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석림사와 박세당 유적

수락산 중턱 남쪽 기슭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7번지에는 석림사(石林寺)가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의 옛 절터로 석탑과 축대·주춧돌만이 남아있던 곳에 현종 12년(1671) 석현화상과 치흠이 석림암으로 창건하였다. 그리고 박세당이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퇴락한 것을 1956년에 비구니 상인이 복원하였다. 석림사 중수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박세당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후원하였다고 한다. 지금 옛 건물로는 산영각·천태각 등이 남아 있고 법당과 부속건물은 근래에 재건한 것이다.

박세당의 묘소와 영정각
석림사 옆 장암동 197번지에는 박세당의 묘소와 영정각이 있다. 박세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로서 정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수락산 기슭에 은둔하여 농사를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는 실학파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박세당 묘소 동쪽편 장암동 산 146-1에는 계곡 사이의 깨끗한 바윗돌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진 6각형의 궤산정이 있다. 이곳은 박세당이 살았던 곳이다. 궤산정이란 이름은 박세당이 이 정자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할 때 자주 강론하던 ‘아홉길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삼태기의 흙이 모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한다. 또 정자 밑 바위에는 ‘西溪幽居’(서계가 한적하게 산다), ‘聚勝臺’(경치 좋은 곳) ‘石泉洞’(돌과 샘이 어우러진 곳)이라는 박세당의 암각이 뚜렷하다. 또 청풍정이 있던 자리 옆에는 박세당의 처남 남구만이 쓴 ‘水落洞天’이라는 초서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 또 박세당이 심은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어, 두 그루 소나무와 은행나무 등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노강서원(鷺江書院)
노강서원은 수락산 남쪽 중턱 의정부시 장암동 146-1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강서원은 숙종 21년(1695) 서울 노량진에 건립한 충신 정려로서 ‘朴泰輔之祠’라 사액되었다가, 정조 15년(1791)에 노강서원으로 다시 사액되었다. 6·25전쟁 때 훼철되어 1969년 수락산 기슭 옛 김시습의 서원터에 새로 건립되었다. 경내 건물로 박세당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 위패가 모셔진 본전과 동재·서재·정문(旌門)과 관리사 등이 있다.

우우당(友于堂)과 벽운동천(碧雲洞天)
수락산 입구 노원구 상계동 1241번지의 우우당은 영풍부원군 홍봉한이 영조 37년과 44년 두번씩 영의정을 지냈을 당시의 벽운동 별장 안채의 일부이다. 이곳에는 추사 글씨 ‘友于堂’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정문 앞 살구나무 근처에는 승마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홍씨 일문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벽운동별장에는 문인·정객들이 모여들어 탄금대와 벽운루·우우당은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홍봉한의 맏딸인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서정성을 키웠고, 후에 좬한중록좭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벽운동의 주인 홍봉한이 세상을 떠난 약 100년 뒤에는 이병직의 고조되는 부원군이 벽운동의 명승지를 사들여 5대에 걸쳐 지켜오다가, 1957년 6월에 이르러 덕성학원에서 매입, 덕성여대 생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수락산 계곡 냇가 상계동 1240번지에는 큼직한 바위에 ‘碧雲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수락산 계곡으로 흐르는 개울을 벽운천이라 부르며, 이곳에 있는 마을을 벽운동 또는 백운동이라 부른다. 이것은 계곡에 바위가 허옇게 드러난 수락산의 절경이 골짜기의 계곡과 어우러져 흰 구름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우우당의 한쪽에 백운루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또 벽운동천이라 새긴 바위 옆에는 이병직의 호인 국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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