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6〉변신의 귀재, 물의 가르침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6

변신의 귀재, 물의 가르침

- 물은 무던하고, 미는 미덥다 -

물의 고어는 ‘믈’이었다. ‘믈’ 자를 자모음으로 나누어볼 때, ‘ㅁ’은 ‘맑음’, ‘묽음’, ‘무던함’의 이미지, ‘ㅡ’는 ‘평평함’, ‘넓음’, ‘수평선’의 이미지, ‘ㄹ’은 ‘멀리, 길게, 흐름’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믈은 본성이 ‘믈어(물러, 연하여)’ 끊임없이 ‘믈러가고(물러가고), 뮈고(움직이고)’ 하니 참으로 ‘므던한(무던한)’ 물질이라 할 수 있다.

물은 맑고 넓으며, 멀리 흘러가므로 저편 끝에서는 결국 하늘과 맞닿게 된다. 장마가 지나고 입추, 말복마저 지나자 하늘도 드높아 간다. 풍성한 가을임에도 외롭게 느껴지는 건, 물은 맑아 더 깊어지고 하늘은 푸르러 더 높이 올라가므로 우리가 느끼는 공간의 순간 확장 탓이리라.

‘믈’은 ‘물’과 ‘미’의 두 형태로 변천하였다. 성질이 ‘물’처럼 너그럽고 수더분한 사람을 일러 ‘무던하다’고 말한다. 성품이 ‘미’처럼 믿음이 가는 사람을 일러 ‘미덥다’라고 칭송한다. ‘물’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지만 ‘미’는 그 용례가 흔하지 않다.

‘미’에 물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미나리, 미더덕, 미꾸라지, 미역감다’ 등의 낱말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미’는 ‘밑으로, 미끄러지듯, 미련 없이, 밀려’ 내려간다. 밤이면 ‘미르[龍]’가 사는 냇물, ‘미리내[銀河水]’가 떠 있고, 낮이면 작은 물방물이 만든 둥근 지게문, ‘므지게(무지개)’가 떠 있다. 여기서 잠깐, 어원으로 볼 때 ‘무지개’가 아니라 ‘무지게’로 써야 맞지 않은가?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龍’ 자를 ‘미르 룡’이라 적고 있고, 일본어에서는 물을 ‘みず(미즈)’라 하는데, 모두 ‘미’와 무관하지 않다.

불처럼 불뚝 불도저같이 도전하고 물처럼 물러나며 무던하게 살아가는 무리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수평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쩌다 찬스(chance, 기회)가 오면 불처럼 불쑥 챌린지(challenge, 도전)해야 하느니……. 놀라지 마시라, 키보드(자판)에 ‘c’ 키와 ‘ㅊ’ 키는 하나다. 또 하나, 올라가려는 불의 ‘ㅂ’ 키 바로 밑에 내려가려는 물의 ‘ㅁ’ 키가 있다는 사실도 재미있지 않은가. 가슴에 불씨를 살려야 한다. 씨가 없으면 그 불은 죽는다. 불쌍하다.

뭍과 물은 발음도 비슷하지만, 의미도 서로 통한다. 뭍은 물이 없으면 생명을 길러낼 수 없고, 물은 뭍이 없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그러고 보면 뭍과 물은 가족 단어로서 부부처럼 느껴진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묻혀있던 뭍을 드러내셨다는 기록이 보인다. 뭍[大地]은 땅이란 이름으로 바다 밖으로 나와 삼라만상을 안고, 이고, 지고 지내야 하므로 몸이 무겁기 그지없다. 그래서 뭍은 만물의 어머니[大母, The Great Mother]이고 물은 뭍의 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발음은 ‘입술소리’이다. 태어나서 입술을 떼는 순간 나오는 소리는 당연히 입술소리 /m/이다. 국어에서 입술소리는 ‘ㅁ’, ‘ㅂ’, ‘ㅃ’ ‘ㅍ’ 등이 있다. 입술소리에 해당하는 글자의 공통점은 입 모양을 가리키는 ‘ㅁ’을 포함하고 있다.

덴마크의 언어학자 오토 예스페르센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발음은 /m/이라 했다. ‘엄마’를 부르는 소리는 대부분의 언어에서 ‘mama, mam’ 등으로 비슷하고, 어머니를 가리키는 소리도 라틴어 ‘mater’, 영어 ‘mother’, 독어 ‘mutter’, 불어 ‘mère’, 스페인어 ‘madre’ 등과 같이 모두 /m/ 발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쯤에서 뭍 이야기는 묻어두고 물에 관한 관심만 가지기로 한다.

물의 변신은 다양하다. 차갑게 하면 얼음이 되고, 열을 더하면 수증기가 된다. 자신의 모습을 액체에서 고체와 기체로 자유롭게 바꾼다. 고체가 되면서 부피가 늘어나는 것도 물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물은 구름으로 안개로, 눈으로 서리로, 비로 우박으로, 폭포로 무지개로, 이슬로 서리로, 지하수로 샘으로, 시내로 강으로, 호수로 바다로, 파도로 해일로, 음료수로 차로, 간장으로 피[血]로, 빙하로 빙산으로, 물휴지는 물론 시위 진압용 물대포로까지 진화했다. 정녕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물의 변신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쉿, 물귀신 나타날라. 물에 몰(沒: 빠질 몰)하지 않으려면 말조심해야지.

물은 왜 변신을 잘하는가? 물과 관련한 형용사들을 뒤적여보면 짐작이 간다. ‘무르고, 묽고, 맑아서’ 변신이 쉽다. 으뜸가는 선(善)의 표본으로 물을 만나고, 물로부터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가르침을 받은 물의 제자, 노자(老子). 그는 ‘약지승강 유지승강(弱之勝强柔之勝剛;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긴다)’라는 기막힌 이치를 깨닫게 된다. 인간도 딱딱하면 부러지기 쉽다. 물처럼 유순할 때 현실에 잘 적응하며, 나아가 창조적 아이디어를 캐낼 수 있다. 물은 부드럽기 때문에 지표는 물론 천상, 지하에서도 절대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물에는 일곱 가지의 덕이 있다. 이른바 수유칠덕(水有七德). 1 물은 겸손하다. 그래서 언제나 낮은 데로 흐른다. 2 물은 적응을 안다. 그래서 물은 자신이 놓이는 그릇의 모양을 불평 없이 따른다. 3 물은 조화를 안다. 그래서 골짜기에서는 노래하고 허공에선 춤춘다. 4 물은 공생(共生)을 안다. 그래서 장애물을 만나면 피하여 돌아간다. 5 물은 지혜롭다. 그래서 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6 물은 청결하다. 그래서 갈증을 없애주고 생명을 길러낸다. 7 물은 성실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기를 정화한다.

그러나 물이 언제나 겸손하고 착한 것만은 아니다. 폭포나 홍수처럼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기도 하고, 영하의 낮은 온도에서는 오히려 몸을 부풀리며 바위를 깨뜨리기도 한다. 물이 한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물이 냉정하기로 말하면 섭씨 100도에서 단 1도만 부족하여도 끓지 않는다. 이를 보면 우리 인간도 마지막 1%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오호라. 산을 오름에 정상에서 한 키만 모자라도 산의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하는 이치와 같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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