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길약국 이동길 약사님

奔走蒙垣幾閱年(분주몽원기열연) 그대 몽원에 분주히 달려가 책을 본지 몇 해일런가
仙崗煉藥屬群賢(선강연약속군현) 선강의 약을 다려달라 어진 그대에게 부탁하네.
千秋句漏無眞宰(천추구루무진재) 천년 동안 구루에는 진재(주제자)가 없다던데
那識丹成葛雉川(나식단성갈치천) 이에 금단이 갈치천이란 신선을 만들었음을 아노라.

강북구 수유시장 앞에 길약국이 있다.
내가 가끔 들르는 이유는
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에 소중한 서예 작품과
간찰을 소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작은 평화'를 소망하며
우리 옛것과 연약한 화초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신다.

진성 이씨로서 퇴계 선생 집안인 이동길 약사님은
경상북도 예천군 범울이고을(虎鳴面) 행솔이(白松) 출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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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道德經 選註(도덕경 선주) 序說(서설)

夫道德之爲體也가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야 冥通於三際之中而無去無來요 洞徹於十方之界而非中非外며 昭昭於心目之間而無迹可尋이요 隱隱於視聽之際而非言可議라 近不離於眉睫하고 遠不出於象先이니 蕩蕩巍巍하야 卓然而獨存者也니라

古之聖人이 抱此道德之蘊奧하야 或鳴於東夏하고 或鳴於西域하니 所謂一法之中에 儒之植根과 道之培根과 釋之拔根者가 是也니라 老子之敎는 分四하니 一曰玄理派니 如晉之淸談家何晏 王弼之徒가 是也요 二曰丹鼎派니 如魏伯陽 葛穉川等이 是也요 三曰占驗派니 如于吉 郭璞 李淳風等이 是也요 四曰符派니 如張角 張道陵 陶弘景 寇謙之等이 是也니라
仙道之淵源은 出自黃老라 黃帝之於鼎湖에 騎龍上天하고 老子之於函關에 乘牛遯世가 已開其端이니 所謂丹鼎派者가 是也니라 其書之如黃庭經 參同契 丹經等이 無非修煉之要訣이며 服餌之秘方也니 若其功行丹成則謂可白日升天하야 得長生不死者가 卽其術也니라

佛有三乘하고 仙有五等則佛乘之外엔 無非權設也요 天仙之外엔 皆是傍門也니라 天仙之學은 老莊이 是也니 莊子가 曰死生이 亦大矣로대 而不得與之變하고 雖天地覆墜라도 亦將不與之遺라하며 老子가 曰死而不亡者가 壽라하시니 死生이 一揆요 天人이 同源이라 四大가 本非我有어니 豈死生之可見이며 識心이 元是幻化이니 豈生滅之可覩哉아 此는 身心世界가 混融爲一하야 總爲一眞法界者也니 孟子所謂聖而不可知之謂神과 莊子所謂物化者가 皆指此也니라蘇子由가 曰中者는 佛性之異名而和者는 六度萬行之總目也라하니 喜怒哀樂之未發이 豈非觀妙之道乎며 發而皆中節이 豈非觀之道乎아 形而上者가 豈非常無之道乎며 形而下者가 豈非常有之道乎아 老子之道는 以淸靜無爲로 爲宗하고 以虛明應物로 爲用하고 以慈儉謙下로 爲行則慈非仁乎며 儉非義乎며 謙非禮乎아 盖道德者는 仁義禮之大全而仁義者는 道德之一偏이니 黃老之學은 貴合而賤離라 故爾德으로 爲本이요 六經之敎는 於渾者에 略하고 於散者에 詳이라 故以仁로 義爲用이니라

故로 邵子가 曰老子는 得易之體하고 孟子는 得易之用이라하니 豈有無體之用과 無用之體哉아 卽體之用故로 用不離體요 卽用之體故로 體不離用이니 此는 一而二요 二而一者也니라 故로 孔孟이 未嘗譽未嘗毁하시니 於斯에 可見聖人之時異而道同하고 言殊而理合이로다 離合은 在時라 不由於道요 詳略은 在人이라 不關於法이니라
 道德經 選註(도덕경 선주) 序說(서설)

夫道德之爲體也가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야 冥通於三際之中而無去無來요 洞徹於十方之界而非中非外며 昭昭於心目之間而無迹可尋이요 隱隱於視聽之際而非言可議라 近不離於眉睫하고 遠不出於象先이니 蕩蕩巍巍하야 卓然而獨存者也니라

古之聖人이 抱此道德之蘊奧하야 或鳴於東夏하고 或鳴於西域하니 所謂一法之中에 儒之植根과 道之培根과 釋之拔根者가 是也니라 老子之敎는 分四하니 一曰玄理派니 如晉之淸談家何晏 王弼之徒가 是也요 二曰丹鼎派니 如魏伯陽 葛穉川等이 是也요 三曰占驗派니 如于吉 郭璞 李淳風等이 是也요 四曰符派니 如張角 張道陵 陶弘景 寇謙之等이 是也니라


