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4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4

지구의 지구력

 

청명(淸明)의 비는 나무에게 속삭이며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곡우(穀雨)의 비는 곡식을 간질이며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리하여 청명절은 나무를 옮겨심기에 좋은 때이고, 곡우절은 곡식을 옮겨심기에 좋은 때이다. 마침 곡우에 곡우가 내린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데...

기쁨도 잠시, 지구촌은 지진 소식으로 왠지 한 주 내내 우울한 분위기다. 지구가 배앓이를 하고 있구나. 농민의 아들인 나는 이런 때일수록 집을 박차고 들로 나가 땀을 맛있게 흘려야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데... 도시 생활에 오래 젖어 있다가 보니, 손에 흙 묻히는 일이 낯섦을 지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흙으로 빚은 인간이 흙과 점점 멀어져 가니 어쩌면 좋으랴.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평화롭게 들판에 깔렸던 연무는 어디 가고 황사와 미세먼지의 농도만 체크하고 있으니 이를 어이하랴.

저기 아버지는 김이 물씬 나는 거름 지고 동구 밖을 돌아나가시고 삼촌은 소를 앞세우고 쟁기 지고 사립문을 나선다.

농부의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농가월령가한 대목이 떠오른다.

삼월은 늦봄이라 청명곡우 절기로다. / 봄날이 따뜻하여 만물이 화창하니 / 온갖 꽃 활짝 피고 새소리 각색이라... / 농부의 힘 드는 일 가래질 첫째로다.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는 신기루 같은 고향 풍경과 귓전을 맴돌던 노랫가락은 간 데 없고, 잉잉거리는 TV에서는 지진 소식만 들려온다.

 

농사라고 할 때의 농사 농()’ 자와 지진이라고 할 때의 지진 진()’ 자 밑에는 공통적으로 ()’ 자가 들어있는데 그 연유가 궁금하다. 우선 진() 자의 근원을 찾아보자. <갑골문자전>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또 붓글씨로 그려 보기도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갑골문 시대로 돌아가 봐도 진() 자의 모양이 너무나 다양하여 무엇을 본떠 만든 글자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음 단계로는 진() 자가 들어있는 이웃 글자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 농사 농()’ 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논밭을 갈아 흙은 뒤집는 쟁기나 그 흙덩이를 부수고 고르게 펴는 써래와 같은 농기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 자의 변화 추이를 살피는 과정에서 진() 자가 농기구로 논밭을 가는 모습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기존 여러 학자들은 진() 자를 커다란 조개로 보고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농사짓는 곳과 큰 조개가 생산되는 곳은 공간적으로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갑골문이 대거 출토된 은허(殷墟)는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안양시(安陽市)에 있는 은나라 때의 유적지로서 바다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농사 농()’ 자의 갑골문 모양은 풀 초()’ 또는 수풀 림()’ 아래 []’()’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농사 농()’ 자는 들이나 숲 속에서 농기구를 손에 들고 개간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진() 자를 조개로 본다면 이것으로 풀은 제거할 수 있으되, 수풀 제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금문이나 소전의 농() 자에는 풀이나 숲 사이에 밭 전()’이 추가되는데 이는 숲이나 임야를 일궈 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일러 주는 것이다. 곧 이전에는 농작물을 자연 채취에 의존하다가, 나중에는 한곳에 정착생활을 하며 개간한 밭에서 본격적인 경작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그리고 갑골문의 농() 자에는 하나의 손만 붙어 있다가 금문과 전서시대에 오면 두 개로 나타나는데, 이는 농기구의 발달과 대형화로 두 손으로 농기구를 잡고 밭을 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 자 모습은 예서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풀, , , 밭 등은 모두 사라지고 곡() 자가 나타나 이들을 대신하고 있다. 자칫 노동요 한 곡조 당기며 밭을 가는 모습이라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 쉬우나, 이는 좌우의 두 손[] 과 전() 자가 합쳐져 곡()으로 변한 것이다.

여자의 가장 큰 농사는 임신(妊娠)이다. 그래서 애 밸 신()’ 자에는 신()이 붙어있다. 농사는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잘 맞춰야 하는 시간예술이다. ‘새벽[]’에 천기를 보고, ‘진시(辰時, 8)’에는 들에 나간다. 음력 3월을 진월(辰月)’이라 하는데 농가월령가에서 보듯이 한해의 농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다음으로 지진(地震)이라 할 때의 ()’ 자 스토리를 찾아보자. 위에 얹혀 있는 ()’ 자는 일반적으로 날씨를 뜻하고, 아래의 ()’ 자는 흔들리다, 진동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진은 땅의 흔들림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무릇 움직이는 모든 것은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농기구도 굴착기처럼 흔들리지 않고서는 일을 해 나갈 수 없다. ‘()’ 자는 이 외에도 벼락, 천둥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모두 흔들림의 결과이다.

손이 흔들리면 떨 진()’, 입술이 흔들리면 놀랄 진()’이다. ‘입술 순()’ 자를 보면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것은 입술이다. 흔들리지 않으면 키스가 아니다. 흔들려야 하는 입술이므로 신은 가장 얇고 부드러운 살로 입술을 만들었나 보다.

 

지난달에 일본 규슈(九州) 일대를 다녀온 나로서는 구마모토(熊本) 지진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본에 이어 남미 에콰도르에서는 더 큰 강진이 뒤이어 일어나고 지금도 여진이 계속되어 이재민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지진이란 이름으로 지구도 인간처럼 몸살을 앓고, 배탈도 나고, 가끔 설사까지 하는 걸 보면 지구도 생명이 있는 유기체인가 보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는 지구가 열병이 들어 헐떡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치면서 지구의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경제 성장이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경쟁적으로 난개발이 이루어지고, 화석 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지구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인간이 도시를 만든 만큼 지구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는 지구의 화상(火傷)이다. 땅속을 파헤친 만큼 지구는 수술대 위에서 신음하고 있다. 물이 썩어가니 지구는 혈액암에 걸릴 수밖에 없고, 공기가 오염되어가니 지구는 폐암에 걸릴 수밖에 없다.

지구에게 자정능력이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 지구의 지구력에도 한계가 있답니다.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란 말은 가끔 들어왔다. 지극히 짧고 작은 먼지 인생들이 별들의 나이를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지구의 건강 상태를 모르니 지구의 수명은 더욱 알 길이 없다. 그 사이 바다가 육지 되고, 육지가 바다 되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했는지, 대륙과 대륙이 찰떡처럼 붙었다 떨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인간이 지구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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