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월간묵가 7월호

유쾌한 먹탱이의 예서야 놀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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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권상호(문학박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 글로벌 최고위과정 담임교수)

 

지금까지 우리는 예서의 기본 점획을 익혔다. 다시 말해 운전면허증에 해당하는 운필면허증(運筆免許證)을 땄다고 할 수 있다. 시동과 주차는 기필(起筆)과 수필(收筆), 주행과 멈춤은 행필(行筆)과 절필(折筆)이라 할 수 있겠다. 신호등과 표지판을 잘 보며 속도 조절은 물론, 교차로나 좁은 길에서는 특히 심혈을 기울여 운전해야 한다. 6개월이 지났으니, 핸들을 잡는 것이 다소 익숙해졌으리라. 이는 집필(執筆)이 편안해졌다는 얘기이다. 자신이 글씨 쓰는 자세는 자신이 잘 모른다.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몸을 바로 유지했는지, 팔꿈치는 제대로 들었는지, 집필 역시 올곧게 했는지…….

서예 활동의 시작은 논리적인 사고와 언어적 분석력이 필요하므로 좌뇌의 기능이 주로 담당하고 있지만, 세월이 흘러 붓과 내가 하나 되어 갈 때, 서예 작업은 논리적인 생각보다 직관적 판단이 지배하고, 이성적 사실적이라기보다 감성적 창조적인 작업으로 기울어간다. 그렇다. 서예 학습은 좌우 뇌를 골고루 발달시켜 준다. 처음에는 다소 의지가 필요하지만, 필력이 일단 몸에 붙으면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른바 필마(筆魔)에 빠지기 쉽다.

모든 예술 작업이 그렇듯이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쓸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feel을 받기 위해 기본에 충실하게 쓰고자 했다. feel을 받아야 필()을 잡을 수 있다. 이른바 붓꼴림이 생기기까지가 서예 학습 단계이고, 이후는 서예 창작 단계라 할 수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붓과 놀기, 영자팔법(永字八法), 파임과 도법, 점의 종류, 굴림과 꺾기, 획과 획이 만날 때의 처리 방법 등을 익혔다. 이번 달부터는 지금까지 익힌 필법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임서(臨書)에 들어가도록 한다. 법첩을 옆에 놓고 따라쓰기를 하자는 얘기이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데생이 절대적이다. 언제나 법첩(法帖)을 끼고 다니면서 진정한 독서(讀書)에 열중해야 한다. 책 읽기만이 독서가 아니다. 서예 읽기도 독서이다. 서예가가 되거나 서예를 취미로 하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이해하고, 응용하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다시 말해 정확한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얘기이다. 얼씨구.

 

사신비는 후한(後漢) 팔분(八分) 예서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이 비는 앞뒷면이 1년의 거리를 두고 새겨져 있어서 사신전비와 사신후비로 구분하지만 하나의 돌에 새겨져 있으므로 그냥 사신비로 부르고 있다. 전비는 1736, 후비는 1436자로 새겨져 있다. 이 사신비는 을영비(AD 153), 예기비(AD 156)과 더불어 공자묘 안에 있으므로 공묘삼비의 하나로 일컬어져 왔다.

 

사신비의 맛은 필획이 부드러우면서도 무거운 느낌이 드는데, 이는 붓끝을 감추고 썼기 때문이다. 사람의 두 팔에 해당하는 파세(波勢)의 길이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팔분 예서 중에서도 다부지게 보이는 글씨이다.

 

똑같은 소재의 사신비를 썼지만 임서 사진12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붓의 차이 때문이다. 사진1은 털 묶음이 굵고 힘찬 붓으로 쓴 것이고, 사진2는 가늘고 긴 붓으로 썼다. 단봉과 장봉, 강호와 유호의 차이에서 붓맛이 달라지고, 붓맛의 차이에 따라 글맛은 더욱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서예의 묘미가 있다. 길고 부드러운 붓은 다루기가 힘들지만, 뜻밖의 자연스런 맛을 얻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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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사진1) 建寧二年(건녕 이년) 三月癸卯朔(삼월계묘삭) 七日己酉(칠일기유) 魯相臣晨(노상신신) 長史臣謙(장사신겸)……. : 건녕 2년, 3월 초하루가 계묘일이니 7일은 기묘일이다. 노나라 재상인 신하 史晨(사신)과 長史(장사) 벼슬의 신하 李謙(이겸)은…….

* 건녕(建寧)은 중국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168년에서 172년 5월까지 4년 5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사진2) 謙(겸) 顿首死罪(돈수사죄) 上尚書(상상서) 臣晨(신신) 顿首顿首(돈수돈수) 死罪死罪(사죄사죄) 臣蒙厚恩(신몽후은)……. : 李謙(이겸)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尙書(상서)께 올리나이다. 신하 史晨(사신)은 사죄하고 사죄하나이다. 신(臣)은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권상호
http://baike.baidu.com/view/290829.htm