仙道之淵源은 出自黃老라 黃帝之於鼎湖에 騎龍上天하고 老子之於函關에 乘牛遯世가 已開其端이니 所謂丹鼎派者가 是也니라 其書之如黃庭經 參同契 丹經等이 無非修煉之要訣이며 服餌之秘方也니 若其功行丹成則謂可白日升天하야 得長生不死者가 卽其術也니라

佛有三乘하고 仙有五等則佛乘之外엔 無非權設也요 天仙之外엔 皆是傍門也니라 天仙之學은 老莊이 是也니 莊子가 曰死生이 亦大矣로대 而不得與之變하고 雖天地覆墜라도 亦將不與之遺라하며 老子가 曰死而不亡者가 壽라하시니 死生이 一揆요 天人이 同源이라 四大가 本非我有어니 豈死生之可見이며 識心이 元是幻化이니 豈生滅之可覩哉아 此는 身心世界가 混融爲一하야 總爲一眞法界者也니 孟子所謂聖而不可知之謂神과 莊子所謂物化者가 皆指此也니라


蘇子由가 曰中者는 佛性之異名而和者는 六度萬行之總目也라하니 喜怒哀樂之未發이 豈非觀妙之道乎며 發而皆中節이 豈非觀之道乎아 形而上者가 豈非常無之道乎며 形而下者가 豈非常有之道乎아 老子之道는 以淸靜無爲로 爲宗하고 以虛明應物로 爲用하고 以慈儉謙下로 爲行則慈非仁乎며 儉非義乎며 謙非禮乎아 盖道德者는 仁義禮之大全而仁義者는 道德之一偏이니 黃老之學은 貴合而賤離라 故爾德으로 爲本이요 六經之敎는 於渾者에 略하고 於散者에 詳이라 故以仁로 義爲用이니라

故로 邵子가 曰老子는 得易之體하고 孟子는 得易之用이라하니 豈有無體之用과 無用之體哉아 卽體之用故로 用不離體요 卽用之體故로 體不離用이니 此는 一而二요 二而一者也니라 故로 孔孟이 未嘗譽未嘗毁하시니 於斯에 可見聖人之時異而道同하고 言殊而理合이로다 離合은 在時라 不由於道요 詳略은 在人이라 不關於法이니라


萬縷가 非不衣也로대 不可以一縷로 爲衣요 萬目이 非不網也로대 不可以一目으로 爲網이니 擧綱則網自擧요 振領則衣自振이니라 今道德經者는 擧綱振領之敎也니 所謂百川衆流가 至海而極하고 森羅萬象이 至空而極者也니라 古今註疏가 無慮數百家로대 各以己意而解經하고 不以經義而釋經이라 故로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며 且雖有彼善於此者나 未得全經之大義라 故로 挽近以來에 性命之學이 不講於世하야 而道德之裂이 久矣로다
世之學者가 不幸蔽於不該不遍一曲之書而日汨於傳註之卑하야 以自失其性命之情하고 不復知天地之大醇과 古人之大體也하나니 嗚呼哀哉라 痛纏心腑로다 故今譯解選註는 採拓其古之註疏의 精且微者하야 以講義本으로 爲正하고 以諸家解義로 爲助니 庶幾道德之要妙가 無復餘蘊而人皆可以復性命之正矣로다 彼飛仙變化之術과 黃庭大洞之法과 太上天眞木公金毋之號와 天皇太乙紫微北極之祀와 下至於丹藥奇技符록小數히 如水投海에 皆得함味하야 建一切法도 亦在於我矣며 蕩一切法도 亦在於我矣리니 如是則豈非世間出世間의 一介眞大丈夫也리오 看經之法은 先讀經文하고 且看講義하며 後閱諸註하야 於經義上一文一句에 無不奏刀然後에 放下其講義與諸注하고 再看經文하야 熟讀翫味하면 我知其渙然氷釋하고 怡然理順하야 天下殊途而同歸요 百慮而一致라 遊戱於不識不知之地하며 逍遙於何思何慮之天矣리라
應化 三千九年(1982)壬戌之寒際
五臺山人 呑虛 識
도덕경 선주 서설

