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16> 나를 찾아 떠나는 책길 여행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16

나를 찾아 떠나는 책길 여행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명징한 가을이다. 하늘만 남은 듯하다. 설악산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이고 보면 가을은 느닷없이 왔다가 엉겁결에 가버리는 야속한 계절인가 보다. 설악산에 눈 설()’자가 그냥 붙은 게 아니로구나.

봄과 여름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계절이지만 가을과 겨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절이다. 그래서 봄, 여름엔 외모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지만 가을, 겨울엔 마음에 관심을 더 갖게 된다. 봄과 여름은 낮이 길고, 가을과 겨울은 밤이 길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가을엔 내 안의 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자. 나를 찾는 여행길은 책 속에 있다. 책 속에 있는 길은 걷지 않으면 남의 길이지만, 걸으면 나의 길이 된다. 책의 길 옆에는 진리의 샘물이 솟구친다. 진샘이라 하자. 진샘에는 영혼이 목마른 자를 위하여 언제나 착한 물이 넘쳐흐른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기술의 발달로 물량주의와 일등주의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진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영혼을 씻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물은 흘러야 깨끗하고 바람은 불어야 맑듯이, 육신은 움직여야 건강하고 영혼은 씻어야 행복하다.

책 속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마음 여행, 곧 책길 여행은 무엇보다 바쁜 삶에 여유를 주어서 좋다. 망중한(忙中閑)이랄까? 시간적 여유가 꼭 있어서 책길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책길을 여행함으로써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길을 통한 몸 여행은 육신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만, 책길을 통한 마음의 여행은 우리의 영혼에 예지를 불어넣어 준다.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은 풍요롭다. 책속의 글이 숲이 되고 들이 되고 바다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시는 외롭고 쓸쓸한 인생길에 연인이 되기도 하고, 한편의 소설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든든한 벗이 되기도 한다. 책길에서 만난 따뜻한 연인과 듬직한 벗이 고단한 삶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책길의 대지에는 생각의 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우고, 책길의 하늘에는 까만 글자가 별꽃이 되어 빛난다. 대지에 떨어진 생각의 씨앗이 하늘에서 별꽃으로 피어나니 책길 여행자의 몸은 어느덧 향기로 가득 찬다. 그 향기는 책길 여행객의 인품으로 대변된다.

책길에서는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책길에서는 지역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만나고 싶은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순간 나는 축지법 도사가 된다.

이 대목에서 국어와 놀아 보자. 책길은 글로 포장되어 있으므로 글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글 위에서 만난 사람은 글인이다. 글인은 나에게 글인카드, 아니 그린카드를 쥐여 준다. 그린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녹색생활과 녹색독서를 즐길 수 있겠다. 그린카드는 찍은 카드가 아니라 손으로 그린 카드이기 때문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카드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여행길은 일어서야 걸을 수 있지만, 책길 여행은 앉아서도 가능하다. 책길 여행에서 놀라운 일은 몸은 앉아 있어도 뜻은 일어선다는 점이다. 여기서 뜻이란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다짐을 하는 것이다.

유지경성(有志竟成)’이란 말이 있다.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그 뜻은 올발라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줄여서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 한다. 누구나 뜻을 세우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니까 입지필성(立志必成)이라 하면 어떨까.

길은 걸어야 하고 책은 읽어야 한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읽는 자만이 지혜를 거둘 수 있다. ‘걷다라는 말 속에는 다리를 움직여 걷는다는 의미 외에, 곡식이나 열매 따위를 수확한다는 의미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일손을 멈춤도 걷다이고, 구름이나 안개가 흩어져 없어짐도 걷다이다. 그렇다면 길을 걸으면 질병이 걷히고, 책길을 걸으면 무지가 걷히겠군.

걷기 바람으로 길의 종류는 많아졌다. 둘레길, 올레길, 하늘길, 마실길, 억새길, 갈대길, 비렁길, 골목길, 산책길 등 부지기수이다. 책길도 다양하다. 고전길, 현대길, 시길, 소설길, 수필길, 희곡길, 교과서길, 참고서길, 동화길, 잡지길, 만화길, 서재길, 도서관길, 지하철길 등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은 항상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걷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마침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감동은 행복의 별명이다. 이 가을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책길 여행을 떠나자. 문자의 숲 속을 걸으며 행간의 보물을 찾아내자.

책길을 걷다가 지치면 밖에 나가, 가끔은 고개를 들어 시린 밤하늘의 따뜻한 별들을 바라보라. 환희의 별다발이 안겨온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세상에 살고 있다. 이따금 거미줄에 매달린 찬란한 아침이슬을 보라. 종종 하늘 끝자락에서 온몸으로 부끄럼타는 저녁노을을 보라. 아침이슬과 저녁노을은 생명이 너무 짧아서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올 가을엔 낙엽의 짧은 춤을 관찰해 보라. 순간의 공연을 위해 그토록 긴 준비의 기간을 생각하면 차라리 전율이다. 우리는 이처럼 아프도록 멋진 세상에 살고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책길 여행에 오늘은 누구와 차 한잔 나누게 될까? 어떤 풍경에 느닷없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맛보게 될까? 길은 길다. 책길도 길다. 기를 쓰고 걸어 보자. <>

* 급고출신(汲古出新): ‘고전을 탐독하여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 뜻이다. 책을 읽으면 창의력이 생긴다는 말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비슷한 뜻이다.

* 독서이심(讀書怡心): 독서는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

 

* 조로석하(朝露夕霞): 아침이슬과 저녁놀이란 뜻으로 짧은 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로키산맥에 올라 쓴 글씨이다.(2008)

 

* <참고작품(‘고독끽다’)> ‘고독고독과 벗하면 고독하지 않다는 뜻으로, ‘끽다마음의 여유를 갖자는 뜻으로 새긴 전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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