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귀족스포츠 승마를 실내에서 즐긴다.

위대한 탄생 - 라이딩죤


건강을 위해, 세상을 향해, 말을 타고 달리마.

금년은 말의 해이다.

국내 정상의 브래인이 모여

3년에 걸친 그 끝없는 연구와 기술 개발...

이제 그 서막이 열린다. 

라이딩죤에서...

라이딘죤, 참 존 말이네!!


귀족 스포츠 승마를 실내에서 즐긴다.

디지털 승마클럽 대구 범물동 라이딩죤!

- 라이딩죤 영남본부 직영센터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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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九生法 - 풍덩강의자료

당 이양빙(李陽冰)의 『한림금경(翰林禁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서를 잘 쓰고 진나라 이사(李斯)와 함께 ‘이이(二李)’라고 불렀다. 그 서풍은 격조가 높고 법이 갖추어 졌으며 경리호상(勁利豪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표현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어린아이에게 색연필을 쥐여 주면 아무 데나 마구 긋고 짓이긴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장판이나 벽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를 보았는가? 긋거나 쪼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인간 본능의 자취이다.
운동장에서는 누구든 공을 찰 수 있고 노래방에서는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아무나 붓을 잡으면 글씨를 쓸 수 있다. 물론 잘 쓰고 못 쓰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즐겼느냐가 문제 된다. 지고한 붓 군(君), 지순한 종이 양(孃)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정신은 어느새 가을 물처럼 맑아지고, 육신은 겨울 눈밭처럼 깨끗해진다.
붓질은 생활의 리듬이요, 먹빛은 사고의 향기다. 묵향(墨香)은 맡을수록 영혼이 깨어난다. 붓을 잡은 손끝을 통하여 온몸에 전해지는 은근한 흥분과 감동은 천금의 놀음차로도 오히려 부족하다.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은근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서예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삶의 여유와 여백의 맛은, 내게 있어서 그것은 서예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흑백(黑白)의 원시적 대비 효과, 농담(濃淡)의 그윽한 유혹, 붓질의 강약(强弱)과 운필의 완급(緩急)이 빚어내는 하모니……. 이 화려하고 다양한 구애(求愛)에도 글씨는 쉬이 미소 짓지 않는다. 이는 글씨를 잘 쓰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그 많은 붓털을 동시에 다스림은 붓털 숫자만큼의 초대형 오케스트라 단원을 지휘하는 일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한 조건으로 구생법(九生法)이라는 게 있다. 생지(生紙), 생필(生筆), 생연(生硯), 생묵(生墨), 생수(生水), 생수(生手), 생목(生目), 생신(生神), 생경(生景)의 아홉 가지가 그것이다.

① 차분하고 부드러운 종이: 오,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피부를 가진 화선지가 나를 부른다.
② 끝이 부드러우면서도 허리의 탄력을 잃지 않는 붓: 어느 화선지도 이 붓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③ 언제나 이슬을 머금고 먹의 애무를 기다리는 벼루: 먹만 기다리는 만고열녀(萬古烈女).
④ 빛깔이 맑으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먹: 자신을 갈아 역사를 기록하는 지사(志士).
⑤ 새벽에 새로 길은 맑고 깨끗한 생수: 깊은 사랑은 언제나 새벽의 힘.
⑥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 손: 붓대를 껴안고 춤출 수 있는 쾌적한 몸 상태.
⑦ 붓털의 섬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눈: 붓길과 동행하며 끝없이 주고받는 눈길.
⑧ 고요하면서도 여유 있는 정신: 조급하게 서둘러서 잘되는 일이 없지.
⑨ 기상이 넘치는 화창한 날씨: 천기(天氣)를 받아야 옥동자를 낳는다.

구생법이란 붓꼴림의 극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최적의 환경으로서, 이 아홉 가지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득의작(得意作)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브 서예를 할 때는 환경 조건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여건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고 활용할 줄 아는 재치가 있어야 한다. ‘명필(名筆)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구생법과는 거리가 멀다. 용구 타령, 날씨 타령, 기분 타령만 하다가 보면 바쁜 일상에 서예를 즐길 기회가 없다. 반주 없어 노래 못 할까? 꿩 잡는 것이 매다. 재수 좋으면 꿩 잡으러 갔다가 매 잡는 수도 있다.

그런데 서예를 배로 즐기는 선행 조건은 독서(讀書)다. 문자를 매개로 하여 뿜어내는 명사들의 메시지를 접하다가 보면 더러는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여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붓 잡고 글씨를 써보자. ‘먹빛은 1천 년 간다.’고 했겠다. 당장 붓을 잡아보면 어느덧 세속의 자신은 잊고 선비가 된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글씨’란 ‘그’으면서 ‘씨’를 뿌리는 일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바꿔 말하면 글씨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가치 있는 정서를, 붓이란 파종 도구를 이용하여, 화선지란 마음의 밭에, 먹알갱이란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이다.
글씨란 먹 알갱이 씨앗도 화선지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꽃을 피운다. 그 먹 꽃에서 배어 나오는 묵향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전해진다. 통일신라의 김생(金生)이나 고려의 이암(李嵓)도 그들의 육신은 시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붓으로 요리한 글씨 맛은 아직도 생기를 돋우고 있다.

오늘 하루쯤 먹 갈아 붓 잡고 자기의 생각을 종이 위에 우려내보자. 못난 글씨면 어떠하랴. 진솔한 마음만 묻어나면 그만인 것을.
IT가 주는 편리함으로 인하여 사라져 가는 손 감각을 되찾자. 각박한 세상일수록 한묵유희(翰墨遊戱)를 통하여 마음의 밭을 갈아보자. 서예를 익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자. 붓의 멋과 먹의 맛을 아는 선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