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정론(正論)과 사론(邪論)을 변론(辯論)함 - 정론(正論)과 사론(邪論)을 변론(辯論)함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33
정론(正論)과 사론(邪論)을 변론(辯論)함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3년 9개월 동안 상식 이하의 통치를 보고도, 문고리 3인방을 비롯한 최측근은 물론 여당까지도 충간한 사람이 없이 모두 부역자로 비판받고 있다. 이에 더하여 받아 적기에만 능숙했던 청와대 출입 기자를 비롯한 언론에 대한 비판 여론도 일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은 ‘언론(言論)’을 통하여 생각하는 힘을 길러보고자 한다. 무언가 논(論)하며 놀 줄 아는 민족은 ‘철학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을 논하고 학문을 논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시국을 논하고 시비를 논하며 촛불을 밝히기도 한다. 더러는 사건의 진위와 인물의 자질을 논하며 논쟁(論爭)을 벌이고, 책임을 논할 때는 논란(論難)이 끊이지 않는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일에 대한 공과와 업적의 우열을 논한 뒤에 치러진다.
찬반 의견은 토론(討論)하고, 내수 진작을 위해서는 토의(討議)해야 한다. 논술(論述)을 잘하려면 논제(論題)를 분명히 파악해야 하는 등 ‘논(論)’을 논함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논(議論)이 맞으면 격려 댓글이 따르지만, 악성 댓글 게시자의 악플은 경계가 없으니 조심할 일이다.
‘논(論)하다’라고 할 때의 ‘논할 논(論)’ 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언론(言論)’ ‘여론(輿論)’ ‘논의(論議)’ ‘정론(正論)’ 등과 같이 그 용례가 많아서 ‘논(論)’ 자에 대하여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언론’은 ‘여론’을 잘 수렴하여,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에 ‘정론’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식으로 엮어보면 쉽게 접근할 수도 있다.
‘논할 논(論)’ 자는 ‘말씀 언(言)’과 ‘둥글 륜(侖)’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씀 언(言)’은 원래 칼이나 도끼와 같은 ‘날붙이’나 죄인을 다스리는 ‘형구’를 뜻하는 ‘신(辛)’이, ‘입[口]’ 위에 있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이는 언론이 말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둥글 륜(侖)’ 자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죽간(竹簡) 여러 개를 끈으로 묶어서 둥글게 말아놓은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책(冊)의 원조이다. 윤(侖) 자 안에 책(冊) 자가 보인다. 방안에서 죽간을 책으로 묶는 모습이 ‘엮을 편(編)’이고, 한 묶음이 완성되면 ‘책 편(篇)’이 된다. 이처럼 말이 책으로 남기 때문에 언론이 여론을 조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사실과 진실은 분명코 하나뿐일 터인데, 인간이 이전투구로 난상토론(爛商討論)을 벌이면 벌일수록 사실과 허위는 더 뒤범벅되고, 진실과 거짓은 더 헷갈려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왜 그럴까. 논하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거짓을 뜻하는 한자로 ‘거짓 가(假)’와 ‘거짓 위(僞)’가 있는데, 두 글자에는 공통으로 ‘사람 인(人)’ 자가 들어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빈부갈등, 남녀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 여야갈등, 보혁갈등, 이념갈등, 남북갈등, 국가갈등 등에서 보듯이 우리는 칡[葛]과 등나무[藤] 숲에서 살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이다. 24시간 내내 쏟아져 나오는 종편방송의 시사 토론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런 걸 두고 ‘맨붕’이라 하나 보다. 언론의 역할은 갈등의 숲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숲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인간이 갈등의 숲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따뜻한 가이드 역할도 해야 한다.
우리말 ‘가짜’는 한자어 ‘가자(假者)’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가게[店]’의 본딧말은 ‘가가(假家)’이고, ‘어림짐작’을 뜻하는 한자어는 ‘가량(假量)’이다. 그렇다면 ‘진짜’라는 말은 ‘眞者(진자)’에서 온 말이 아닐까. 진(眞)과 가(假)를 언론에서 신중하고 분명하게 가려줘야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다. 옥(玉)과 석(石)의 구분은 광부의 몫이지만 진(眞)과 가(假)의 구분은 언론의 몫이다. 언론의 진가(眞價)는 진가(眞假) 구분에서 빛난다.
언론의 사명은 ‘불편부당(不偏不黨) 정론직필(正論直筆)’이다.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음이 불편이고, 공정하여 무리를 짓지 않음이 부당이다.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인 것처럼, 사론(私論)을 공론(公論)인 것처럼 보도하면, 그 나라는 허공에 띄운 풍선과 같이 찢어지고, 민중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 언론은 과연 어떤가. 혹시 나쁜 정치의 도우미는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언론인에게 ‘무관의 제왕’이나 ‘사회의 목탁’이란 말을 그냥 붙여준 게 아니다. 언론인의 역할이 제왕만큼 막중하므로, 언론인은 국민의 사고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칭송하는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한 언론에 대해 취재를 거부하고 비난하는 등의,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대선 이후 언론을 무시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지난 7월 말부터 지금까지 기자회견을 열지 않고, 차기 정부의 주요 인선 내용이나 정책 운용 방침은 트위터를 통해 발표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언론의 불공정성에 대한 대통령의 외면 사례이다.
다행히 지난달 국내에서는 한국언론학회,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 등 3대 학회 소속의 언론·방송학자 484명이 ‘언론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산다’는 기치를 내걸고 자성(自省)과 촉구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언론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자로서 ‘언론의 직무유기’를 지적하지 못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고, 향후 박근혜 정부의 책임 있는 문제 해결과 정치권의 언론법 개정을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의 주된 임무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고, 민주적 여론형성에 앞장서는 일이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고 권력을 감시하는 것은 언론의 임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권력에 대한 감시는커녕 권력과 공모(共謀)하거나 권력을 호위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런 언론은 정론직필(正論直筆)이 아니라 사론곡필(邪論曲筆)이다.
‘역사는 사실(fact)’ ‘문학은 진실(truth)’ ‘언론은 현실(reality)’이다.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현실(現實)’은 ‘지금의 실제 상황’을 뜻한다. 이로 볼 때 진실은 사실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자체로도 거짓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이라는 말은 사실상 존재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런데 언론의 현실은 앞의 사실과 진실은 물론, 현실의 반대인 가공, 진실의 반대인 허구까지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그만큼 크고 무거우므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신속’ ‘정확’이 요구된다. 
중·고등학교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을 보면,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강자의 기록’이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역사를 가장 욕보이는 말은 ‘역사는 쓰인 거짓, 신화는 쓰이지 않은 진실’이라는 말이다. 설화문학의 하나인 신화의 위치에서 보면, 신화는 말로 전해 내려온 구비문학이므로 상당한 존재감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처지에서 보면 분명한 모욕이다. 이는 마치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을 설명하지만,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 설명한다’는 말과 비슷한 논법이다. 신화와 예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역사와 과학의 가치를 슬쩍 떨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언론(言論)은 언품(言品)을 지니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걸어가며, ‘정의의 힘’이 승리하는 현실을 보도해야 한다. 국정농단의 매서운 계절이 다가온다. 날씨야 추워 봐라, 우리에겐 촛불이 있다. 민주정치의 봄날도 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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