도덕의 본체란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밝아서 삼제(三際) 가운데 보이지 않게 통하되 떠나감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시방세계에 통하여 있으되 가운데도 안도 아니오 밖도 아니며 마음과 눙앞에 빛나되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보고 듣는 즈음에 은은하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까이는 눈썹에서 떠나지 않고 멀리는 상선(象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드넓고 드높아서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옛 성인이 심오한 도덕을 안고서 때로는 동토(東土)에서, 때로는 서역(西域)에서 전하였다. 이른바 “하나의 법 가운데 유가는 뿌리를 심고 도가는 뿌리를 붙돋고 불가는 뿌리를 뽑았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도교(道敎)는 네 유파(流派)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현리파(玄理派)이다. 진대(晉代)의 청담가(淸談家)인 하안(何晏), 왕필(王弼) 등이 바로 그들이다. 둘째는 단정파(丹鼎派)이다. 위백양(魏伯陽), 갈치천(葛穉川) 등이 바로 그들이다. 셋째는 점험파(占驗派)이다 우길(于吉), 곽박(郭璞), 이순풍(李淳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넷째는 부록파(符派)이다. 장각(張角), 장도릉(張道陵), 도홍경(陶弘景), 구겸지(寇謙之)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선도(仙道)의 연원은 황노(黃老)로부터 나왔다. 황제(皇帝)가 정호(鼎湖)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노자가 함곡관(函谷關)에서 소를 타고서 세상을 떠나 은둔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열어주었다. 단정파(丹鼎派)란 이를 말한다. 도가의 서적은 『황정경(黃庭經)』(노자의 저서)『참동계(參同契)』(위백양(魏伯陽)의 저서), 『단경(丹經)』(悟眞人의 저서) 등이 수련의 요결(要訣)이자 복이(服餌)의 비방(秘方)이다. 그 공부를 통하여 단(丹)이 이뤄지면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장생불사를 얻는다는 것이 곧 그들의 도술(道術)이다.
불교에는 삼승(三乘)이 있고 선가(仙家)에는 오등(五等)이 있다. 불승(佛乘)의 이외엔 권설(權說) 아닌 것이 없고 천선(天仙) 이외엔 모두가 방문(傍門)이다. 천선(天仙)의 학문은 노장(老莊)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죽고 삶 또한 크지만 생사와 더불어 변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커져도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하며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는 자를 수(壽)”라 하니, 사생(死生)이 하나의 법이요 천인(天人)이 하나의 근원아다. 사대(四大)가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닌데 어떻게 사생을 보며 식심(識心)이 원래 환화(幻化)인데 어찌 생멸(生滅)을 볼 수 있겠는가. 이는 몸과 마음의 세계가 혼융(混融)하여 하나가 되어서 모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된다. 맹자가 말한 “성인으로서 알 수 없는 자를 신인(神人)”이라 한 것과 장자가 말한 ‘물화(物化)’란 모두 이를 가르킨 것이다.

소자유(蘇子由)가 이르기를 “중(中)이란 불성의 다른 이름이요 화(和)란 육도만행(六度萬行)의 總目”이라 하였다.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가 어찌 묘(妙)를 관(觀)하는 도가 아니며, 희로애락이 일어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이 어찌 요()를 관하는 도가 아니겠는가. 형이상(形而上)이란 어찌 상무(常無)의 도가 아니며, 형이하(形而下)란 어찌 상유(常有)의 도가 아니겠는가.
노자의 도는 청정(淸靜)과 무위(無爲)를 종(宗)으로 삼고 허명(虛明)으로 사물에 응함을 용(用)으로 삼고 사랑, 검소, 겸손, 낮춤을 행(行)으로 삼앗다. 이는 곧 사랑이 인(仁)이 아니며 검소함이 의(義)가 아니며 겸손함과 자기의 몸을 낮춤이 예(禮)가 아니겠는가. 도덕(道德)이란 인의(仁義)의 전체요 인의란 도덕의 일부분이다. 황노학(黃老學)은 융합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분리(分離)를 천히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도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요 육경(六經)의 가르침은 혼연(渾然)한 데 대충하고 분산된 것에 자세한 까닭에 인의를 용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강절(邵康節: 邵雍) 선생이 이르기를 “노자는 『주역』의 用을 얻었다.” 하지만 어떻게 체가 없는 用과 용이 없는 體가 있을수 있겠는가. 체에 근본한 용인 까닭에 용이 체를 여의지 않고, 용에 구현되는 체인 까닭에 체가 용을 여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는 일찍이 노자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훼담하지도 않았다.
 道德經 選註(도덕경 선주) 序說(서설)

夫道德之爲體也가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야 冥通於三際之中而無去無來요 洞徹於十方之界而非中非外며 昭昭於心目之間而無迹可尋이요 隱隱於視聽之際而非言可議라 近不離於眉睫하고 遠不出於象先이니 蕩蕩巍巍하야 卓然而獨存者也니라

古之聖人이 抱此道德之蘊奧하야 或鳴於東夏하고 或鳴於西域하니 所謂一法之中에 儒之植根과 道之培根과 釋之拔根者가 是也니라 老子之敎는 分四하니 一曰玄理派니 如晉之淸談家何晏 王弼之徒가 是也요 二曰丹鼎派니 如魏伯陽 葛穉川等이 是也요 三曰占驗派니 如于吉 郭璞 李淳風等이 是也요 四曰符派니 如張角 張道陵 陶弘景 寇謙之等이 是也니라


