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인천(仁川) 지명 이야기

인천지명 이야기

도정 권상호 편

인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13년(1413)이다. 그리고 인천(仁川)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었다. 인천 지명의 역사적 변화는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먼저 근간을 정리해 놓고 난 뒤에 지명 변화의 흐름을 차근히 살펴보고자 한다.

미추홀(彌鄒忽, 백제) → 매소홀(買召忽, 고구려) → 소성현(邵城縣, 통일 신라 경덕왕) → 경원군(慶源郡, 고려 숙종) → 인주(仁州, 고려 인종) → 경원부(慶源府, 고려 공양왕) → 인주(仁州, 조선 태조 원년, 1392) → 인천군(仁川郡, 조선 태종 13년, 1413)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세조 6년, 1460,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므로 승격, 1883년 외세에 의한 개항) → 인천부(仁川府, 1895~일제강점기) → 인천시(仁川市, 1949) →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 1981년 7월 1일)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1995년 1월 1일)

인천 최초의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엮은 지리서>에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沸流)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고구려의 왕자 비류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우니, 이것이 인천 고을 발전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에는 격전지였던 인천이 고구려 영역으로 되었을 때는 '매소홀(買召忽)'이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미추홀(彌鄒忽)’과 ‘매소홀(買召忽)’은 모두 ‘물의 고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미추홀의 ‘’나 매소홀의 ‘’는 ‘’의 뜻이고, ‘’은 ‘성(城)’이나 ‘골(고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음절 ‘’나 ‘’는 대개 사잇소리 ‘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나 ‘’를 비류의 아버지 ‘추모(주몽, 동명성황)’로 본다면 ‘물이 있는 추모의 골’이란 뜻이 된다.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縣)’이 된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말의 땅이름을 모두 2자 중심의 한자어로 바꾸었던 때의 일이다. 곧 3음절의 ‘매소홀’을 2음절로 줄여 ‘소홀’ 곧 ‘소성’으로 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성현은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 경사의 근원이 되는 고장)’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의 내향(內鄕: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인주이씨(인천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왕의 어머니 인주이씨 인예순덕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또 승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인주이씨의 번성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끝이 났다. 이자겸은 자기의 외손자요 사위이기도 한 인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려고 꾀하다가 반란에 실패함으로써 인주이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인천은 고려말기인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환원 승격되는데, 그 이유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었다. 칠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이었으므로 붙여진 말이다.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고을이 되면서 명문지역으로의 입지를 굳힌 인천은 칠대어향이란 칭송까지 듣고 고을도 승격되고 관할구역도 넓어졌다.

조선은 이런 경원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태조 원년(1392)에 다시 ‘인주(仁州)’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인주’가 드디어 오늘날의 명칭인 ‘인천군(仁川郡)’으로 바뀐다.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인산(仁山)'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고을은 물과 가깝기 때문에 '인천(仁川)'으로 명명했다.

다시 말해 인천이란 명칭은 인천이씨 왕비의 관향인 인주(인천)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자 뜻인 '어진 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다.

부천(富川)평(富平)과 인(仁川)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 현재 인천 관할에 속한 부평(富平)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였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는데, 1895년에 부천군으로 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인천부, 강화군, 남양군, 각 일부 지역과 통폐합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다시 세조 6년(1460)에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했으니, 이는 인천이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다.

고종 20년(1883)에는 외세에 의한 개항이 이루어졌고, 고종 32년(1895)에는 ‘인천부(仁川府)’로 개편되었다가, 이후의 일제강점기에도 ‘인천부’의 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해방이 되고 1949에는 ‘인천시(仁川市)’로 1981년 7월 1일에는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로, 1995년 1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때, 북구는 부평구로 명칭이 변경되고 계양·연수구가 신설되었다.

인천은 지금은 관할구역이 엄청 넓지만, 전에는 지역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인접 구역과의 병합, 분리도 매우 심했다. 인천은 8구 2군 1읍 19면 123동으로, 현재는 국제공항과, 국제항만, 송도신도시 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경제수도로, 문화 행사로는 세계도시축제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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