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5〉열나는 여름, 열매 여는 여름, 열 문 여는 여름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5.

열나는 여름, 열매 여는 여름, 열 문 여는 여름

후텁지근한 날씨에 조금만 걸어도 속옷에 땀이 밴다. 열(熱)나는 여름, 열매 여는 여름이니 차분하게 참아야지. 여름엔 그저 댐의 수문을 열고, 논의 물꼬는 트고, 집의 대문과 창문도 열고, 여몄던 옷깃마저 열어야 한다. 마음마저 연다면 올가을엔 시집·장가가겠지?

우리말 ‘열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열매가 맺히다’와 ‘닫히거나 막힌 것을 터놓다’ 등이 그것이다. 숫자 ‘열[十]’도 ‘주렁주렁 열린 수’, ‘꽉 찬 수’이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수’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름[夏], 열(熱), 열[十], 열매[實], 열다[結實]. 열다開], 나열하다(列), 열리다, 여물다, 영글다’ 등은 모두 가족 단어라 할 수 있다.

여름 식사는 물씬한 보리밥 위에 시원한 열무김치를 얹어 쓱쓱 비벼 먹어야 제격이다. 빨간 고추장이 침샘을 자극하고 한두 방울의 참기름이 후각을 흔들면, 손가락 끝에서는 숟가락이 춤을 추고 입안에선 아삭아삭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목구멍의 꿀꺽 장단과 이어지는 방귀 소리에 열없이 여름은 졸음 속에 흘러간다.

이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얘기가 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웃으며 주고받던 방귀의 3요소 개그가 있다. 국가의 3요소, 비료의 3요소, 소설의 3요소, 연극의 3요소, 색깔의 3요소, 빛깔의 3요소 등을 외우다가 지루하면 방귀의 3요소를 들이댄다. 아름다운 멜로디, 향기로운 냄새, 내적 불만의 외적 해소 등이 그것이다. 방귀는 방기(放氣)에서 온 말인 듯하다. 공기를 방출한다는 뜻이렷다. 기(氣)가 막히면 기막힌 일이지. ‘빵구’라고 하는 사투리나 /pì/라고 발음하는 중국어 屁(방귀 비)나, 영어 ‘fart’ 등은 아무래도 소리를 흉내 낸 말로 보인다. 이쪽에서 뽀~옹 하며 똥 트림 하면 저쪽에서 삘리리~ 하며 가죽피리를 분다. 웃다가 지쳐 오수나 즐길까 하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쌍바윗골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화생방 훈련의 진원지를 서로 떠넘기다가 감출 수 없는 얼굴의 진실 근육 때문에 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숭이 제 방귀 소리에 놀란다더니…….

여름엔 하늘도 답답한지 세찬 바람과 함께 소나기를 쏟으며 샤워하고 천둥[←텬동(天動)]으로 드럼 치고 번개로 레이저쇼를 한다. 여름 하늘의 빅쇼 뒤에 땅에 나타나는 현상은 언제나 큰물의 흐름이 있을 뿐. 어? 천지자연에도 풍류(風流)가 있네? ‘비바람[風雨]’ 소리와 ‘흐르는 물[流水]’ 소리가 어울리면 풍류가 아니던가. 인간이 자연을 보고 풍류(風流)를 배웠구나. 자연은 인간의 도전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스승이렷다?

볼 게 많아 봄이라더니, 열(熱)이 많아 여름인가 보다. 열나는 여름이라야 오곡백과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여름에는 하늘 문이 열려 비가 많이 내리고, 대문과 방문이 열려 바람과 햇살을 부른다. 여름에는 모든 게 열려야 한다. 하늘과 땅도 열리고, 남과 북도 열려야 한다. 마침 ‘열 개(開)’ 자 개성(開城) 공단이 열린다는 소식이다. 그렇다. 천지는 물론 남북한도 막히면 동맥경화증에 걸린다. 친구 사이, 연인 사이, 이웃 사이, 국가 간에도 열려야 화목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식곤증도 달랠 겸 여름날 오후에 오패산 자락을 산책한다. 서늘한 바람이 기운차게 나뭇잎을 흔들자, 시커먼 쌘비구름이 남서쪽에서 무리지어 굴러온다. 먹빛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고 내려오더니 곧이어 천상 천둥이 둥둥 울리며 다가온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별안간 벼락[←벽력(霹靂)]이 내리친다. 하늘의 눈빛은 번개와 같고, 하늘의 고함은 천둥과 같구나.

소나기의 맛은 느닷없이 비가 세차게 쏟아지다가[솓다 > 쏟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빛이 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소나기’는 ‘솓나기’에서 온 말처럼 보인다. 요즈음 소나기를 곧장 ‘쏘나기’로 발음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솓다’가 ‘쏟다’로 바뀐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다. 쇠로 된 힘센 활을 ‘쇠뇌[弩(노)]’라고 하듯이 쇠처럼 거세게 내리는 비라는 뜻에서 고어에서는 ‘쇠나기’로 표기했는지도 모른다.

민간어원이 더 재미있다. 소나기가 국지적으로 내리는 데에 착안하여 그 어원이 ‘소의 등을 나누는 비’에서 왔다는 것이다. 허걱. 그리고 ‘소낙비’는 ‘소나기비’를 줄여서 쓴 말일 텐데 ‘떨어질 낙(落)’과 맞물려 ‘소란하게 낙하하는 비’로 풀이해도 안성맞춤이다.

‘비’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 외에도 청소를 위한 ‘비[帚(추)]’와 화투장의 ‘비’가 있다. 화투의 비는 일본에서는 동짓달을, 우리나라에서는 섣달을 상징하는데, 이는 비 내리는 풍경을 그렸으므로 비라 할 따름이다. 비 광(光)을 살펴보자. 공부에 지친 한 선비가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섰다가 버드나무에 뛰어오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개구리를 보고, 미물인 개구리보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곧장 귀가하여 서예 공부에 정진했다는 얘기가 숨어 있다. 얼씨구. 이 선비는 다름 아닌 일본의 유명한 서예가 오노도후(小野道風, AD.894-967)이다.

비 온 뒤에는 땅이 굳어짐은 물론이고, 온갖 먼지가 싹 씻겨 내려간다. 빗자루도 덩달아 지저분한 먼지와 쓰레기를 쓸어낸다. 빗자루와 비슷한 것으로 붓이 있다. 붓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음의 근심 걱정은 물론 마음의 때까지 싹 쓸어내나니…….

* 그림 해설: 여름에 더위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열나는 여름이기에 많은 열매가 열린다. 화투장의 비는 비 내리는 풍경을 그렸으므로 비라 하고, 배경 설화에는 노력의 미덕이 나타나 있다.

* 글씨 해설: 전서체(篆書體)로 쓴 ‘풍류(風流)’이다. 인간은 자연을 보고 풍류를 배웠다. 자연은 인간의 도전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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