仙道之淵源은 出自黃老라 黃帝之於鼎湖에 騎龍上天하고 老子之於函關에 乘牛遯世가 已開其端이니 所謂丹鼎派者가 是也니라 其書之如黃庭經 參同契 丹經等이 無非修煉之要訣이며 服餌之秘方也니 若其功行丹成則謂可白日升天하야 得長生不死者가 卽其術也니라

佛有三乘하고 仙有五等則佛乘之外엔 無非權設也요 天仙之外엔 皆是傍門也니라 天仙之學은 老莊이 是也니 莊子가 曰死生이 亦大矣로대 而不得與之變하고 雖天地覆墜라도 亦將不與之遺라하며 老子가 曰死而不亡者가 壽라하시니 死生이 一揆요 天人이 同源이라 四大가 本非我有어니 豈死生之可見이며 識心이 元是幻化이니 豈生滅之可覩哉아 此는 身心世界가 混融爲一하야 總爲一眞法界者也니 孟子所謂聖而不可知之謂神과 莊子所謂物化者가 皆指此也니라


蘇子由가 曰中者는 佛性之異名而和者는 六度萬行之總目也라하니 喜怒哀樂之未發이 豈非觀妙之道乎며 發而皆中節이 豈非觀之道乎아 形而上者가 豈非常無之道乎며 形而下者가 豈非常有之道乎아 老子之道는 以淸靜無爲로 爲宗하고 以虛明應物로 爲用하고 以慈儉謙下로 爲行則慈非仁乎며 儉非義乎며 謙非禮乎아 盖道德者는 仁義禮之大全而仁義者는 道德之一偏이니 黃老之學은 貴合而賤離라 故爾德으로 爲本이요 六經之敎는 於渾者에 略하고 於散者에 詳이라 故以仁로 義爲用이니라

故로 邵子가 曰老子는 得易之體하고 孟子는 得易之用이라하니 豈有無體之用과 無用之體哉아 卽體之用故로 用不離體요 卽用之體故로 體不離用이니 此는 一而二요 二而一者也니라 故로 孔孟이 未嘗譽未嘗毁하시니 於斯에 可見聖人之時異而道同하고 言殊而理合이로다 離合은 在時라 不由於道요 詳略은 在人이라 不關於法이니라


萬縷가 非不衣也로대 不可以一縷로 爲衣요 萬目이 非不網也로대 不可以一目으로 爲網이니 擧綱則網自擧요 振領則衣自振이니라 今道德經者는 擧綱振領之敎也니 所謂百川衆流가 至海而極하고 森羅萬象이 至空而極者也니라 古今註疏가 無慮數百家로대 各以己意而解經하고 不以經義而釋經이라 故로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며 且雖有彼善於此者나 未得全經之大義라 故로 挽近以來에 性命之學이 不講於世하야 而道德之裂이 久矣로다

世之學者가 不幸蔽於不該不遍一曲之書而日汨於傳註之卑하야 以自失其性命之情하고 不復知天地之大醇과 古人之大體也하나니 嗚呼哀哉라 痛纏心腑로다 故今譯解選註는 採拓其古之註疏의 精且微者하야 以講義本으로 爲正하고 以諸家解義로 爲助니 庶幾道德之要妙가 無復餘蘊而人皆可以復性命之正矣로다 彼飛仙變化之術과 黃庭大洞之法과 太上天眞木公金毋之號와 天皇太乙紫微北極之祀와 下至於丹藥奇技符록小數히 如水投海에 皆得함味하야 建一切法도 亦在於我矣며 蕩一切法도 亦在於我矣리니 如是則豈非世間出世間의 一介眞大丈夫也리오 看經之法은 先讀經文하고 且看講義하며 後閱諸註하야 於經義上一文一句에 無不奏刀然後에 放下其講義與諸注하고 再看經文하야 熟讀翫味하면 我知其渙然氷釋하고 怡然理順하야 天下殊途而同歸요 百慮而一致라 遊戱於不識不知之地하며 逍遙於何思何慮之天矣리라

