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物物而不物於物

장자(莊子)物物而不物於物하라고 했다. ()을 물()로 대하되 물()에 의해 물()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장자의 말이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문명의 이기(利器)를 그 유용함에 따라 사용하되 유용함에 빠져 도리어 자신이 물건에 구속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물욕을 쫓아 물건의 노예가 되는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 장자의 가르침은 2,300년의 장구한 세월을 가로질러 속물화된 문명을 질타하고 있다.

장자라는 책 속에는 이런 식으로 똑같은 글자를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면서 기묘한 느낌을 갖게 하는 표현이 이따금씩 튀어 나온다. 종교학적으로 일종의 성현(聖顯)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어쨌든 이런 구절을 접하노라면 한 순간 사고가 문득 정지되면서 한참동안 멍해지기도 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 뜻을 찬찬히 음미해 보노라면 불현듯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깊은 사색의 늪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이것이 어쩌면 한문이 갖고 있는 묘미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흡사 주문(呪文)과 같은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직역을 한다면 물을 물로 하고 물에 의해 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될 듯도 한데, 이것을 다시 약간 부연해서 설명해 본다면, 물을 물로 부리면서 주재(主宰)를 하고 물에 의해 물로 부림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되지는 않을는지. 말하자면 외부의 환경에 피동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물이란 하나의 물건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외물(外物)을 가리키는 말일게다. 외물은 나 이외의 모든 객관 대상을 뜻하는 용어이다. 우리가 물아(物我)라는 말을 곧잘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곧 주객(主客)이라는 말로 환치(換置)할 수도 있다. 주객이란 문자 그대로 주인과 손님이라는 뜻이니, 그렇다면 이 물이라는 것은 바로 외물로서 나에게 찾아오는 일체의 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물을 물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아(自我)요 주인이다.

손님이란 홀연히 찾아왔다가 언젠가는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그것이 비록 빠르고 늦은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라고 하는 집의 문을 두드리는 길손은 다양하다. 반갑고 기분좋은데도 자리에서 바삐 일어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얄궂고 기분나쁜데도 오래 머무는 객들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고객도 있을 것이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위시해서 팔만사천 번뇌(煩惱)와 같은 것도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일까.

장자는 말한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되, 物物! 즉 어디까지나 주인 의식(主人意識)을 견지해야 할 것이요, 不物於物! 즉 손님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함께 휩쓸린 나머지 주인의 체통을 잃는 일은 하지 말라고. 재앙이나 환란과 같은 것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손님이라면, 일단 정중하게 맞이하고서 의연하게 대처를 하시라고. 문제는 외물이 아니라, 그 외물을 대하는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이 관건이라고.

그리고 장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도 하다. “사람들이여 그렇게만 한다면 그 손님들이 어떻게 주인인 그대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리오. 그것이 비록 누구에게나 마지막으로 한번은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이라는 손님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오. 그렇지만 결코 두려워하지들 마시오. 사실 주인이란 어디에서 오지도 않았고 어디로 떠나는 존재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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