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11〉나를 기르는 길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11

나를 기르는 길

- 길이 최고의 길라잡이다 -

나를 기르는 것은 언제나 길이다. 길이 나를 기른다. 나를 기르기 위해 언제나 앞길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길이다. 길쭉하게 잘 생긴 길의 기다림, 그 황홀한 대길(大吉)의 유혹!

그런데 그 길은 길다. 길은 길기에 길이다. 길은 길지만, 기(氣)지개 켜며 걸어가야 한다. 먼 길엔 기지개가 약이다. 길을 걷지 못하면 방콕? 하게 되고, 곧이어 삶의 길은 끝난다. 길을 걷는 것이 최고의 건강법. 맞는 말이다.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길은 나의 최고의 멘토, 최고의 길라잡이다. 얼쑤.

지난 계절에 논밭에 웃자란 잡풀, 곧 김을 매느라 농부는 머리에 김이 났지만, 오늘의 수확이 있기에 농부는 기쁨으로 기를 뿜으며 귀성객을 맞이한다.

명절의 톱뉴스는 어김없이 길이다. 뭍길, 바닷길, 하늘길 소식이다. 조금 있으면 하늘길의 선수 기러기도 승리의 V자 형으로 길게 줄지어 귀향하리라. 허걱. 다들 정(情)의 허기를 채우느라 바쁜 여정이었으리라.

즐거운 한가위에 안전한 고향길이었다면 대길이다. 고향길이 고생길이었더라도 그 길은 행복길이다. 오묘하게도 고생지수와 행복지수는 정비례한다. 이는 ‘고생 신(辛)’자 없이는 ‘행복 행(幸)’자를 쓸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행복에도 탄성이 있다. 사고 등으로 탄성 범위를 벗어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행복을 위한 고생이 아니라 불행이다.

명절의 고향길은 삶을 되새김질을 해 보는 길이다. 늘 그 길이지만 왠지 고향길은 우리의 몸과 맘을 늘 새롭게 해 주는 활력소, 원기소가 된다. 한가위의 고향길이 그리움의 길이라면, 귀갓길은 생활의 길이다. 그리움의 길은 마음이 오가는 길이지만, 생활의 길은 명리(名利)가 오가는 길이다. 그리움의 길은 멀고 막혀도 참을 수 있는 인내의 길이라면, 생활의 길은 꼭 일궈내야 할 의지의 길이다.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과 고통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멀리서 보는 고향은 언제나 애틋한 그리움의 몽유비경(夢遊秘境)으로 다가오지만, 하루 이틀 머물다가 보면 궁색불편(窮塞不便)의 지역으로 느껴진다. 고향을 찾는 이들 중에는 쫓기듯 도망치며 객지생활을 해 왔음에도 엿장수처럼 요란하게 떠드는 이들도 있고,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멋을 은근히 부리며 자랑하고 싶은 이들도 있으리라. 시집 장가 등쌀에 고향길을 접은 아들딸도 있을 것이고, 야속한 농가 빚에 쪼들릴세라 고향에 가지 못한 이들도 있으리라. 집안 모두가 고향을 떠나 제2, 제3의 고향에서 보내는 이도 있을 것이고, 고향을 북녘에 두고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한(恨) 서린 실향민도 있으리라. 있는 길이 막히면 기막힌 일인가, 길 막힌 일인가? 길사람이든 방사람이든 모두가 정겹게 다가옴은 똑같은 홍익인간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오가는 길에 고개를 들면 하늘은 온통 쪽빛 바다요, 목을 돌리면 대지는 어디나 황금 구름이다. 켜켜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갈맷빛 산들도 탱글탱글 익어간다. 골골을 할퀴며 거침없이 흐르던 개천은 여름의 상처를 말쑥이 지우고, 이제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누워 흐른다. 물빛은 깊은 속까지 다 드러내고, 카멜레온처럼 주변의 가을빛과 어울린다. 찾아가는 길은 바쁜 길이지만, 돌아오는 길은 여유의 길이어야 한다. 숨가쁘게 달려간 동경(憧憬)의 길 이후에는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는 한가한 되새김길이 필요하다.

고향길과 인생길은 무엇이 다른가. 고향길은 가고 오는 길이지만, 인생길은 오고 가는 길이다. 고향길은 갈래가 많지만, 인생길은 외길이다. 고향길은 여러 차례 오가며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이지만, 인생길은 한번 가고 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길이다. 어쩔거나…….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빗길은 비켜 가면 되고, 눈길은 눈여겨보며 가면 된다. 돌길 자갈길은 지압 효과 있어 좋고, 오솔길 모랫길은 낭만이 있어 좋다. 곧은길 한길이라도 조심해 걸어야 하며, 진창길 비탈길이라도 절망해서는 안 된다. 돌너덜길을 가다가 갈림길 홀림길을 만나면 당황하지 말고 암중모색(暗中摸索)해야 한다. 대체로 선현이 걸었던 길이 정답이다. 오늘의 나의 길은 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막다른길 고샅길을 만나면 거침없이 다시 나와 새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듣지 말라 했다. 이따금 길섶에 앉아 지나온 뒷길을 돌이켜보고, 가야 할 앞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괜히 길모퉁이에 앉아 길맨 광고 보며 허튼수작하지 말고 벌떡 일어나 걸어야 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새로운 길이 보인다. 선택한 길에도 옆길 샛길이 있다. 옆으로 새지 말고 바른길로 쭉 나아가야 할진저. 얼쑤.

속담에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 가랬다. 바보 아닌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길도우미 내비걸과 손안의 스마트보이가 알아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세상인데……. 하지만 이 속담에는 인정(人情)이 묻어 있고, 세심한 주의를 당부하는 말기가 숨어있을 깨달아야 한다. 지름길 빠름길만을 고집하지 말자. 가끔은 돌아가는 길이 빠른 길이란 역설의 지혜도 배워야 한다.

막힌 길은 뚫고, 끊긴 길은 연결하고, 좁은 길은 넓히고, 없는 길은 만들어 가며 살아가자.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는 행복의 길, 자유의 길을 놓쳐서는 안 되고, 국가적으로는 평화의 길, 공생의 길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남북의 막혔던 길, 더디던 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길이길이 진정성 있는 길이길 바란다. 이쪽 길도 깨끗이 쓸어놓고 진심으로 기다리자. 개성공단의 길,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길이 열리고, 이참에 통일의 길까지 펑 뚫렸으면…….

길은 길다. 길은 걷는 자에게만 길(吉)하다. 대처럼 쭉쭉[竹竹] 뻗은 통일(統一)의 길은 절대 아니다. 가로놓인 일(一)자를 보더라도 결코 쉽지 않다. 곤(困)하더라도 이번에는 뚫을 곤(丨)으로 나가야 한다. 일(一)을 위한 곤(丨)의 선택. 잘헌다!

그림: 한글로 ‘길’자를 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뭍길, 바닷길, 하늘길에 산길을 통하여 인생길을 더듬어보고자 했다.

글씨: ‘푸르고 높은 마음’을 정음 고체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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