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13> 섣달 그믐날 태어난 한글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13

섣달 그믐날 태어난 한글
  크고 유일한 한국의 한글

  한글(훈민정음)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날은 세종 25(1443) 1230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당일의 2번째 기사이자 한해의 마지막 기사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섣달 그믐날에 특종으로 짤막하게 기록한 57자의 한글 창제 기사치고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여기에 숨어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첫째,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라는 말로 볼 때,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 혼자서지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훈민정음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세종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말을 한자로 온전하게 표기하기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민족적 숙원을 풀기 위해 친히 혼자서 만들었다. 깜짝쇼라고나 할까? ‘어제서문(御製序文)’이나 위의 기록에 친제(親制)’라고 씌어 있음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집현전 학자를 불러 모은 것이나 최만리 등의 원로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이듬해 일이었다.

둘째, ‘이달에로 기사가 시작하는 것을 볼 때, 훈민정음은 세종이 한 달의고심 끝에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글자를 한 달에 완성했다면 세종은 분명 불세출의 언어학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묘호 세종(世宗)’의 의미도 세상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기록은 이달에라고 했지만, 필연코 오랫동안 노심초사하였으리라……. 세종이 평생 안질과 피부병을 달고 산 걸 생각하면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정음 창제를 위한 고심의 과정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세종은 반대 상소를 이미 짐작하고서 정음을 몰래 만들어 느닷없이 발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언문(諺文)’이란 말은 한글을 깎아내린 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에는 언문의 뜻을 한문에 대하여 한글로 된 글을 낮추어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사대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문자학적으로 보면 ()’선비, 훌륭한 사람, 크다의 뜻이므로 ()’선비의 말, 훌륭하고 큰 말이란 뜻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동이(東夷)’라고 할 때의 ()’도 한자자전에서 오랑캐라고 풀이해 놓았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자는 큰 활, 평정하다. 온화하다의 뜻이므로 동이(東夷)’활 잘 쏘는 민족, 밖으로는 세상을 평정하고 안으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뜻으로 풀이해야 옳다고 본다.

넷째, 기사에 언문(諺文) 28‘()’를 지었다고 하면서도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붙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정음은 소리글자[표음문자(表音文字), 자질문자(資質文字)]’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본다. 글자 하나하나가 발음과 상관없이 일정한 뜻을 나타내는 중국의 한자(漢字)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 왜 하필이면 ‘28일까? 이는 동양의 천문학에서 하늘의 별자리를 28자리로 나눈 28(宿)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오잉?

여섯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전자(篆字)는 전서체(篆書體)란 한문 서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전자의 특징 세 가지는 획의 굵기가 같다는 점, 좌우가 대칭이라는 점, 형태가 대체로 네모졌다는 점등이다. 그래서 그런지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인 글자체를 살펴보면 훈민정음체와 이를 풀이하는 한자 해서체와는 모양이 아주 다르다. 또한 순음(脣音) ‘입 구()’와 닮은 점, 치음(齒音) ‘이 치()’와 닮은 점, 유음(流音) ‘(리을)’새 을()’과 닮은 점 등도 흥미롭다.

일곱째, 디지털 시대에 한글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한글의 과학성에 있다. ‘그 글자는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라는 대목을 볼 때, 세종은 한글을 음절로 뭉뚱그려 만든 것이 아니라, 음절을 초··3성의 음소 체계로 나누는 이론을 세웠으니 이는 인류 언어학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한글이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3성의 유기적인 결합 때문이다. 앗싸. 같은 소리글자 중에도 일본의 가나는 한 음절이 한 글자로 되어 있어 그 이상은 나눌 수 없는 음절문자가 아니던가.