應化 三千九年(1982)壬戌之寒際
五臺山人 呑虛 識



도덕경 선주 서설

도덕의 본체란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밝아서 삼제(三際) 가운데 보이지 않게 통하되 떠나감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시방세계에 통하여 있으되 가운데도 안도 아니오 밖도 아니며 마음과 눙앞에 빛나되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보고 듣는 즈음에 은은하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까이는 눈썹에서 떠나지 않고 멀리는 상선(象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드넓고 드높아서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옛 성인이 심오한 도덕을 안고서 때로는 동토(東土)에서, 때로는 서역(西域)에서 전하였다. 이른바 “하나의 법 가운데 유가는 뿌리를 심고 도가는 뿌리를 붙돋고 불가는 뿌리를 뽑았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도교(道敎)는 네 유파(流派)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현리파(玄理派)이다. 진대(晉代)의 청담가(淸談家)인 하안(何晏), 왕필(王弼) 등이 바로 그들이다. 둘째는 단정파(丹鼎派)이다. 위백양(魏伯陽), 갈치천(葛穉川) 등이 바로 그들이다. 셋째는 점험파(占驗派)이다 우길(于吉), 곽박(郭璞), 이순풍(李淳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넷째는 부록파(符派)이다. 장각(張角), 장도릉(張道陵), 도홍경(陶弘景), 구겸지(寇謙之)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선도(仙道)의 연원은 황노(黃老)로부터 나왔다. 황제(皇帝)가 정호(鼎湖)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노자가 함곡관(函谷關)에서 소를 타고서 세상을 떠나 은둔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열어주었다. 단정파(丹鼎派)란 이를 말한다. 도가의 서적은 『황정경(黃庭經)』(노자의 저서)『참동계(參同契)』(위백양(魏伯陽)의 저서), 『단경(丹經)』(悟眞人의 저서) 등이 수련의 요결(要訣)이자 복이(服餌)의 비방(秘方)이다. 그 공부를 통하여 단(丹)이 이뤄지면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장생불사를 얻는다는 것이 곧 그들의 도술(道術)이다.

불교에는 삼승(三乘)이 있고 선가(仙家)에는 오등(五等)이 있다. 불승(佛乘)의 이외엔 권설(權說) 아닌 것이 없고 천선(天仙) 이외엔 모두가 방문(傍門)이다. 천선(天仙)의 학문은 노장(老莊)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죽고 삶 또한 크지만 생사와 더불어 변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커져도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하며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는 자를 수(壽)”라 하니, 사생(死生)이 하나의 법이요 천인(天人)이 하나의 근원아다. 사대(四大)가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닌데 어떻게 사생을 보며 식심(識心)이 원래 환화(幻化)인데 어찌 생멸(生滅)을 볼 수 있겠는가. 이는 몸과 마음의 세계가 혼융(混融)하여 하나가 되어서 모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된다. 맹자가 말한 “성인으로서 알 수 없는 자를 신인(神人)”이라 한 것과 장자가 말한 ‘물화(物化)’란 모두 이를 가르킨 것이다.

소자유(蘇子由)가 이르기를 “중(中)이란 불성의 다른 이름이요 화(和)란 육도만행(六度萬行)의 總目”이라 하였다.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가 어찌 묘(妙)를 관(觀)하는 도가 아니며, 희로애락이 일어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이 어찌 요()를 관하는 도가 아니겠는가. 형이상(形而上)이란 어찌 상무(常無)의 도가 아니며, 형이하(形而下)란 어찌 상유(常有)의 도가 아니겠는가.

노자의 도는 청정(淸靜)과 무위(無爲)를 종(宗)으로 삼고 허명(虛明)으로 사물에 응함을 용(用)으로 삼고 사랑, 검소, 겸손, 낮춤을 행(行)으로 삼앗다. 이는 곧 사랑이 인(仁)이 아니며 검소함이 의(義)가 아니며 겸손함과 자기의 몸을 낮춤이 예(禮)가 아니겠는가. 도덕(道德)이란 인의(仁義)의 전체요 인의란 도덕의 일부분이다. 황노학(黃老學)은 융합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분리(分離)를 천히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도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요 육경(六經)의 가르침은 혼연(渾然)한 데 대충하고 분산된 것에 자세한 까닭에 인의를 용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강절(邵康節: 邵雍) 선생이 이르기를 “노자는 『주역』의 用을 얻었다.” 하지만 어떻게 체가 없는 用과 용이 없는 體가 있을수 있겠는가. 체에 근본한 용인 까닭에 용이 체를 여의지 않고, 용에 구현되는 체인 까닭에 체가 용을 여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는 일찍이 노자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훼담하지도 않았다.

