 하다에서 왔다고 본다. ‘()’은 또한 하늘, 하나, 함께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즉 한자 한()은 순우리말 하다의 관형사형, ‘의 음차로 본다. 따라서 한국(韓國)이라 하면 큰 나라, 하나뿐인 나라, 함께 사는 나라의 뜻이, 한옥(韓屋)이라 하면 큰 집, 하나뿐인 집, 함께 사는 집이란 뜻이 있다.

 

붓의 전신은 이나 이고, 종이의 전신은 갑골(甲骨)’이나 죽간’, ‘비단이나 바위등이었다. 오랫동안 기록은 붓과 종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활자가 붓을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인쇄시대에도 붓과 더불어 만년필, 연필, 볼펜 등의 다양한 필기구가 공존했고 지금도 힘들게나마 버티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컴퓨터나 모바일 시대의 붓은 무엇인가? ‘키보드키패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입력 장치의 하나로 커서를 움직이는 마우스역시 붓의 대용품이라 해야 한다.

그럼 컴퓨터 시대의 종이는 무엇일까? 데이터나 명령을 컴퓨터 내부에 기억하고 있는 장치라는 개념에서는 메모리가 아닐까? 화면으로 보여주는 모니터는 한 장의 펼친 종이로 봐야 할 것이다.

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진부호(二進符號)‘0’‘1’이 아닐까? 먹의 여러 조합으로 다양한 서체가 나타나듯이 컴퓨터는 ‘0’‘1’의 조합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벼루를 대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벼루가 없으면 먹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컴퓨터에서는 프로그램의 명령을 분석, 해독하여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 주는 장치 곧, ‘CPU’가 벼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서체폰트(font)’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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