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유쾌한 먹탱이의 예서야 놀자 10 - 월간묵가 10월호 원고


유쾌한 먹탱이의 예서야 놀자 10

권상호 (라이브 서예가)

마이클 샌델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지적한 대로, 잘 살기 위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어왔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도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행복까지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예술도 행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논리에 휩쓸려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거대한 굴레에 희생되어 가고 있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횡행하고 있는 종교는 아마도 ‘돈교’가 아닌가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벗이 되고 영혼의 밥이 되어 주던 예술 본래의 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예술은 정말이지 금력과 권력으로는 안 된다. 전시와 이론으로도 안 된다. 오직 스스로 즐기는 ‘자락(自樂)’의 수단으로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락(自落)’하고 만다. 그래서 예술을 직접 행하는 일, 예술과 더불어 즐기며 노는 일, 곧 예술실천‘(藝術實踐)’이 중요하다. 예술 이론조차도 하나의 도구일 뿐, 예술의 본령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도 붓을 잡아야 하는 이유이다.

예술은 아무래도 머리보다는 가슴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머리는 이성으로 차 있지만 가슴은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에서다. 머리가 지식(知識)을 준다면 가슴은 지혜(智慧)를 준다. 그래서인지 서로 머리를 부딪치면 두통(頭痛)이 발생하지만 가슴을 부딪치면 소통(疏通)이 일어난다. 그렇다. 서예는 예술이고, 예술은 이성보다는 감성 쪽이고, 지(知)보다는 정(情) 쪽에 가깝다. 서예란 예술도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먹 갈고 붓을 잡는 ‘서예실천(書藝實踐)’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신비(史晨碑)를 모본으로 하여 공부해 왔다. 이제는 다른 종류의 예서를 곁눈질해 봐야 할 때이다. 성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가능성의 모습’으로 본다고 했다. 사신비 이외에도 다양한 꼴의 예서체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가 익혀온 사신비는 단정하면서도 소박한 맛을 주지만,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맛을 제공하는 예서체가 많다는 얘기이다.<도1~2>

예컨대, 자연스러우면서도 질긴 맛은 석문송(石門頌)을 통하여, 가늘면서도 톡톡 튀는 맛은 예기비(禮器碑)를 통하여, 날렵하면서도 담백한 맛은 조전비(曹全碑)를 통하여, 묵직하고 투박한 맛은 장천비(張遷碑)를 통하여, 장엄 숭고하면서도 꾸미지 않은 수수한 맛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통하여 느낄 수 있다.<도3~도7>

지금부터 아예 ‘예서자전(隸書字典)’을 통하여 글꼴을 비교 검토해 가면서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도8> 요즈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전(篆)·예(隸)·초(草)·해(楷)·행서(行書) 등의 변화를 살펴가며 공부하기도 하는데, 이는 문자학(文字學)까지 익힐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교본을 사서 공부하는 것도 좋고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얻으면서 따라 해도 좋지만, 문제는 초심자는 호불호(好不好)를 가리기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듯이 스승이나 先學(선학)에게 학습 방법을 여쭈어 보는 것이 시간 절약도 되고 나중에 무탈(無頉)하다. 기회가 되면 직접 찾아가서 자세나 집필법, 점획법 등의 교정을 받는 것이 상책이다. 예술 실천이란 능동적이고 진솔하게 자기 진단을 해 가면서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발품을 팔아서 공부하라는 얘기이다.

서예 학습은 장르의 특성상 임서(臨書)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글씨 쓰는 일은 고인과의 대화 시간이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붓을 잡는 순간 적어도 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비바람 설한(雪寒)과 싸우면서 오랜 세월을 버틴 돌, 그 돌에 새겨진 놀랍고도 엄청난 역사 속의 한 때와 호흡하며 사는 것이 서예 인생이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정리했다고 전하는 예서(隸書), 이 서체가 사용되었던 시기는 한조(漢朝, B.C.202 ~ 220)와 청조(淸朝, 1616 ~ 1912) 때였다. 다만 한나라 때에는 당시의 표준 서체로서 모두가 사용하던 예서체였고, 청나라 때에는 몇몇 서예가들이 창작의 도구의 하나로 예서체를 발굴 사용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은 폰트라는 이름의 다양한 서체를 컴퓨터를 통하여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창작이 용이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붓을 잡아 보자. 글씨로 밥을 먹고 사는 전문 서예가는 아닐지언정 덕 있는 취미의 소유자로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쓰리 고(three go)’가 필요하다. ‘많이 보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고’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의 ‘생각하고’가 없으면 숙련된 솜씨만 있고 창의적인 발상이 없게 된다. 붓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을 갖고 덤벼보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감은 ‘자신감’, 가장 맛없는 감은 ‘열등감’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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