(※ 『논어』에 이르기를 “전술(傳述)은 하되 창작을 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하는 것을 나는 삼가 우리 노팽(老彭)에게 비교한다.”하였고 『맹자』는 “양묵(楊墨)의 화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다.” 변론하였으나 일찍이 노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성인이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도는 똑같고 말씀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임을 볼 수 잇다.세속을 여의거나 함께 하는 것은 시세(時勢)에 달려 있는 것이지 도에 의함이 아니며, 자세히 말하고 간략히 말함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법과는 관계가 없다. 일만 개의 실오라기가 옥을 구성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의 실오라기로써는 한 벌의 옷을 이룰 수 없고, 일만 개의 그물코가 그물 아닌 것이 없지만 하나의 그물코로써는 그물을 만들 수 없다. 벼릿줄을 들면 그물이 저절로 들추어지고 갓을 들면 옷이 저절로 들어지기 머련이다.
바로 이 『도덕경』은 벼릿줄을 들고 옷깃을 들추어준 가르침이다. 이른바 수많은 시냇물이 바다에 이르러서 멈추고 삼라만상이 공(空)에 이르러서 다한 것이다. 고금의 주석서가 무려 몇 백 사람이 섰지만 각각 자기의 뜻으로 경문을 해석하였을 뿐, 경문의 본래 뜻으로 경문을 해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마치 외진 성밖의 우유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저것이 이 주해서보다 조금 나은 것이야 있지만 전편(全篇)의 대의(大義)를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 심오한 천리(天理)를 논한 성명학(性命學)이 세상에 강론되지 못하여서 도덕이 분열된 지 오래이다. 세상의 배운 이들이 불행스럽게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한 쪽에 치우친 책에 눈이 가리워 저속한 주해에 골몰함으로써 스스로 성명(性命)의 실상을 잃은 나머지 다시는 천지(天地)의 순후(醇厚)한 이치와 고인(古人)의 대체(大體)의 본령(本領)을 깨닫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아! 슬픈 일이다. 가슴속 깊이 뼈아프게 저며든다.
 道德經 選註(도덕경 선주) 序說(서설)

夫道德之爲體也가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야 冥通於三際之中而無去無來요 洞徹於十方之界而非中非外며 昭昭於心目之間而無迹可尋이요 隱隱於視聽之際而非言可議라 近不離於眉睫하고 遠不出於象先이니 蕩蕩巍巍하야 卓然而獨存者也니라

古之聖人이 抱此道德之蘊奧하야 或鳴於東夏하고 或鳴於西域하니 所謂一法之中에 儒之植根과 道之培根과 釋之拔根者가 是也니라 老子之敎는 分四하니 一曰玄理派니 如晉之淸談家何晏 王弼之徒가 是也요 二曰丹鼎派니 如魏伯陽 葛穉川等이 是也요 三曰占驗派니 如于吉 郭璞 李淳風等이 是也요 四曰符派니 如張角 張道陵 陶弘景 寇謙之等이 是也니라


仙道之淵源은 出自黃老라 黃帝之於鼎湖에 騎龍上天하고 老子之於函關에 乘牛遯世가 已開其端이니 所謂丹鼎派者가 是也니라 其書之如黃庭經 參同契 丹經等이 無非修煉之要訣이며 服餌之秘方也니 若其功行丹成則謂可白日升天하야 得長生不死者가 卽其術也니라

佛有三乘하고 仙有五等則佛乘之外엔 無非權設也요 天仙之外엔 皆是傍門也니라 天仙之學은 老莊이 是也니 莊子가 曰死生이 亦大矣로대 而不得與之變하고 雖天地覆墜라도 亦將不與之遺라하며 老子가 曰死而不亡者가 壽라하시니 死生이 一揆요 天人이 同源이라 四大가 本非我有어니 豈死生之可見이며 識心이 元是幻化이니 豈生滅之可覩哉아 此는 身心世界가 混融爲一하야 總爲一眞法界者也니 孟子所謂聖而不可知之謂神과 莊子所謂物化者가 皆指此也니라


蘇子由가 曰中者는 佛性之異名而和者는 六度萬行之總目也라하니 喜怒哀樂之未發이 豈非觀妙之道乎며 發而皆中節이 豈非觀之道乎아 形而上者가 豈非常無之道乎며 形而下者가 豈非常有之道乎아 老子之道는 以淸靜無爲로 爲宗하고 以虛明應物로 爲用하고 以慈儉謙下로 爲行則慈非仁乎며 儉非義乎며 謙非禮乎아 盖道德者는 仁義禮之大全而仁義者는 道德之一偏이니 黃老之學은 貴合而賤離라 故爾德으로 爲本이요 六經之敎는 於渾者에 略하고 於散者에 詳이라 故以仁로 義爲用이니라

故로 邵子가 曰老子는 得易之體하고 孟子는 得易之用이라하니 豈有無體之用과 無用之體哉아 卽體之用故로 用不離體요 卽用之體故로 體不離用이니 此는 一而二요 二而一者也니라 故로 孔孟이 未嘗譽未嘗毁하시니 於斯에 可見聖人之時異而道同하고 言殊而理合이로다 離合은 在時라 不由於道요 詳略은 在人이라 不關於法이니라


萬縷가 非不衣也로대 不可以一縷로 爲衣요 萬目이 非不網也로대 不可以一目으로 爲網이니 擧綱則網自擧요 振領則衣自振이니라 今道德經者는 擧綱振領之敎也니 所謂百川衆流가 至海而極하고 森羅萬象이 至空而極者也니라 古今註疏가 無慮數百家로대 各以己意而解經하고 不以經義而釋經이라 故로 乳非城外者가 頗多하며 且雖有彼善於此者나 未得全經之大義라 故로 挽近以來에 性命之學이 不講於世하야 而道德之裂이 久矣로다