前碑全称《汉鲁相史晨奏祀孔子庙碑》。隶书,两面刻,前碑刻于东汉建宁二年(166年)三月。17行,行36字。后碑刻于建宁元年(165年)四月。14行,行36字。现存山东曲阜孔庙。碑文记载鲁相史晨祭祀孔子的情况。后碑全称《汉鲁相史晨飨孔庙碑》,记载孔庙祀孔之事。文后有武周正书题记四行。
《史晨碑》为著名的汉碑之一。前后碑字体如出一人之手,
  史晨碑
传为蔡邕书。结字工整精细,中敛而四面拓张,波挑分明,呈方棱形,笔致古朴,神韵超绝,为汉隶成熟期方整平正一路书法的典型,对后世有深远的影响。明郭宗昌谓其“分法复尔雅超逸,可为百代模楷,亦非后世可及”。清万经《分隶偶存》评云:“修饬紧密,矩度森然,如程不识之师,步伍整齐,凛不可犯,其品格当在《卒史》(《乙瑛》)、《韩勑》(《礼器》)之右。”方朔《枕经金石跋》云:‘书法则肃括宏深,沉古遒厚,结构与意度皆备,洵为庙堂之品,八分正宗也。”杨守敬《平碑记》云:“昔人谓汉隶不皆佳,而一种古厚之气自不可及,此种是也。”
권상호
http://baike.baidu.com/view/290829.htm

碑阳
建宁二年三月癸卯朔七日己酉,鲁相臣晨,长史臣谦顿首死罪。上尚书:臣晨顿首顿首,死罪死罪。臣蒙厚恩,受任符守,得在奎娄,周孔旧寓,不能阐弘德政,恢崇壹变,夙夜忧怖,累息屏营。臣晨顿首顿首,死罪死罪。臣以建寜元年到官,行秋飨,饮酒畔宫,毕,复礼孔子宅,拜谒神坐,仰瞻榱桷,俯视几筵,灵所冯依,肃肃犹存,而无公出酒脯之祠,臣即自以奉钱,修上案食醊具,以叙小节,不敢空谒。臣伏念孔子,乾坤所挺,西狩获麟,为汉制作,故《孝经援神挈》曰:玄丘制命帝卯行。又《尚书·考灵耀》曰:丘生仓际,触期稽度为赤制。故作《春秋》,以明文命。缀纪撰书,修定礼义。臣以为素王稽古,德亚皇代。虽有褒成世享之封,四时来祭,毕即归国。臣伏见临璧雍日,祠孔子以大牢,长吏备爵,所以尊先师重教化也。夫封土为社,立稷而祀,皆为百姓兴利除害,以祈丰穰,《月令》祀百辟卿士有益于民。矧乃孔子,玄德焕炳,光于上下。而本国旧居,复礼之日,阙而不祀,诚朝廷圣恩所宜特加,臣寝息耿耿,情所思惟。臣辄依社稷出王家谷春秋行礼,以共烟祀。余胙赐先生执事。臣晨顿首顿首,死罪死罪。臣尽力思惟庶政,报称为效,增异辄上。臣晨诚惶诚恐,顿首顿首,死罪死罪。上尚书。
时副言大傅、大尉、司徒、司空、大司农府治所部从事。
昔在仲尼,汁光之精,大帝所挺,颜母毓灵,承敝遭衰,黑不代仓,周流应聘,叹凤不臻。自卫反鲁,养徒三千。获麟趣作,端门见征,血书着纪,黄玉响应。主为汉制,道审可行。乃作《春秋》,复演《孝经》。删定《六艺》,象与天谈。钩《河》擿《雒》,却揆未然。魏魏荡荡,与干比崇。
碑阴
相河南史君讳晨字伯时,从越骑校尉拜,建宁元年四月十一日戊子到官,乃以令日拜谒孔子,望见阙观,式路虔跽,既至升堂,屏气拜手。祗肃屑僾,仿佛若在。依依旧宅,神之所安。春秋复礼,稽度玄灵;而无公出享献之荐,钦因春飨,导物嘉会,述修璧雍,社稯品制。即上尚书,参以符验。乃敢承祀,余胙赋赐。刊石勒铭,并列本奏。大汉延期,弥历亿万。时长史庐江舒李谦敬让,五官掾鲁孔畅,功曹史孔淮,户曹掾薛东门荣,史文阳马琮,守庙百石孔讃,副掾孔纲,故尚书孔立(当为“翊”字)元世,河东太守孔彪元上,处士孔褒文礼,皆会庙堂,国县员冗,吏无大小,空府竭寺,咸俾来观。并畔官文学先生、执事诸弟子,合九百七人,雅歌吹笙,考之六律,八音克谐,荡邪反正,奉爵称寿,相乐终日。于穆肃雍,上下蒙福,长享利贞,与天无极。
史君飨后,部史仇誧,县吏刘耽等,补完里中道之周左墙垣坏决,作屋涂色,修通大沟,西流里外,南注城池。恐县吏敛民,侵扰百姓,自以城池道濡麦给令,还所敛民钱材。
史君念孔渎颜母井去市辽远,百姓酤买,不能得香酒美肉,于昌平亭下立会市,因彼左右,咸所愿乐。
又敕:渎井,复民饬治,桐车马于渎上,东行道,表南北,各种一行梓。
假夫子冢颜母开舍及鲁公冢守吏凡四人,月与佐除。
권상호
《史晨碑》 又名《史晨前后碑》,两面刻,碑通高二百零七点五厘米,碑身高一百七十三点五厘米,宽八十五厘米,厚二十二点五厘米,无碑额。前碑全称《鲁相史晨奏祀孔子庙碑》,刻于东汉建宁二年(169)三月。十七行,行三十六字。末行字原掩于石座中,旧拓多为三十五字,新拓恢复原貌三十六字,字径三点五厘米。碑文记载当时鲁相史晨及长史李谦奏祭祀孔子的奏章。后碑全称《鲁相史晨飨孔子庙碑》,刻于建宁元年(168)四月。十四行,行三十六至三十五字不等。此碑为东汉后期汉隶走向规范、成熟的典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