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4〉 비나이다 비나이다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4>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 손 비비고 빌면 빛과 비를 모두 얻으리니…

장맛비 내리는 날 심수봉의 노래 비나리를 들으며 비에 관한 글을 쓴다? 먹탱이 빈말꾼이 무슨 소리 못하리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배려 독자님께 비나이다. 두 손 비비며 비옵나니, 틀리더라도 용서하소서.

고인돌 시대의 원시인들은 나무 틈에 쐐기를 박고 두 손으로 열나게 비비면 마찰열에 의하여 불이 붙는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 비비면 불을 피울 수 있구나. 비비면 빛을 얻을 수도 있구나.

그러나 불은 그렇다 치고,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래, 신령한 우물가나 산에 올라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두 손을 비비며 간절히 빌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기겠지……. 주문 내용은 무엇으로 할까?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뜻이니 ‘비리다 비리다’로 해야지. 여기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본다. ‘리다’는 ‘내리다’의 고어이다.

마을의 대표
무당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리길 비나이다”하고 여러 날 주문을 외며 빌었더니 바람이 우수수(雨水水^^) 일기 시작하고 드디어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옳거니 비비기만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구나. 뚝뚝 방울져 떨어진 빗방울을 아껴 쓰기 위해서는 ‘뚝(둑)’을 쌓아야지. 그러면 비가 ‘뚝’ 그쳤을 때에 사용할 수 있잖아. 용한 무당은 가뭄이 들면 기웃기웃하지 않고 냉큼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그는 늘 100%의 적중률을 보였다. 왜냐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꾸준히 빌었기 때문이다.^^

동네 꼬마들도 “용아 비 내려라 용아 비 내려라. 용이 비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 내리지 못하면 용일까?[龍雨 龍雨. 龍雨 龍龍. 龍不雨 龍龍?]”이라 노래하며 동네방네 돌아다녔다.
비가 어찌하여 내리나 했더니, 땅에서 인간이 손을 비비면 하늘에서는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서로 비비며 물방울 집단인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이리저리 구르다가 몸이 무거워지면 땅에 비로 내리것다. ‘비비다, 빌다, 비나이다, 비, (불)빛’까지도 모두 가족 단어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용왕님께(천왕님전, 하느님전, 부처님전, 삼신전에, 조왕전에,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귀영화(국태민안, 소원성취, 남북통일, 복을 달라, 남산수를, 무병장수, 건투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 손 모아(무릎 꿇고, 엎드려, 지성으로, 간절히, 하나같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나이다.”

비는 대상도 많고, 비는 사연도 많고, 비는 방법도 많기도 하다.

민속에서 여러 사람이 패를 이루어 이 집 저 집 집적거리며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리며 곡식이나 돈을 구하는 일을 ‘걸립(乞粒)’이라 한다. ‘빌 걸(乞)’에 ‘낟알 립(粒)’ 자를 쓴 걸 보면 요란스레 노는 짓치고는 제법 유식을 떨고 있다. 걸립신(乞粒神)까지 모시고 걸립굿을 하며 놀이를 하는 걸 보고서는 ‘빌어먹을 세상이로구나!’ 하고 빈정대며 비웃음 치다가도, 어느새 걸립패의 재주와 익살을 보고나면 good!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어라?

걸립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비나리’라 한다. 이들이 하는 말을 ‘비나리하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앞날의 행복을 빈다는 좋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비나리치다’라고 하면 아첨을 해가며 환심을 산다는 뜻이니 조심할 일.

올해는 비 내림이 많은 걸 보니 많은 사람이 푸지게도 빌었나 보다. 이처럼 오랫동안 계속하여 내리는 비를 ‘장맛비’라 하나니, 장맛비에 대한 어원은 구구하다. ‘훈몽자회’(1527)의 ‘霖 오란비 림’이란 기록으로 볼 때 장맛비 대신에 ‘오랜비’를 사용함도 좋을 성싶다.

그런데 ‘댱마>쟝마>장마’의 변천으로 볼 때, 장마는 ‘長(길 장)+마’의 형태로 분석할 수 있는데, 문제는 ‘마’에 대한 해석이다. 고려의 낱말을 보여주는 송나라 학자 손목의 ‘계림유사’에서 ‘雨曰◆微[우왈비미(비)]’라 한 것으로 보면 당시나 지금이나 ‘비[雨]’에 대한 발음은 일치한다. 그렇다면 ‘마’와 ‘비’는 분명히 의미상 차이가 있으리라. 윤선도의 ‘고산유고’(1798)에는 장마를 ‘마ㅎ’로 표기하고 있다. 흔히 ‘마ㅎ’를 ‘물’의 뜻으로 보지만, ‘막다, 막히다’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ㅎ’의 어감으로 볼 때, ‘(출입이) 막힐 정도의 많은 비’로 해석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좋은 예가 있다. 사전에 ‘마파람’을 ‘남풍(여름바람)’으로 간단히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마ㅎ바람’으로 분석할 수 있으니, 곧 ‘(출입이) 막힐 정도의 강한 비바람’ 정도의 뜻이 된다. 그럼 태풍이네? 장마를 한자어로 ‘매우(梅雨)’라 하는데, 이것도 매실이 영글 때 내리는 비의 뜻이 아니라, 당시의 발음은 /마이우/로서 ‘마ㅎ우(장맛비)’의 음차로 본다.

그래. 비비고 빌면 빛은 물론 비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비벼서 안 되는 일이 없음도 깨달았나. 비빌 언덕이 없어서 걱정하는 놈은 불쌍하다. 제 손이나 비비면 되지. 쪽팔림은 순간, 깨달음은 영원하다. 빚지고 비는 놈한테는 져야 한다. 장수도 빌면 목을 벨 수 없다. 빌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데……. 돈도 먹을거리사랑도 용서도 잘못도 잘 빌기만 하면 요술방망이처럼 쉽게 얻어진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모두 빌면 마음을 비우고 소원을 들어주나 보다.

오늘 저녁에는 학대해 온 내 육신을 위하여 비빔밥을 먹어야겠다. 잘헌다.

도정 권상호 라이브 서예가·수원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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