世之學者가 不幸蔽於不該不遍一曲之書而日汨於傳註之卑하야 以自失其性命之情하고 不復知天地之大醇과 古人之大體也하나니 嗚呼哀哉라 痛纏心腑로다 故今譯解選註는 採拓其古之註疏의 精且微者하야 以講義本으로 爲正하고 以諸家解義로 爲助니 庶幾道德之要妙가 無復餘蘊而人皆可以復性命之正矣로다 彼飛仙變化之術과 黃庭大洞之法과 太上天眞木公金毋之號와 天皇太乙紫微北極之祀와 下至於丹藥奇技符록小數히 如水投海에 皆得함味하야 建一切法도 亦在於我矣며 蕩一切法도 亦在於我矣리니 如是則豈非世間出世間의 一介眞大丈夫也리오 看經之法은 先讀經文하고 且看講義하며 後閱諸註하야 於經義上一文一句에 無不奏刀然後에 放下其講義與諸注하고 再看經文하야 熟讀翫味하면 我知其渙然氷釋하고 怡然理順하야 天下殊途而同歸요 百慮而一致라 遊戱於不識不知之地하며 逍遙於何思何慮之天矣리라

應化 三千九年(1982)壬戌之寒際
五臺山人 呑虛 識



도덕경 선주 서설

도덕의 본체란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밝아서 삼제(三際) 가운데 보이지 않게 통하되 떠나감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시방세계에 통하여 있으되 가운데도 안도 아니오 밖도 아니며 마음과 눙앞에 빛나되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보고 듣는 즈음에 은은하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까이는 눈썹에서 떠나지 않고 멀리는 상선(象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드넓고 드높아서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옛 성인이 심오한 도덕을 안고서 때로는 동토(東土)에서, 때로는 서역(西域)에서 전하였다. 이른바 “하나의 법 가운데 유가는 뿌리를 심고 도가는 뿌리를 붙돋고 불가는 뿌리를 뽑았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도교(道敎)는 네 유파(流派)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현리파(玄理派)이다. 진대(晉代)의 청담가(淸談家)인 하안(何晏), 왕필(王弼) 등이 바로 그들이다. 둘째는 단정파(丹鼎派)이다. 위백양(魏伯陽), 갈치천(葛穉川) 등이 바로 그들이다. 셋째는 점험파(占驗派)이다 우길(于吉), 곽박(郭璞), 이순풍(李淳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넷째는 부록파(符派)이다. 장각(張角), 장도릉(張道陵), 도홍경(陶弘景), 구겸지(寇謙之) 등이 바로 그들이다.

선도(仙道)의 연원은 황노(黃老)로부터 나왔다. 황제(皇帝)가 정호(鼎湖)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노자가 함곡관(函谷關)에서 소를 타고서 세상을 떠나 은둔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열어주었다. 단정파(丹鼎派)란 이를 말한다. 도가의 서적은 『황정경(黃庭經)』(노자의 저서)『참동계(參同契)』(위백양(魏伯陽)의 저서), 『단경(丹經)』(悟眞人의 저서) 등이 수련의 요결(要訣)이자 복이(服餌)의 비방(秘方)이다. 그 공부를 통하여 단(丹)이 이뤄지면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장생불사를 얻는다는 것이 곧 그들의 도술(道術)이다.

불교에는 삼승(三乘)이 있고 선가(仙家)에는 오등(五等)이 있다. 불승(佛乘)의 이외엔 권설(權說) 아닌 것이 없고 천선(天仙) 이외엔 모두가 방문(傍門)이다. 천선(天仙)의 학문은 노장(老莊)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죽고 삶 또한 크지만 생사와 더불어 변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커져도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하며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는 자를 수(壽)”라 하니, 사생(死生)이 하나의 법이요 천인(天人)이 하나의 근원아다. 사대(四大)가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닌데 어떻게 사생을 보며 식심(識心)이 원래 환화(幻化)인데 어찌 생멸(生滅)을 볼 수 있겠는가. 이는 몸과 마음의 세계가 혼융(混融)하여 하나가 되어서 모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된다. 맹자가 말한 “성인으로서 알 수 없는 자를 신인(神人)”이라 한 것과 장자가 말한 ‘물화(物化)’란 모두 이를 가르킨 것이다.

소자유(蘇子由)가 이르기를 “중(中)이란 불성의 다른 이름이요 화(和)란 육도만행(六度萬行)의 總目”이라 하였다.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가 어찌 묘(妙)를 관(觀)하는 도가 아니며, 희로애락이 일어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이 어찌 요()를 관하는 도가 아니겠는가. 형이상(形而上)이란 어찌 상무(常無)의 도가 아니며, 형이하(形而下)란 어찌 상유(常有)의 도가 아니겠는가.

