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17> 저물어 가는 가을 여물어 가는 시간

17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저물어 가는 가을 여물어 가는 시간

나뭇잎이 태양과 대화를 끝내고 대지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봄여름 동안 한껏 부풀린 날개를 화려하게 펼치고 바람에 몸을 맡긴다. 이웃을 생각하여 골고루 흩어져 향기롭게 썩어갈 나뭇잎. 참 착하다.

저녁노을 이후에 날이 저물듯이, 단풍 이후에 가을이 저물어 간다. 날이 저물면 어두운 밤이 오고, 가을이 저물면 긴 밤의 겨울이 온다. 어두운 밤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희망이다. 그림자는 세상이 밝을 때만 얼굴을 내밀고 어두울 때는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세상이 어두울 때 나타나는 별은 참 착하다.

노을의 수명이 짧듯이 단풍의 수명도 짧다. 노을과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수명이 짧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짧고 아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생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인생을 길고 지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개 세월이 속절없이 빠르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인생은 분명 아름다운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11월의 11자를 보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지붕 잃은 일주문이나 깃발 잃은 당간지주 모양이다. 곁가지 하나 없이 뻘쭘하게 서 있는 두 개의 1자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을 닮았다. 이들이 쓰러지지 않고 질곡의 세월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아마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대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리라.

계절의 순환을 보며 잠시 수학 공부 좀 해 볼까. 함수(函數)란 무엇인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규칙이다. 다시 말하면 두 변수(變數) x·y 사이에서 x의 값이 정해질 때 y의 값이 따라서 정해지는 관계를 말하며, y=f(x)로 표시한다.

나의 경우 독립변수 x에 시간을 대입시켜 보는 버릇이 있다. x에 -100년을 대입하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 사람도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x에 100년을 대입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서 왔을까? 순간 나를 이 세상에 오게 한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백화점을 들렀다. 지하 식품부의 화려하고 맛난 음식물이 부러웠지만, 여기에 30일을 대입해 보니 종속변수 y는 거의 다 똥으로 변하고 만다. 백화점 상층의 화려한 의상이나 고급 가구들에게는 30년을 대입하니 쓰레기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시간을 대입해 보면 대상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고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 무한대의 시간을 대입하면 지구도, 우주도 제로[0]가 아닐까? 정녕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인가…….

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을 뜻하는 ‘때 시(時)’자의 전서를 살펴보면 ‘일(日)+지(之)+촌(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서에서 ‘갈 지(之)’자를 흙 토(土)’로 바꾸어 쓴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간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갈 지(之)’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쉴 줄 모르고 나아간다는 속성을 이 글자가 포함하고 있다. 발음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날 일(日)’자는 태양이 밤낮과 계절을 바꾸기 때문에, ‘마디 촌(寸)’자는 시간을 잘 헤아리며 살아가라는 뜻에서 붙였다.

흐르는 시간을 세월이라 한다. 세월여류(歲月如流),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이라 했으니, 세월이 좀먹느냐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며 허송세월(虛送歲月)하는 것은 금물이다.

시간은 잠자는 순간에도 깨어있고, 일하는 순간에도 쉴 줄 모른다. 눈을 뜨면 언제나 내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 항상 내 앞에서 내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 가는 시간이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니, 잘 헤아려 가며 살아야지.

다행히 시간은 빈부귀천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씩 공평하게 주어졌다. 시간이 없다면 과거와 미래가 없고, 추억과 꿈도 없다. 시간이 아니라면 여러 현상의 변화과정이나 인과관계도 규명할 수 없다. 시간이 변화와 인과를 만드는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황금에 비유하고 시간을 아껴 쓰고자 한다.

시간은 후진 없이 오직 전진뿐이다. 인생길도 팝송 제목처럼 ‘One Way Ticket(편도 승차권)’밖에 없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면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고, 스스로 시간을 끌고 나가야 한다. 성공한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계획 잘 세우기, 반성 잘하기, 자투리 시간 활용하기 등의 탁월한 시간 관리 비법을 갖고 있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 삶의 모든 가능성이 열리어 꿈을 이룰 수 있고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렇다. 시간의 종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으로 매 순간 활기차게 살아가자.

그런데 인간은 손안에 마술 같은 기기 하나씩 들고 스마트한 세상이 열렸다고 야단들이다. 손전화 기능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인터넷, 메일, 카메라, 녹음기, TV, MP3, 비디오, 지도, 사전, 메모장, 내비게이션, T머니, 신문, 일정표, 계산기, 앨범, 통역관, 일기예보관, 버스 지하철 시간표, 서울대학교 강의 등이 몽땅 한 곳에 모여 있으니 큰절을 올릴 일이다. 문제는 스마트폰 덕분에 시간을 많이 벌어,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문명의 시간은 갈수록 숨 가쁘게 돌아간다. 자연의 시간이 그립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때를 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때때로 때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저물어 가는 가을에 여물어 가는 시간을 잘 챙겨야지. 시간의 비밀을 깨달으면 찰나가 영원으로 통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영원도 찰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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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정법 정사
밀양강 언덕에서 신묵서실의 묵향을 감상합니다.
영남루에도 가을빛이 가득합니다.
모든 분들이 늘 건강하시고...
도정 선생님께서도 건승하시길...

정법 정사 합장
권상호
멀리 계시지만
빈 자리가 큰 만큼
생각을 자주하게 되어선지
더욱 가깝게 다가옵니다.
정사님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