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3〉집에서 집으로

[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3> 집에서 집으로

인간은 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집에 집착할까

원시시대 우리 선조는 집을 지을 줄 모르고 동굴(洞窟)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마을 동(洞)’자는 바로 동굴에서 유래한다. 동(同)이 동굴의 모습이고, 살 수 있는 조건으로는 반드시 가까이에 물[?]이 있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말 ‘동네’도 ‘동내’로 써야하지 않을까 한다. ‘미리내’는 하늘의 물임을 인정하고 ‘내’로 제대로 쓰고 있다.

움집[?]에서 나가는 모습은 ‘날 출(出)’이고 똥통에 똥 싸고 가는 모습은 ‘갈 거(去)’이다. 하루 종일 나가 일하다가 제각기 돌아오는 모습이 ‘각각 각(各)’이다. 각각 각(各)자 위의 ‘뒤져 올 치(?)’는 걸어가는 발을 뜻하는 지(止, 之)를 뒤집은 모양으로 ‘돌아옴’을 뜻하고, 구(口)는 바로 동굴 입구이다. 손님이 각각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손 객(客)’이다.

‘새집 소(巢)’자를 보면, 나무 위의 둥지[田] 안에서 새 새끼 세 마리[?]가 귀가 솔도록 소란(騷亂)하게 소리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어미가 새끼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모습을 보면 ‘집’이란 발음은 ‘모일 집(集)’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여기에서 순우리말이든 한자든 음이 통하면 뜻도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모을 집(輯)’은 입과 귀를 수레에 모은다는 뜻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시문[口]을 엮은 책이나 음악[耳] 앨범 따위를 낼 때 그 발행 차례를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하고 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에 이런 말이 나온다.

‘十日而棄者 蠶之繭也. 六月而棄者 ?之?也. 一年而棄者 鵲之巢也. 然方其經營而結構也,/ 或抽腸爲絲, 或吐涎爲泥, 或拮据?租, 口?尾?而莫之知疲./ 人之見之者 無不淺其知而哀其生, 雖然紅亭翠閣 彈指灰塵, 吾人室屋之計 無以異是也’(열흘을 살다가 버리는 집은 누에고치고, 여섯 달을 살다가 버리는 집은 제비집이며, 한 해를 살다가 버리는 집은 까치집이다. 그 집을 지을 때에 누에는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제비는 침을 뱉어 진흙을 반죽하며, 까치는 열심히 풀이나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을 모른다. 사람들은 이 같은 그들의 지혜를 어리석다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붉은 정자와 푸른 누각도 잠깐 사이에 먼지가 끼어버리는 것이니, 우리 인간의 집 짓는 일도 이런 하찮은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서 세 가지 사실을 살필 수 있다. 곤충과 새들도 집을 짓는다는 사실, 집 짓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집을 사용한 후에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영구적인 집을 추구한다. 태양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던 피라미드,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던 성당과 교회, 만백성을 위엄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궁궐 등, 더러는 몇백 년에 걸쳐 지은 집들도 있다.

집을 짓고 사는 동물로는 곤충과 새와 인간이 있다. 왜 그들은 힘들여 집을 지을까. 인간이 집을 짓는 이유도 새와 곤충과 마찬가지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새와 곤충의 집은 동종(同種) 간에 서로 비슷하지만, 인간의 집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곤충은 캡슐형의 원룸 개인주택이고, 모든 새들은 단일가구주택이라 할 수 있다. 벌집과 개미집은 거대한 대단위 공동주택이다. 인간의 집은 움집·흙집·돌집·나무집·벽돌집·철근 콘크리트집·스틸하우스(steel house) 등과 같이 소재에 따라서 나누기도 하고, 단독주택(단독주택, 다중주택, 다가구주택, 공관)·공동주택(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기숙사) 등과 같이 소유권 구분과 용도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새와 곤충의 집은 그들의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에 의한 결과이지만, 인간의 집은 종족 보존은 물론 창조적 본능에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인간의 창조적 본능이 위와 같은 다양한 집을 짓게 했다고 본다.

개나 닭, 소나 말은 집을 짓지 않는다. 인간이 그들을 길들이기 위해 집을 지어줄 따름이다.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착한 일을 한 것처럼 인간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종신형의 죄수처럼 평생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끔찍한 일이다. 새는 하늘을 주무대로 살아가고 인간은 땅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곤충은 하늘과 땅을 두루 체험하며 살아간다. 애벌레 시절에는 땅에서, 나방 시절에는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니 그런 관점에서는 곤충이 새와 인간을 앞선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인간은 왜 집을 짓는가. 그 이유를 건축연구자 서윤영씨는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서해문집)에서 ‘출산(出産)과 양육(養育)’ 때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집은 투자의 대상,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위나 위엄의 상징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 역시 출산과 양육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집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임신기간이 유달리 길고 신생아가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양육기간이 너무나 길기 때문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소나 말은 태어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걸을 수 있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1년은 지나야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다.

새와 곤충이 집을 짓는 이유도 출산과 양육 때문으로 보고 있다. 둘 다 하늘을 난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몸을 가볍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체외수정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수정란을 알의 형태로 배출하여 외부에서 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은 몸 밖의 자궁(子宮)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역시 미숙아 상태로 아이를 낳아 장기간 집중관리를 해야 하므로 새와 곤충처럼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구석기시대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고, 지금도 형태는 다양해졌지만 집을 짓는 근본 이유는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살아서는 양택(陽宅)에서 지내고, 죽어서는 음택(陰宅)에서 보낸다. 태어나기 전에도 어머니 몸속의 작은 우주인 자궁이란 궁궐에서 우주인처럼 유영하며 살았다. 자궁은 작지만 종족 보존을 위한 절대적인 집이다. 자궁이란 집에서 태어난 우리는 공부도 집에서 하고 결혼도 집에서 하며 애도 집에서 낳고 직장 생활도 대부분 집에서 하며 끝내 죽음도 집에서 맞이한다.

도정 권상호 라이브 서예가·수원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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