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영월 김삿갓 축제 - 라이브 서예(예비지식 쌓기)

金炳淵(1807~1863)

<金笠詩選 >- 日本 東洋文庫714. 平凡社. 崔碩義 編譯注. 2003.
  
* 일대기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民衆詩人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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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김삿갓 정비석 1988

줄거리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 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蘭皐 金炳淵之墓

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인용은 작가 정비석이 소설 <김삿갓>을 쓰기 위해 일흔 다섯의 노구를 무릅쓰고 김삿갓 묘를 찾았을 때의 일화 중 한 부분이다. 천재 시인 김삿갓의 묘는 그렇게 초라하게 남아있었다.

  소설 <김삿갓>은 작가가 김삿갓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번째 장의 이 같은 구성은 '전기'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소설 <김삿갓>은 소설적인 흥미와 재미로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김삿갓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1807(순조7) 3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이었다. 시 짓는 재주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오던 그는 고금의 시서와 사서를 닥치는 대로 섭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 살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다.

   이1811(순조11)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 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시니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329,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동북땅 적벽강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 놓았다.

  저자 정비석은 <작가의 말>에서 김삿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한국 사람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름만 알았다 뿐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흔히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 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 시인이었다.

   1807년 개화 초기에 당대의 명문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태어난 김삿갓은, 20세 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시로써 이름을 천하에 떨쳐 왔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 가문의 치욕적인 비밀을 알고 나자, 김병연이라는 본명까지 깨끗이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오직 삿갓과 죽장만을 친구삼아 거지처럼 동가식 서가숙하며 떠돌아다니다가 57세를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자체부터가 전고에 그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려운 극적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도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수많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시들뿐이어서, 시에 있어서도 독보적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은 개화 초기의 시대적인 희생자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웃고, 서민들과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였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김삿갓의 자재 무애했던 시의 세계를 소개함과 아울러, 그가 끝없는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직접 겪어 온 가지가지 행적들을 김삿갓식으로, 풍류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특이한 생애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이요, 해학이요, 풍자요, 익살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도 길고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의 생활 풍토만은 근본적으로 달랐는데, 김삿갓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항상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유일한 서민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한 위대한 생활 시인이었던 것이다."

   저자 정비석이 바라보는 김삿갓은 서민의 대변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비석의 소설 <김삿갓>, 서민들 속에 있는 김삿갓에 주목한다. 그 속에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객사한 거지 시인 김삿갓과는 조금 다른, 서민들의 애환과 풍속을 시로 승격시키는 김삿갓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재치와 기행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점잔 떠는 얼굴에 침을 뱉는 독설가이기도 했다. 작가 정비석은 그런 김삿갓의 거침없는 인생을, 서민들과 함께 숨쉬었던 김삿갓의 행적과 결부시켜 소설 <김삿갓>이라는 대작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영화> 김삿갓 대양영화사 1957

출연: 김동원, 김승호, 황정순, 박경주 외
해설구원의 정화’(1956)에 이은 이만흥의 여덟 번째 작품. 조선 왕조 철종 때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일종의 전기 영화로 이운방 원작을 이광래가 각색한 작품이다. 후일 시성, 혹은 시선으로 추앙받았던 인물로 영화는 인간 김삿갓이 5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그의 일생 중 가장 외로웠던 시기를 추출해 한편의 멜로드라마로 엮고 있다. 김삿갓으로 분한 박경주가 직접 제작했다.

   영화 초반부에 김삿갓이 방랑하는 시퀀스는 맑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와 음악이 그의 시구절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가련과 김삿갓이 사랑을 나눌 때와 홍경래의 난에서 백성들과 관군이 싸우는 전쟁 장면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김삿갓의 시의 경지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했다 해도 김삿갓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시니컬한 시인의 풍모와 허무적이며 개성이 강한 보헤미안적 기질은 누구나 한 번 볼만한 흥미를 준다. (조선 57. 7. 24)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가수 명국환이 부른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로 시작되는 영화 주제가 방랑시인 김삿갓은 크게 히트하여 약 45만 장이 판매(서울 58. 10. 25)되었다.

   줄거리선천부사 김익순의 손자 병연(박경주)은 장원급제하지만,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항복한 전력 때문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 이에 좌절한 그는 가족을 버리고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타락한 세태를 개탄하는 기발한 시구를 남긴다. 그는 방랑생활 중 가련(박옥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녀가 바로 홍경래(김승호)의 딸임을 알고 크게 번민한다. 가련은 김삿갓을 향한 사랑 때문에 여승이 되고 김삿갓은 어느 날 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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