여덟째,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문자는 한자를, ‘이어는 우리말을 가리킨다. 정음으로는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적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어를 사용하는 섬, ‘이어도는 우리 땅이 확실하군.^^) 그런데, ‘이어에 대한 사전 풀이가 마음에 걸린다. ‘항간에 떠돌며 쓰이는 속된 말’, 또는 상말로 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는 속()과 같은 뜻이니, ‘시골에 사는 순박한 백성의 말정도로 풀이하고 싶다. 대한민국 헌법 제12항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아홉째,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다.’는 데에 한글의 무한 가능성이 있다. 너무 쉬워서 통싯글(화장실에서 똥 누는 사이에 익힐 수 있는 글자), 암클(여자나 배울 글자)’처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웃지 못할 글자이다. 붓글씨로 한글을 오랫동안 쓰고 있을 때, 문득 꿈에 한글 자음도(子音圖)와 모음도(母音圖)가 나타난 적이 있다. 한글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편리하고 과학적인 글자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림)

한글은 세계 최초의 창제인물과 창제원리를 가지고 있는 글자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만든 인류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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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앵커>
어린이들 만화 참 좋아하죠. 그런데 만화 속 인기 캐릭터들을 보면 뜻 모를 영어를 반복해 외칩니다. 무엇이든 흡수할 나이의 우리 아이들은 캐릭터가 쓰는 영어는 멋지고, 같은 뜻의 우리말은 촌스럽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김종원 기자의 생생 리포트입니다.
<기자>
텔레비전에서 만화가 나오자 아이가 이목을 집중합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트랜스포메이션!]
서툰 세 살배기 말로 어떻게든 따라 해봅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합체하자! 또봇 X, Y 인테그레이션(합체)]
[또봇! 트랜스포메이션(변신)]
[더블유! 테이크 오프(날아라)]
인티그레이션은 통합, 트랜스포매이션은 변신이라는 뜻의 어른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 단어입니다.
외국에서 수입한 만화영화는 한 술 더 뜹니다.
[GT02 고릴라, RH03 래빗(토끼). 석 대의 버스터 로봇들이 컴바인 오퍼레이션(합체 작동)! 필살기 트랜션 플래시로 적을 무찌른다.]
요즘 최고 인기라는 이 만화도 골드 드래곤, 에픽 드래곤 배틀 등 어려운 영어가 줄줄 나옵니다.
문제는 언어를 막 익히기 시작하는 6살에서 8세 아이들이 주로 본단 겁니다.
[김시내/유치원 교사 : 어릴수록 쓰기보다는 읽기, 들려주기, 말하기로 (한글을 배웁니다.) 지금 시기가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봤을  멋있으면 그냥 (잘못된) 언어도 가차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또봇 변신할 때 뭐라고 그래요?) 트랜스포메이션.]
[(그러면 합체할 때 뭘라 그러는지 아는 사람?) 알알아요! 인티그…레션]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
이런 착각까지 합니다.
[(어느나라 말 같아요? 우리나라!]
[('또봇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하는 게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이쪽으로 와주시고요, '또봇 변신' 이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이쪽으로 와주세요. 시작!)]
물어보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영어가 더 멋있다는 쪽으로 우르르 이동합니다.
[유치원생 6살 : 미국 말인 거 같으니까 더 재미있어서요. '합체'는 약간 이상한 거 같고, 이쪽(영어)은 좀 멋져요.]
[초등학교 3학년 : '합체'라고 하면 폼이 안 나니까 '트랜스포메이션'이 더 나은 것 같아요.]
[고창운/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문제는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가 문제죠. 외국어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쉬운 우리말로 나타낼 수 있는 말인데, 그걸 그대로 갖다 쓰는게 문제죠. 제가 보기에는 아마 역사이래 가장 극심한 외국어 사대주의에 빠진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대에 지나친 언어 쇄국주의도 문제겠지만 언어습관이 시작되는 유아 단계에서부터 뜻 모를 영어는 멋있고 한글은 촌스럽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선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
(영상취재 : 김태훈, 영상편집 : 박진훈, VJ : 김종갑)
김종원 기자terryable@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