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7 - 생각의 근육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7
생각의 근육

아무 생각 없이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여름이다. 후터분한 날씨에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는 일이다. 그런데도 살아있기에 생각해야 하고, 생각해야만 올바른 언행을 낳을 수 있다. 한순간 생각을 놓음으로 말미암아 금주에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현직 부장판사가 성매매 현장에서 적발되는 일이 발생했다.

‘생각(thought)’이라는 말은 순우리말임에도 더러는 한자어에서 온 줄 알고 ‘生覺’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문집에는 물론 왕조실록에조차도 ‘生覺’이란 한자어를 사용한 예가 없다. 중국어나 일본어 사전에도 이 단어는 없다. 이는 ‘선생(先生)님’을 ‘先生任(임)’으로 잘못 쓴 것처럼, 의미와 상관없이 비슷한 음만 취하여 한자로 옮겨 쓴 ‘취음자(取音字)’일 뿐이다. ‘생각나다’에 ‘-나다’라는 접사가 붙어있는 걸 보면 ‘날 생(生)’ 자를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없던 것이 새로 있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 ‘생기다’도 ‘생(生)’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영조 때의 몽골어 학습서인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1741)>에는 ‘제 生覺’, 김천택의 시조에는 ‘님 生覺’과 같은 예가 보이는 것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부터 ‘生覺’이란 한자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근거가 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로부터 1950년대까지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는 한자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生覺’으로 표기한 예가 많이 나온다.
고어에서는 ‘생각’을 ‘ᄉᆡᆼ각’으로 표기했다. 한자어 ‘생사(生死)’도 ‘ᄉᆡᆼᄉᆞ’로 표기하듯이 고전 에서는 ‘생’ 자는 사용하지 않았다. ‘생각’과 같은 뜻으로 ‘ᄉᆞ랑’이란 단어가 있었는데, 이 말은 ‘생각’이란 의미 외에 ‘사랑(愛)’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하기야 생각 없는 사랑 없고, 사랑하면 서로를 생각하게 되겠지만, 한자 애호가들은 ‘사랑’도 ‘사량(思量)’에서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도대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되기 전의 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이란 우리의 판단이나 인식, 혹은 기억이나 느낌 등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이전에, 머릿속에 남아있는 ‘추상적 언어’를 뜻한다. 우리는 생각에 의존하며 삶을 영위하고 생각이 낳는 언어로써 대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언어와 행동은 생각의 자식에 불과하다. 또한, 지식이란 생각의 축적이고, 축적된 생각을 이용해 인류는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열어가고 있다.
누구나 ‘생각’이라 하면 떠오르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의 명언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라틴어 명제는 방법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는 또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역시 프랑스 철학자인 파스칼(1623~1662)도 ‘생각’에 대한 명언을 남기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Man is but a reed, the most feeble thing in nature, but he is a thinking reed.)”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생각에 있으므로, 생각으로 자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잘 생각하기’에 힘쓸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라 했다.
인간을 가리키는 학명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있다. 흔히 인간에게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를 근거로 한다. 철학에서 이성이란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진위와 선악을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말하고,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을 일컫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성적, 합리적 사고만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적 사고를 포함한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철학자가 되어 간다.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생각의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많은 경험에서 오는 직관의 눈이 요구되기도 한다.

동양의 ‘생각의 뿌리’는 ‘사무사(思無邪)’에서 출발한다. 사무사는 공자가 <시경(詩經)>을 산정한 후에 고백한 말로 ‘생각이 발라서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주고받는 문자 중에는 ‘좋은 생각’, ‘깊은 생각’에서 우려낸 사무사의 글들이 많다.
그리고 공생(共生)의 철학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다. 이 말은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編)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 처지가 바뀌었다면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말로서, ‘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대립하는 의미이다.

세상은 바뀌었다. 이른바 ‘빅 데이터 시대,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칫 자신을 잃기 쉽다. ‘내 생각’은 줄어들고, ‘남의 생각’의 조합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생각의 근육’을 길러야 한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정해 놓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자. 흔히 “생각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한다. 알고 보면 이때의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군걱정에 지나지 않는다. 실천이 따를 때 ‘진정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생각도 생명체와 같아서 이의 건강을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을 기를 필요가 있다.
첫째, 매일 아침 ‘생각의 새순’을 싹틔우자. 밤잠은 매일 죽는 연습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침의 기상은 환생이라 할 수 있다. 잠보다 더 귀한 ‘생각 보약’은 없다. 잠자는 동안 모든 잡념일랑 일체 지워버리고, 새벽 시간 조용히 산책하면서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자. 그러면 생각의 새순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그 옆에는 생각의 맑은 샘물이 넘쳐흐르리라.
둘째, ‘생각의 날개’를 달자. 이는 균형 잡힌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의 날개로는 하늘을 날 수 없듯이 하나의 생각만으로는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한 생각이 한 곬으로 잘못 치우치면 고집불통이 된다. 생각이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아집에서 오는 악념(惡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셋째, 생각이 춤추게 하자. 생각이 춤을 추어야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이는 기존 생각의 틀을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가끔은 주제넘은 생각을 해야 한다. 주제넘은 생각에서 창의적인 발상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생각도 쉬게 하자. 삶을 리셋하기 위해서는 생각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독서가 생각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이라면, 휴식은 생각에 산소를 공급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은 생각이 깊은 민족이다. 국보 제78호, 제83호, 제118호가 모두 오묘한 생각에 젖어 있은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란 것만 보아도 사유(思惟)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모습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세로 한 손을 가볍게 턱밑에 고인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프랑스 조각가 로댕(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매우 불편한 자세이다.
생각이란 수용적 평화인가, 선택적 고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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