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예서는 인생이다.

유쾌한 먹탱이의 예서야 놀자

도정 권상호(문학박사, 라이브 서예가)

1. 나를 키운 고독한 여행, 서예

고독한 시간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고독은 피할 게 아니라 즐겨야 한다. 낙고부독(樂孤不獨). 외로움을 즐기면 고독하지 않지 않다는 뜻이다.

서예는 고독한 작업이다. 하지만 서예가 건강과 힐링은 물론 장수(長壽)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역대 대표적인 서예가 각각 24명을 선정하고, 그들의 평균 연령을 조사해 본 바로는 한국은 78, 중국은 80세에 다다랐다. 이것으로 보면 서예가가 어떤 다른 직종보다 월등히 긴 수명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0월 중국 CCTV 채널4 토크쇼에 베이징대학교 왕악천(王岳川) 교수가 출연해 고승(高僧)의 평균 수명은 66, 역대 황제의 평균 수명은 39.2세이지만 고대 저명한 서예가의 평균 수명은 78.9(우리식으로는 79.9)임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서예는 건강 아이콘이다.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예술 활동이다. 서마(書魔)에 홀려 보자. 잠시나마 서예술에 풍덩 빠져보자. 이른바 몰입서예(沒入書藝)! 1년이면 건강도 찾고, 영생을 지켜줄 예술가도 될 수 있다.

2. 나의 분신, 붓과 놀기

붓은 나의 분신(分身)이라고 생각하자. 내 마음 가는 곳에 내 몸도 따라오듯, 내 생각에 따라 붓도 따라온다. 몸을 움직임은 운신(運身)이지만, 붓을 움직임은 운필(運筆)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금방 걸을 수 없듯이 붓도 금세 그을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동차 운전(運轉)을 위해서도 한두 달의 수련 시간이 필요하듯이......

첫째, 붓에 대한 두려움 없애기이다. 글씨를 쓰든 말든 간에 붓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 왜냐하면, 붓이 숟가락이나 젓가락처럼 손에 익숙해야 하기 때문이다. 굿 드라이버는 핸들이, 프로골퍼는 스틱이, 명필은 붓이 저절로 손에 잡혀야 한다.

둘째, 붓 물구나무 세우기이다. 자 그럼, 우선 붓과 친하며 운동도 되는 놀이를 시작해 보자. 붓을 거꾸로 세워 손가락 위에 얹고 균형을 잡으며 떨어뜨리지 않는 놀이이다. 이는 몸의 균형을 잡는 운동으로도 제격이다.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앉아서 또는 서서 해 보라. 몸이 유연해지고, 붓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된다. (사진 1-1, 1-2)

셋째, 붓 일으키기 수련이다.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듯이, 붓은 서야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다. 붓을 세우는 요령은 붓끝이 향하는 쪽으로 힘을 주며 세우면 된다. 인간이 일어설 때에 바닥 짚고 무릎 짚고 허리 짚고 일어서듯이, 붓도 단번에 일으키지 말고 3단계 정도 나눠서 일으키면 붓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필압(筆壓)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붓을 세우기 위해서는 붓이 미끄러지지 않는 담요나 모전 위에 물방울을 뿌리고 붓으로 빨아들이는 수련을 하면 된다. 이슬방울이 하나씩 붓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따라서 붓 세우기 수련은 흡수(吸水) 수련이다. (사진 2)

  마지막 단계로는 붓촉
[]으로 연지(硯池)의 먹물을 빨아들이고 연변(硯邊)에서 먹물을 빼내는 작업이다. 이는 붓촉 안의 먹물의 양을 조정하는 수련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하여 붓과 친숙해짐은 물론 붓촉 속의 먹물의 양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으로 화선지 위에 실제 글씨를 자유롭게 쓰기 위한 기본 준비 과정을 마쳤다.

3. 왜 예서(隸書)인가

예서는 전서(篆書)와 해서(楷書)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현대 한자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서를 학습하면 13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예서의 명칭은 전서에 예속(隸屬)된 서체’, ‘많은 노역 노예(奴隸)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적 실용 서체와 같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내용에서 출발한다. 본격적 서예 학습은 대개 서예사 순서 또는 역순으로 학습하지만 여기서는 예서의 두 가지 서체 중에서도 古隸(고예)라는 예서의 고형이 아니라, 八分(팔분)이라는 후한 시대의 예서체를 설명의 기준으로 삼기로 한다.

예서를 배우는 데 우선 중요한 점은, 예서라는 서체가 다른 서체, 즉 예서보다 오래된 전서나, 예서보다 새로운 해서, 행서, 초서와 서체상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4. 인생을 닮은 예서의 파세(波勢)

예서의 기본 구조를 보면 한 획에 파도처럼 굽이치는 형세의 '파세(波勢)'라는 리듬이 흐르고 있다. 이 파세는 예서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대개 한 글자의 한 획에 변화를 주어 물결처럼 곡선으로 나타내는 필체를 말한다.

파세는 다른 말로 평날(平捺), 파책(波磔), 파임이라고도 하며, 시작 부분은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蠶頭)라 하고 끝 부분은 기러기 꼬리를 닮았다 하여 안미(雁尾)라고 한다. (사진 3-11)

글씨의 시작은 놀랍게도 시필(始筆)이라 하지 않고, 붓이 일어나야 쓸 수 있으므로 기필(起筆)이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파세의 기필 방법은 붓끝을 남서쪽으로 역입(逆入)하여 기필한다. 역입하면 저절로 장봉(藏鋒)이 됨은 정한 이치이다. (사진 3-1)

인생에 가정이 없듯이 글씨도 가정이 없다. 왕복표가 없는 편도 일회성이라는 점에서 서예와 인생은 닮은꼴이다. 특히 예서의 특징을 규정하는 파세는 우리의 일생과 너무나 닮았다. 파세의 다섯 과정은 인생의 출생(出生), 성장(成長), 장년(壯年), 노년(老年) 그리고 승천(昇天)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사진 4)

  우리의 인생이 사람마다 서로 다르듯이 파세의 모양도 다기 다양하다
. 다양한 파세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요구된다. 파세 공부가 예서의 근간이므로 첫 강의는 파세에서 시작하여 파세로 마친다. (사진 3)

과거의 많은 선택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듯이, 지금도 나는 선택하고 있다는 심정으로 파세를 그어 나아가야 한다.

오늘도 붓을 잡는다. 공들여 그어 나아간다. 한 획은 가정이 없는 삶의 여정이다. 글씨란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끊임없는 시간의 연속성 위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많은 후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도 한 획 속에는 아침 점심 저녁이 있고 안식의 긴 밤도 있다. 한 획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아우르며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지만 한 획 속에는 늘 절박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다가올 후회의 획 하나 삶은 늘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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