노자의 도는 청정(淸靜)과 무위(無爲)를 종(宗)으로 삼고 허명(虛明)으로 사물에 응함을 용(用)으로 삼고 사랑, 검소, 겸손, 낮춤을 행(行)으로 삼앗다. 이는 곧 사랑이 인(仁)이 아니며 검소함이 의(義)가 아니며 겸손함과 자기의 몸을 낮춤이 예(禮)가 아니겠는가. 도덕(道德)이란 인의(仁義)의 전체요 인의란 도덕의 일부분이다. 황노학(黃老學)은 융합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분리(分離)를 천히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도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요 육경(六經)의 가르침은 혼연(渾然)한 데 대충하고 분산된 것에 자세한 까닭에 인의를 용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강절(邵康節: 邵雍) 선생이 이르기를 “노자는 『주역』의 用을 얻었다.” 하지만 어떻게 체가 없는 用과 용이 없는 體가 있을수 있겠는가. 체에 근본한 용인 까닭에 용이 체를 여의지 않고, 용에 구현되는 체인 까닭에 체가 용을 여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는 일찍이 노자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훼담하지도 않았다.

(※ 『논어』에 이르기를 “전술(傳述)은 하되 창작을 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하는 것을 나는 삼가 우리 노팽(老彭)에게 비교한다.”하였고 『맹자』는 “양묵(楊墨)의 화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다.” 변론하였으나 일찍이 노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성인이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도는 똑같고 말씀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임을 볼 수 잇다.세속을 여의거나 함께 하는 것은 시세(時勢)에 달려 있는 것이지 도에 의함이 아니며, 자세히 말하고 간략히 말함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법과는 관계가 없다. 일만 개의 실오라기가 옥을 구성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의 실오라기로써는 한 벌의 옷을 이룰 수 없고, 일만 개의 그물코가 그물 아닌 것이 없지만 하나의 그물코로써는 그물을 만들 수 없다. 벼릿줄을 들면 그물이 저절로 들추어지고 갓을 들면 옷이 저절로 들어지기 머련이다.

바로 이 『도덕경』은 벼릿줄을 들고 옷깃을 들추어준 가르침이다. 이른바 수많은 시냇물이 바다에 이르러서 멈추고 삼라만상이 공(空)에 이르러서 다한 것이다. 고금의 주석서가 무려 몇 백 사람이 섰지만 각각 자기의 뜻으로 경문을 해석하였을 뿐, 경문의 본래 뜻으로 경문을 해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마치 외진 성밖의 우유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저것이 이 주해서보다 조금 나은 것이야 있지만 전편(全篇)의 대의(大義)를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 심오한 천리(天理)를 논한 성명학(性命學)이 세상에 강론되지 못하여서 도덕이 분열된 지 오래이다. 세상의 배운 이들이 불행스럽게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한 쪽에 치우친 책에 눈이 가리워 저속한 주해에 골몰함으로써 스스로 성명(性命)의 실상을 잃은 나머지 다시는 천지(天地)의 순후(醇厚)한 이치와 고인(古人)의 대체(大體)의 본령(本領)을 깨닫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아! 슬픈 일이다. 가슴속 깊이 뼈아프게 저며든다.

오늘날 이를 국역하면서 가려 뽑은 주해는 옛 사람의 정밀하고도 은미(隱微)한 옛 주해를 선별하여 강의본(講義本)으로써 주를 삼고 제가(諸家)의 해석을 보조로 삼았다. 이에 도덕의 요체와 오묘함이 다시는 남김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성명(性命)의 바른 도로 회복하게 될 것이다. 신선이 되어 변화하는 술수와 『황정경(黃庭經)』『대동경(大洞經)』의 법과 태상(太上), 천진(天眞), 목공(木公), 금모(金母)의 호(號)와 천황태을(天皇太乙), 자미성(紫微星), 북극성(北極星)의 제사와 아래로는 단약(丹藥)의 기이한 비기(秘技)와 부록(符록)의 작은 술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마치 시냇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 짜지는 것처럼 모든 법을 세우는 것 또한 나에게 있으며 모든 법을 없애는 것 또한 나에게 있다. 이와 같이 되면 어찌 세간과 출세간의 하나의 참다운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경전을 보는 법은 먼저 경문을 읽고 이어서 또 강의(講義)를 보며 그 뒤에 여러 사람의 주해를 보면서 경의(經義)의 한 문장 한 구절까지 막힘이 없게 되면 그 뒤에는 강의(講義)와 여러 사람의 주해를 모두 놓아버리고 다시 경문을 보면서 익히 읽고 깊이 음미하면 얼음이 풀리듯 문맥이 막힘이 없어서 이 세상의 수많은 길이 있지만 한 곳으로 귀결되고 사람의 생각은 수없이 많으나 구 귀취는 하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알 수 없는 경지에 노닐게 됨으로써 그 무엇을 생각하고 그 무엇을 염려할 것도 없는 하늘에 소요(逍遙)하게 될 것이다.

불기3009년(1982) 임술 겨울에 오대상인 탄허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